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스트라칸
1. 개요
스코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는 선수 시절 에버딘에서 퍼거슨과 함께 대성공을 거두었고 맨유로 이적한 뒤 다시 퍼거슨을 만나 맨유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감독 경력을 시작한 그는 새로운 포메이션과 전술이 범람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측면 공격을 중시하는 4-4-2 전술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가끔은 중원에 선수를 늘려서 4-5-1 전술로 변화를 주기도 한다.) 선수 시절의 그는 레전드임에 분명하지만 감독 경력만 따진다면 명장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실패한 감독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말 그대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2.1. 던디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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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칸은 1957년 2월 9일 에든버러에 거주하는 아일랜드계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계를 만드는 직종에서 일했고 그의 어머니는 위스키 증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15세가 될 무렵, 스트라칸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하던 도중에 호주머니 속에 있던 펜이 그가 넘어지는 과정에서 튀어나와 그의 오른쪽 눈을 찔렀다. 이 사고로 스트라칸의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가 되어버렸다. 스트라칸은 어렸을 때부터 하이버니안 축구 클럽의 팬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축구 인생을 시작할 무렵 하이버니안 측은 그에게 유스 계약을 권유했다. 그러나 스트라칸의 아버지는 구단이 충분한 급료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스트라칸은 1971년 던비에 소속되어 3년간 유스 클럽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사실 맨유 스카우터가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보며 먼저 계약을 제의했지만 스트라칸은 던비에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이를 거절했다. 스트라칸은 유스팀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선보였고 2군 팀에서는 2번이나 올해의 스코틀랜드 리저브 선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후 스트라칸은 1974-75 시즌에 1군에 올라와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고 1975년 8월 아스날과의 친선 경기때 마침내 데뷔전을 치뤘다.
스트라칸은 1975-76 시즌에 로테이션급 선수가 되어 리그 36경기 중 17경기를 출전했다. 하지만 던디 유나이티드는 리그에서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언제나 셀틱 아니면 레인저스가 우승을 거머쥐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1976-77 시즌, 스트라칸은 팀의 주장이 되었다. 이로서 그는 던디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어린 주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정작 스트라칸은 주장으로서는 별로 재능이 없었는지 팀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팀 동료인 지미 존스톤과 술파티를 벌이다가 적발되어 주장직을 박탈당했다.
또한 던디 보드진은 스트라칸이 플레이메이커로서 활동하지 않고 혼자서 너무 탐욕을 부려 슛을 마구 쏴대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결국 보드진은 그를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스트라칸은 1977년 10월 26일 리그 컵에서 팔머스톤 파크에게 6:0으로 대패당한 뒤 11월에 곧바로 에버딘으로 쫓겨나듯 이적했다.
2.2. 에버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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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스트라칸.
