작위
- 작위(作爲)는 일상에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은 데도 그렇게 보이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를 뜻하며, 법률 용어로는 '일정한 행위를 하는 적극적 태도'를 의미한다. 보통 '금지행위를 의식적으로 하였을 때'에 사용한다.
1. 개요
爵位
중국에서 천자가 제후들에게 땅을 분봉하고 같이 내린 지위를 일컫는 말.
중국에서 작위의 등급은 총 5가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고하는 공, 후, 백, 자, 남 순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작이나 후작 같은 오등작의 명칭은 바로 이것을 순서대로 그대로 대입한 것이다. 대개 땅의 크기와 비옥도는 이 작위와 비례하고, 천자의 수도와 봉건영지와의 거리는 대개 반비례한다. 이 중에서도 완전하게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작위는 백작 이상인 경우가 많다.
일례로 진(秦)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호를 내린 것은 주나라를 침범한 외적을 물리친 대가로 주왕실에서 진나라의 작위를 자작에서 백작으로 올려주고 주나라의 근본되는 땅인 옹 땅을 하사하면서부터였다.
또한 천자가 제후를 부를 때는 나라 이름과 작위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 진나라 군주 = 진백(秦伯)
나중에 점차 작위가 늘어나면서 황제-국왕-친왕, 군왕, 패륵 등의 종친작위-일반적인 작위(오등작) 순으로 분화되었다.
2. 중국의 작위
2.1. 하상주 삼대(三代)
유교의 경전에 따르면 하나라에서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작을 시행했고 상나라 때 자와 남을 없애 3등작이 되었다가 주나라 성립 후 하나라 때의 5등작을 부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라의 작위는 유가적 이상에 맞추어 인위적으로 꾸민 흔적이 있어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하나라 때 있었다는 자(子), 남(男)의 경우 원래 제후를 가리키는데 쓰이지 않았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 후(侯): 후는 활과 화살을 든 인간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에서 유래하였다. 갑골문 때에는 한 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문자였다.
2.2. 진한
일반인에게도 수여되는 작위 제도는 진나라(秦)의 상앙이 실시한 변법에 따라 개인이 세운 군공을 포상하기 위한 20등급의 작위가 설치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제도는 전한 시대에 들어와서 군공뿐만이 아니라 신분의 지위고하에 따라 수여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황족에게 수여되는 작위는 왕(王), 후(侯)의 두 종류였고, 황족 이외의 사람에게 수여되는 작위는 진의 제도와 같은 20등급이었다.
전한 초기에 위와 같이 정비된 작위 제도는 한무제가 벌인 각종 대외원정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지자 군사비 조달을 명목으로 매작하는 일이 잦아져 가치가 떨어졌다. 이에 군공에 의한 11등급의 작위를 새로 만들어 11급 군위(軍衛), 10급 정려서장(政戻庶長) , 9급 집융(執戎), 8급 낙경(樂卿), 7급 천부(千夫), 6급 병탁(秉鐸), 5급 관수(官首), 4급 원융사(元戎士), 3급 양사(良士), 2급 한여위(閒輿衛), 1급 조사(造士)를 두었다.
하지만 돈으로 작위를 사고 파는 일이 끊이지 않는 바람에 후한대에 이르러서는 관내후만이 작위다운 작위로 인식되어 이를 세분화해 현후(縣侯), 향후(郷侯), 정후(亭侯)로 나누었다. 일례로 관우가 받은 작위인 한수정후(漢壽亭侯)의 정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2.3. 위진남북조
2.3.1. 위진(魏晉)
후한을 멸망시킨 위나라는 한나라 때의 12등작을 폐지하고 하상주 삼대의 제도를 모방해 공, 후, 백, 자, 남의 5등작으로 환원했으나 곧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현후(縣侯), 향후(郷侯), 관내후(關内侯)의 9등작으로 바꾸었다. 황족에게 수여하는 이 9등작제는 문제 황초(黄初) 3년(222)에 황제의 아들을 왕(王)으로, 왕의 아들을 향공(鄕公)으로, 왕세자의 아들을 향후(鄕侯)로, 공의 아들을 정백(亭伯)으로 봉하도록 했다. 황초 5년(224)에는 왕을 현왕(縣王)으로 바꾸었다가 명제 태화(太和) 6년(232)에는 다시 현왕을 군왕(郡王)으로 고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명칭과 위계에 변화가 있었다.
