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로캐슬
1. 소개
'''아스날의 만능 미드필더'''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로키''''
데이비드 로캐슬은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다. 그는 유스 시절 아스날에 입단한 후 1984년부터 1992년까지 8년 동안 아스날에서 활약했다. 그는 미드필더 포지션 모두를 소화 가능했고 탁월한 개인기와 움직임을 과시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 부상을 연이어 당하면서 아스날을 쓸쓸히 떠나야 했고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병마에 시달리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2. 선수 경력
2.1. 아스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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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캐슬은 1967년 5월 2일 런던의 루이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카리브해 지역에서 살다가 195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72년 로캐슬이 5살일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재혼했다. 이후 1982년 5월 로캐슬은 아스날 유스팀에 입단했고 1984년 12월에 프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선수 초창기 시력 문제에 시달렸고 콘텍트 렌즈를 항상 차고 다녀야 했다. 팀 동료 마틴 키언은 훗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1984년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고 1984-85 시즌에 리그 26경기를 출장했다. 그는 1985-86 시즌에 아스날에 부임한 조지 그레이엄 감독에 의해 팀의 주전 선수가 되었다. 1987년, 그의 20번째 생일 전날, 그는 리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격파하는데 일조하고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로캐슬은 1987-88 시즌에 40경기를 출장하여 6골을 기록하며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아스날은 그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2위를 기록했다.그들(아스날 코치들)은 로캐슬이 그의 머리를 숙인 채 드리블하는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하프라인에 세워두고 "너 골대가 보이니?"라고 물었고 그는 골대를 보지 못했다. 그의 시야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들은 콘택트 렌즈를 그에게 줬고 그것은 그의 커리어에 큰 도움을 줬다.
1988-89 시즌, 로캐슬은 리그 38경기를 모두 출전했고 리그 최종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하고 아스날의 18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아스날은 그 다음 시즌엔 4위를 기록했는데 로캐슬은 그 때에도 여전히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1990-91 시즌, 로캐슬은 무릎 부상에 시달려 겨우 18경기만 출장했다. 하지만 그는 아스날이 리그에서 단 1패만 거두고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이후 1991-92 시즌, 로캐슬은 무릎 부상에서 회복되어 39경기를 출장했고 4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로캐슬이 자신의 전술에 맞지 않고 잔부상에 시달릴 기미가 보인다고 여기고 그를 이적시키기로 결심했다. 로캐슬은 아스날을 떠나고 싶지 않아했고 그레이엄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내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냉정하게도 그에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로키."라고 말하며 리즈로 이적시켰다.
2.2.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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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7월 23일, 로캐슬은 2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당시 리즈의 감독 하워드 윌킨슨은 로캐슬이 고든 스트라칸의 대체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스트라칸은 여전히 3시즌을 더 소화하며 리즈의 든든한 주장 역할을 해줬지만 로캐슬은 부상에 시달려 2시즌 동안 겨우 25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결국 로캐슬은 전력외로 분류되어 1993년 12월 맨시티로 2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2.3. 맨체스터 시티 시절
맨시티에 입단한 로캐슬은 21경기 동안 2골을 기록했지만 전성기에 비해 폼이 매우 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맨시티는 16위로 떨어졌다. 시즌이 끝난 뒤, 당시 맨시티의 브라이언 호튼 감독은 스윈던 타운으로부터 윙어 Nicky Summerbee를 영입했고 로캐슬을 첼시로 125만 파운드를 받으며 이적시켰다.
2.4.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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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캐슬은 1994-95 시즌 첼시에서 40경기 가까이 뛰었고 2골을 기록했다. 그 중 한 골은 유로피언 위너스컵에서 FK 빅토리아 지즈코프를 상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첼시는 그의 골을 앞세워 지즈코프를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지만 4강전에서 레알 사라고사에게 패했다. 로캐슬은 다음 시즌엔 부상에 시달렸고 겨우 1경기만 출장했다.. 이후 그는 1997년 여름에 노리치 시티로 임대되었고 몇 달 후에 다시 헐 시티로 임대되었다. 그러나 그 팀에서도 별다른 활약은 못했고 이후 첼시로 돌아온 후 1997-98 시즌이 끝날 때까지 리저브팀에서 활동해야 했다.
2.5. 사바 FA 시절
로캐슬은 첼시를 쓸쓸히 떠난 뒤 말레이시아의 팀인 사바 FA와 자유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고 1999년 12월 은퇴를 선언했다.
2.6. 국가대표 경력
로캐슬은 1988년 9월 14일 21세의 나이로 덴마크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그는 잉글랜드에서 14경기를 출장했다.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는 1992년 5월 17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로 아직 창창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부상에 시달려 더이상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3.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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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로캐슬이 비호지킨 림프종에 걸렸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비호지킨 림프종은 면역세포인 B세포, T세포 또는 자연살해세포에서 기원하는 림프구 증식 질환이며, 단일 질환이 아닌 이질성 질환의 집합체이다. 이 병은 림프절을 침범하고 림프절 외에도 간, 폐, 골수, 피부, 위장, 뇌척수액 등 온 몸에 침범할 수 있으며 종양이 어디로 진행될 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 병에 걸린 로캐슬은 병원에서 암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 회복되지 못했고 2001년 3월 31일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로캐슬이 사망한 지 6주 후, 그의 아들 라이언은 FA컵 결승전에서 아스날과 리버풀의 경기에 참석하여 아스날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이날 아스날은 마이클 오언의 2골로 리버풀에게 2:1로 패했다. 그후 로캐슬이 사망한 지 5년이 지난 2006년 4월 1일, 아스날은 4월 1일을 "데이비드 로캐슬 데이"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로캐슬은 아스날의 새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 새겨질 32명의 레전드 중 하나가 되었다.
4. 수상
- 리그 우승 : 1989년, 1991년
- 리그컵 우승 : 1987년
- 커뮤니티 실드 우승 :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