스트라칸은 1977-78 시즌 중반 에버딘으로 이적한 뒤 부진과 부상의 연속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에버딘은 1978 스코틀랜드컵 결승전에서 레인저스와 맞붙었는데, 이때 스트라칸은 명단에도 없었다. 그렇게 스트라칸은 실패한 유망주로 전락하는 듯 했다. 그러던 1978년 여름, 알렉스 퍼거슨이 에버딘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퍼거슨은 모두가 한물 간 선수라고 여기던 그를 보자마자 그에게 대단한 선수가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퍼거슨은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그를 주전으로 기용하며 많은 기회를 줬다. 그 결과, 스트라칸은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1978-79 시즌에 리그 31경기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1979-80 시즌, 스트라칸은 최고의 폼을 보여주며 에버딘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 우승은 셀틱, 레인저스 이외의 구단이 27년만에 거둔 성과였다. 게다가 에버딘은 이 시즌에 2위 셀틱과 10점에 달하는 승점차를 기록하며 자신들이 명실삼부한 챔피언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트라칸은 1979-80 시즌 이후 매 시즌 30경기 이상 출장하며 중요한 순간에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호성적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매 시즌 최소 6골에서 최대 13골에 달하는 골을 리그에서 기록했고 유럽 대회에서도 대단히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에버딘은 그의 활약을 앞세워 1983-84 시즌에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82년에서 1984년까지 3년 연속 스코틀랜드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한 1983년엔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하고 유로피언 위너스컵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렇듯 엄청난 활약을 선보인 스트라칸은 맨유의 주목을 받고 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올드 트래포드에 입성했다.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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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칸은 1984-85 시즌에 리그 41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기록했고 FA컵 7경기 2골, 유럽대회 6경기 2골을 기록하는 등 총 56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맨유는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리그에서 4위를 기록했고, 1985년에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로 스트라칸이 10골 이상 골을 기록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잔부상에 종종 걸려 풀타임 출장을 힘들어했고 득점력도 5골 내지 8골을 기록하는 선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1986년 11월 스트라칸의 은사인 퍼거슨이 맨유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트라칸은 이 소식을 듣자 흐느껴울며 그의 팀 동료에게 "나는 그가 남쪽으로 멀리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트라칸은 퍼거슨이 온 뒤에도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이후 3년간 퍼거슨의 지지를 받으며 평균 30여 경기를 출장했지만 이전에 비해 별로 좋은 기량을 보이지 못했다. 1988-89 시즌 성적이 11위로 추락하자, 퍼거슨은 마침내 그에게 기대를 접고 다른 팀으로 팔기로 결정했다.
2.4.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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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셰퍼드 웬즈데이의 감독이자 퍼거슨 이전 맨유 감독이었던 론 엣킨슨은 2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스트라칸을 영입하는 데 합의했다. 그는 쉐퍼드 웬즈데이의 선수들보다 훨씬 많은 급료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맨유는 이를 받아들였고 스트라칸은 셰퍼드로 이적하는 듯했다. 그러나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 하워드 윌킨슨이 갑자기 끼여들었고 스트라칸은 쉐퍼드보다 훨씬 유명한 클럽인 리즈로 이적하기로 결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맨유 팬들은 최대 라이벌 중 하나인 리즈로 선수를 보내는 데 동의한 보드진을 비난하는 한편 셰퍼드가 아닌 리즈를 선택한 스트라칸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다.
아무튼 리즈로 이적한 그는 곧 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가 되었고 팬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그는 리즈에 입단하자마자 주장이 되었고 1989-90 시즌에 리그 46경기를 모두 뛰어 16골을 기록하며 팀을 2부리그에서 승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리즈는 1부리그 잔류를 위해 게리 맥칼리스터, 데이비드 배틀리, 그리고 게리 스피드를 영입하여 미들진을 대폭 보강했다. 그는 이들과 함께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며 1990-91 시즌에 리그 4위를 기록했고 리그 컵에서는 4강까지 올랐다. 스트라칸은 이 공적으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내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1-92 시즌, 스트라칸은 리그 36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했고 팀의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잘 통솔하여 1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리즈 보드진은 그의 활약에 크게 만족하고 그와 2년 제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리즈는 1991-92 시즌의 우승 이후 이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이듬해에 17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스트라칸은 팀 내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고 리즈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1993-94 시즌엔 37경기에 출장했고 리즈는 5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그후 1994-95 시즌엔 겨우 6경기밖에 나오지 못했고 1995년 3월에 팀을 떠났다. 그래도 리즈 팬들은 그동안 주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2.5. 코벤트리 시티 시절
1995년 3월, 스트라칸은 론 엣킨슨 감독의 부름을 받고 코벤트리 시티에 입단했다. 그는 그곳에서 선수 겸 코치로서 활동했다. 또한 코벤트리 보드진은 1997년 여름에 엣킨슨이 물러난 후 스트라칸을 신임 감독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트라칸은 엣킨슨에게 코칭 교육을 듣는 한편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3년간 몇몇 경기에 출장한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후배들 양성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가 1996년 11월, 엣킨슨은 예정보다 빠르게 감독을 그만두고 코벤트리 시티의 축구 디렉터가 되었고 스트라칸은 곧바로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코벤트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6.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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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칸은 1980년 5월 16일 북아일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쉽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하지만 팀은 이 날 북아일랜드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스트라칸은 국가대표로 꾸준히 발탁되어 스코틀랜드를 1982년 월드컵에 진출시키는데 기여했다. 특히 스웨덴 원정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 승리는 스코틀랜드가 월드컵에 진출하는 걸 확정짓는 것이었다.