한편 황족 이외의 일반 사민이나 병사에게 수여되는 작위로는 관내후 아래에 명호후(名號侯), 관중후(關中侯), 관외후(關外侯), 오대부후(五大夫侯)를 증설해 공적에 따라 내려주었다.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진무제 때인 함녕(咸寧) 3년(275)에 완비된 작위 제도는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개국군공(開國郡公), 개국현공(開國縣公), 개국군후(開國郡侯), 개국현후(開國縣侯), 개국후(開國侯), 개국백(開國伯),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 향후(郷侯), 정후(亭侯), 관내후(關内侯)로 구성되었다.
황족에게는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군공(郡公), 현공(縣公), 군후(郡侯), 현후(縣侯) 등을 수여했고, 공신에게는 개국군공(開國郡公), 개국현공(開國縣公), 개국군후(開國郡侯), 개국현후(開國縣侯), 개국후(開國侯),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 향후(郷侯), 정후(亭侯), 관내후(關内侯), 관외후(關外侯) 등을 수여했다. 작위의 앞에 붙는 개국(開國)이라는 두 글자는 서진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동진 때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어 후대 왕조들이 작위를 정할 때 의례적으로 덧붙이는 접두어 역할을 하였다.
2.3.2. 남북조(南北朝)
동진의 뒤를 이은 송(宋), 제(齊), 양(梁)은 대체로 위진 시대의 작위 제도를 연용하였으며 진(陳)대에는 군왕(郡王), 사왕(嗣王), 번왕(藩王), 개국군공(開國郡公), 개국현공(開國縣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목식후(沐食侯), 향정후(郷亭侯), 관중관외후(關中關外侯)의 12등작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북위에서는 도무제 황시(皇始) 원년(396)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작으로 정했다가 도무제 천사(天賜) 원년(404)에 백과 남을 뺀 왕(王), 공(公), 후(侯), 자(子)의 4등작이 되었고 이후 제외시켰던 백과 남을 다시 추가해 6등작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선무제 경명(景明) 원년(500)에서야 왕(王), 개국군공(開國郡公), 산공(散公), 후(侯), 산후(散侯), 백(伯), 산백(散伯), 자(子), 산자(散子), 남(男), 산남(散男)의 11등작으로 제도가 구성되었으며 황족뿐만 아니라 공신도 왕으로 봉해질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북제에서는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6등작을 두었고, 북주에서는 처음에는 개국공(開國公), 개국후(開國侯), 개국백(開國伯),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의 5등작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고쳐서 왕(王), 군왕(郡王), 현왕(縣王), 국공(國公), 개국군공(開國郡公), 개국현공(開國縣公), 개국현후(開國縣侯), 개국현백(開國縣伯), 개국현자(開國縣子), 개국현남(開國縣男), 개국향남(開國郷男)의 11등작으로 바꾸었다. 북위, 북제, 북주의 작위를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2.4. 수 ~ 원
수대부터 당, 요, 송, 금, 원대까지의 작위는 아래와 같다.
2.5. 명
명나라에서는 황족, 외척, 공신에게 수여되는 작위가 각각 달랐다. 우선 황제의 아들에게는 친왕(親王)에, 황제의 손자 중 친왕의 아들에게는 군왕(郡王)에 봉했다. 그리고 친왕(親王)의 맏아들은 1품 세자(世子), 친왕의 맏손자는 1품 세손(世孫)으로 봉했고 군왕(郡王)의 맏아들은 2품 장자(長子), 군왕의 맏손자는 2품 장손(長孫)으로 봉했다. 친왕과 군왕의 맏아들이 아닌 다른 아들에게는 세대가 내려가는 순서에 따라 종1품 진국장군(鎭國將軍), 종2품 보국장군(輔國將軍), 종3품 봉국장군(奉國將軍), 중4품 진국중위(鎭國中尉), 종5품 보국중위(輔國中尉), 종6품 봉국중위(奉國中尉)로 삼았다.
외척에게는 공(公), 후(侯), 백(伯)의 3등작을 수여하는 대신 세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신에게 수여되는 국공(國公), 후(侯), 백(伯)의 3등작은 세습이 가능했다. 그리고 홍무제와 함께 거병했던 개국공신의 경우에 한정해서 사후에 왕(王)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2.6. 청
청나라에서도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황족에게 수여되는 작위와 외척, 공신에게 수여되는 작위가 달랐다. 황족에게는 황제와의 존비친속이 가까운 정도에 따라 화석친왕(和碩親王), 다라군왕(多羅郡王), 다라패륵(多羅貝勒), 고산패자(固山貝子), 봉은진국공(奉恩鎭國公), 봉은보국공(奉恩輔國公), 불입팔분진국공(不入八分鎭國公), 불입팔분보국공(不入八分輔國公), 진국장군(鎭國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봉국장군(奉國將軍), 봉은장군(奉恩將軍)의 순서로 작위가 내려졌는데 이 중 진국장군, 보국장군, 봉국장군은 각각 1등, 2등, 3등으로 다시 세분화되었다.