1982년 월드컵에서, 스트라칸은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뉴질랜드와의 조별 예선 1차전에서 대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고 MOM(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2차전에선 브라질에게 4:1로 완패했고 3차전에선 소련과 2:2로 비기면서 16강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1986년 월드컵에도 순조롭게 진출했다. 그러나 1985년 9월 10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둔 직후, 잭 스테인 감독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수석코치였던 알렉스 퍼거슨이 대리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이끌었다. 스코틀랜드는 조별 예선 1차전에서 멕시코에게 1:0으로 패배했다. 그후 스트라칸은 서독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지만 스코틀랜드는 2:1로 패배했다. 이후 그는 햄스트링이 올라오는 바람에 3번재 경기는 출전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는 우루과이와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스트라칸은 1990년 월드컵에는 최종 명단에 뽑히지 못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다시 국가대표에 발탁되었고 유로 1992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는 엉덩이뼈에 진통을 느껴서 결국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3. 감독 경력
3.1. 코벤트리 시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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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엣킨슨이 1996년 11월 코벤트리 시티의 축구 디렉터에 선임된 후, 스트라칸은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스트라칸은 팀의 성적을 끌어올렸고 12월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이 시작된 이래 12경기에서 단 한 경기만 이겼고 팀은 강등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가까스로 팀을 수습하여 리버풀, 첼시, 그리고 토트넘을 막판에 승리하고 승점 1점 차이로 강등을 모면했다. 한편 그는 첼시와의 경기에서 선수로 잠깐 출장했는데 이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출정한 선수로 기록되었다.(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1]
스트라칸은 1997년 여름 스웨덴의 골키퍼 마그누스 하만과 수비수 로날드 닐슨, 네덜란드의 미드필더 조지 보아텡, 루마니아의 스트라키커 비오렐 몰도반을 영입했다. 코벤트리는 영입 선수들의 활약을 앞세워 1997-98 시즌에 11위에 안착했고 fa컵에선 4강에 진출했다. 이후 수석코치 알렉스 밀러가 팀을 떠나자, 스트라칸은 게리 펜더리를 수석코치로 임명했다. 이후 게리 펜더리는 오랜 세월 동안 스트라칸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 수석코치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코벤트리 시티는 1998-99 시즌에 15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엔 14위에 안착했다. 이후 스트라칸은 아일랜드의 스트라이커 로비 킨을 60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모로코 출신의 미드필더 무스타파 하지를 50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코벤트리의 라이벌 아스톤빌라와 선수 트레이드를 통해 유세프 치푸를 영입했다. 그러나 이렇게 (당시 기준으로) 많은 돈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코벤트리는 2000-01 시즌에 강등당하고 말았다. 그가 영입한 선수들이 죄다 부진한 것이 뼈아팠고 그의 전술 또한 옛날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탓이 컸다. 당연히 팬들은 팀을 강등시킨 그를 경질해야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보드진은 그를 신임했고 스트라칸은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별 활약을 못했던 선수들을 정리하고 스트라이커 리 휴즈를 영입하며 승격을 도모했다. 그러나 2001-02 시즌이 개막한 후 그는 5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했고 결국 팬들은 코벤트리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결국 팬들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보드진은 스트라칸을 경질했다.