외척과 공신에게 수여되는 작위의 시대별 변천은 아래와 같다.
3. 한국의 작위
작위라는게 기본적으로 주나라식 신분제(천자 - 제후 - 대부(가신) - 평민 - 노예)의 연장선이다. 한국은 주나라식 오등작이나 군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우리만의 신분제가 있었기에(군주(귀족대표) - 연합귀족 - 평민 - 노예) 고유의 작위를 쓰기도 했다. "작위" 문서에는 우리식 봉작제만 소개하고 "군호", "오등작"은 각 문서에 소개한다.
3.1. 고조선·부여 ~ 남북국시대
고조선, 부여 및 삼국, 발해는 오등작, 군호, 우리식 봉작제 모두 사용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너무 적어 단편적인 사용예만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왕작이 있었고 "상(相)"이라고 하는 관직인지 우리식 작위인지 확인할 수 없는 명칭도 나온다. 한서에 기록된 상은 개인이 백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조선상, 니계상이라는 지역명(?)이 붙은 상이 나온다.
부여는 세력이 큰 부족장들을 "제가(諸加)"라고 부르고, 임금 휘하에 "마가", "저가", "우가", "구가" 등 "가(加)"들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가를 관직으로 혹은 제후의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 이 "가"는 명칭은 '''고구려'''에서도 존재하여 "대가(大加)", "고추가(古雛加)", "고추대가(古鄒大加)"라는 명칭을 고구려 왕족이나 고구려에 투항한 소국들의 왕족에게 하사하였다.[4]
가야에서도 일본서기의 사비회의 당시 참석자 기록을 통해 작위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에서 가장 강한 반파국, 안라국 두 나라의 임금만이 왕(王)을 칭했으며, 가야의 다른 작은 나라들의 임금은 한기(旱岐)로 불렸다. 이외에 한기 아래의 작위로 보이는 하한기(下旱岐)나 차한기(次旱岐), 그리고 귀족 작위로 보이는 상수위(上首位), 이수위(二首位) 등이 등장한다.
신라는 "간(干)", "간지(干支)"라는 명칭을 지닌 소국 군주들을 거느렸고 "갈문왕"이라는 고유 작위를 만들었다. 특이한 것은 신라 초기엔 "왕(王)"이라는 명칭은 신라 군주 한 사람을 뜻하는게 아니라 모든 부족(가문)의 대표를 부르는 명칭이었다.[5] 이후로도 신라왕 아래의 제후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례가 몇 있는데 문무왕이 보덕국왕을 책봉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중국 천자의 책봉 스타일이며 훗날 견훤, 왕건도 서로 주고받는 서신에서 허울만 남은 신라 왕실을 황옥(黃屋)[6] 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제후왕으로 자처한 적이 있다.
백제, 발해는 오등작만 사용한 기록이 있다.
이상 오등작, 군호에 대해 궁금하다면 각 문서 참조.
3.2. 고려 왕조
고려는 초기 봉작제가 정비되지 못해 봉작제의 모습이 다양했다. 초기에는 군호를 개조하여 사용했으며 이후 오등작과 훈위를 사용하다 군호를 사용하게 된다.
- 태자(太子) 작위
- 훈위(勳位)
고려의 오등작, 군호에 대해선 각 문서 참조.
3.2.1. 외명부
외명부(外命婦)는 여성의 작위를 의미한다. 왕실, 사대부, 공신의 아내, 딸 등이 받았다.[8][9]
- 비(妃)
- 원비(院妃)
- 궁대부인(宮大夫人), 궁부인(宮夫人), 부원부인(府院夫人), 원부인(院夫人), 부인(夫人)
- 원주(院主), 전주(殿主), 궁주(宮主)
- 옹주(翁主)
- 대장공주(大長公主)
- 장공주(長公主)
- 공주(公主)
- 국대부인(國大夫人)
- 군대부인(郡大夫人)
- 군군(郡君)
- 현군(縣君)
3.3.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왕조는 초기엔 오등작, 이후 군호를 썼다. 군호가 왕조 내에서 세분화, 개조 됐으니 왕조 고유의 봉작제라고 볼 수 있을 수도?
군호를 받은 왕족, 신하 밑에는 정3품 도정(都正)과 정(正)은 대군의 손자들, 왕자군의 아들들에게 수여되었고 종3품 부정(副正)은 대군의 증손자들, 왕자군의 손자들에게 봉해졌다. 이어서 정4품 수(守)는 왕자군의 증손자들에게, 종4품 부수(副守)는 종친의 양첩 소생 서자에게, 정5품 영(令)과 종5품 부령(副令) 및 정6품 감(監)은 종친의 천첩 소생 얼자에게 주어지는 작위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실제로는 여러 사정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한편 왕실에 장가든 부마의 경우에도 아내의 적서에 따라 작위가 달랐다.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에게 장가든 사위는 위(尉)로 봉해졌으나 공주의 남편은 정1품, 종1품의 위였고 옹주의 남편은 정2품, 종2품의 위인 것이 차이점이다. 또한 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에게 장가든 사위는 정3품 부위(副尉)로, 세자의 서녀인 현주(縣主)에게 장가든 사위는 종3품 첨위(僉尉)로 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오등작, 군호, 부원군, 대원군 참조.
3.4. 고려와 조선의 작위 비교
4. 서양의 작위
- 작위/유럽 문서 참조
5. 중동,이슬람 세계의 작위
고대 아시리아제국에서부터 페르시아 권에선 왕중왕이라는 작위가 쓰였다.
일반적인 왕에 대한 호칭은 샤로 불렀다.
이슬람이 발흥하고 나선 종교 지도자 칼리프와 정치,군사 지도자인 술탄으로 나뉜다. 초창기 이슬람 제국시절엔 칼리프가 정교 일치체제로 통치하였으나 후에 실권만 남은 껍데기로 변하면서 점차 술탄들이 정권을 주도하였다. 이후 술탄은 국왕이란 칭호와 동일하게 쓰였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권에선 말리크가 술탄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술탄 밑에 아미르들이 서구권의 대공(Prince) 와 비견되게 쓰였다. 투르크족들은 베이 혹은 베그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또 페르시아권에선 아미르와 비견되는 칭호를 미르자로 부르기도 했다.
또 총독의 의미로 와지르란 칭호가 쓰이기도 하였다. 오스만 제국에선 총독을 파샤란 칭호로 부르기도 하였다. 페르시아권에선 총독을 사트라프라 불렀으나 이것도 점점 관료직이 아닌 세습 작위의 하나처럼 쓰였다. 위치는 대공과 비슷하다.
강대한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왕중왕이란 칭호가 부활되면서 기존의 샤에 더해 샤안샤 칭호가 복구되거나 새로운 파디샤 칭호가 황제란 의미로 쓰였다. 페르시아,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이 칭호를 썼다. 파디샤를 아랍어로 바드사라 부르기도 한다.
6. 인도의 작위
지역을 다스리는 번왕을 라자로 불렀다. 또한 그러한 번왕의 우두머리(국왕)를 마하라자, 왕중왕을 마하라자디라자 로 불렀다.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정복하면서 술탄이나 파디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으며 전통적인 인도3교(불교,자이나교,힌두교)는 황제를 삼랏으로 불렀다. 가장 강력한 황제 중의 황제를 전륜성왕의 의미인 삼랏 차크라바틴이라 불렀다.
7. 서양과 동양의 작위 수여 차이점
서양의 경우는 한사람이 여러개의 작위를 겸하는 경우가 흔하다. 반대로 동양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1인 1작위를 수여한다.
8. 창작물에서의 작위
- 작위/창작물 문서 참조
9. 같이보기
[1] 한무제의 이름을 피휘.[2] 작위를 하사하는 대신 수도로 소환한 후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조치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조조가 마등을 이렇게 처리했다.[3] 원나라엔 수, 당, 요, 송과는 다르게 왕작이 단 하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자왕, 이자왕으로 격은 존재했다. 고려 왕족에게 내려진 심양왕이 후에 심왕으로 격상된 것이 그 예이다.[4] 대표적으로 장수왕의 아들 조다가 고추대가라는 명칭을 가졌는데, 이는 '태자'라는 공식 직위와는 또 별도로 붙는 타이틀로서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비슷하게 볼 수 있다.[5] 영일 냉수리비 기록.[6] 누런 집. 오직 천자만이 자신의 거주지를 누렇게 빛나게 할 수 있다.[7] 그래서 태조, 광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태자 - 정윤(太子 - 正胤)이라는 정윤이 추가된 칭호로 불렀다. 정윤은 진실된(정) 자식(윤)이라는 뜻.[8] 외명부와 반대로 내명부가 있다. 내명부는 궁궐 내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직위 품계이다.[9] 왕후, 왕태후, 대왕태후는 작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