3.2. 사우스햄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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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칸은 코벤트리 시티에서 해임된 뒤 1주일도 안 되어 사우스햄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사우스햄튼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끔찍한 부진에 시달리며 꼴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가 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스트라칸은 팀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고 사우스햄튼은 강등권에서 벗어나 최종순위 11위를 기록했다. 2002-03 시즌엔 8위를 찍었고 FA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스날에게 1:0으로 패했다. 하지만 아스날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기 때문에, 사우스햄튼은 FA컵 준우승팀의 자격으로 유로파 대회에 진출했다. 그런데 2004년 2월, 스트라칸은 갑작스레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팀의 사정이 언론에 자꾸만 누설되는 것에 분노했고 원래 여름에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와 팀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3.3. 셀틱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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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월 동안 휴식을 취한 스트라칸은 2006년 1월 셀틱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5-06 시즌, 그는 최대 라이벌 레인저스를 꺾고 리그 우승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셀틱에서의 경력은 실망스러운 출발을 보였다. 셀틱은 챔피언스리그 1차 예선 원정 경기에서 슬로바키아의 챔피언 Artmedia Bratislava에게 5:0으로 대패했고 3일 후에는 마더웰과의 리그 첫번째 경기에서 4:4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후 셀틱은 홈에서 Artmedia Bratislava를 4:0으로 대파하며 복수했지만 골득실 차로 탈락하고 말았다. 또한 셀틱은 2006년 1월 8일 스코틀랜드 컵 3라운드에서 3부리그 팀인 클라이드에게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2006년 2월부터 셀틱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셀틱은 덤버린 애슬래틱을 8:1로 격파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리그 역사상 가장 큰 격차로 이긴 것이었다. 이후 스트라칸은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그가 장담했던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스트라칸은 이 공적으로 스코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다음해, 스트라칸은 팀을 리빌딩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입에 착수했다. 하이버니안으로부터 스트라이커 데렉 리오르단을 영입했고 첼시로부터 이리 야로식과 캐니 밀너를 영입했으며 울버햄튼으로부터 리 네이어를, PSV 아인트호벤으로부터 얀 페네호르 오프 헤셀링크를,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토마스 그라베센을, 하츠로부터 폴 해틀리와 스티븐 프레슬리를 영입했다. 셀틱은 이 대대적인 영입에 힘입어 리그의 절대자로 군림했고 2007년 1월에는 승점 17점차를 기록하며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플레이오프를 모두 무사히 치르고 조별예선에 진출했는데.... 하필이면, 벤피카, 코펜하겐, 그리고 맨유와 같은 조에 속하고 말았다.
그런데 셀틱은 이 가망없는 조에서 놀랍게도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홈에서 3경기를 승리하고 원정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고 맨유와 함께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이는 1993년 이래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높은 순위였다. 그러나 셀틱은 챔스 16강에서 AC 밀란과 만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그후 2007년 4월 22일, 셀틱은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우승은 팀 역사상 리그에서 41번째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때 셀틱은 2위인 레인저스와 승점 13점차라는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또한 지난 시즌 놓쳐버렸던 스코틀랜드 컵도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스트라켄은 이 공적으로 다시 한 번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7-08 시즌, 스트라칸은 다시 한 번 챔피언스리그 조별 예선에 진출하여 AC 밀란, 벤피카, 그리고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한 조가 되었다. 스트라칸은 이번에도 홈에서 3경기를 모조리 이기며 다시 한 번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4월에 에버딘에게 스코틀랜드컵 4강전에서 1:0으로 패하고 리그에서 한 명이 퇴장당해 숫자가 하나 부족했던 마더웰에게 1:0으로 패배하자, 팬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스트라칸은 레인저스를 홈 원정 모두 격파하며 팬들의 비난을 잠재웠고 2008년 5월 22일에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로서 스트라칸은 셀틱 감독을 맡은 이래 3년 동안 리그 3연패라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2008-09 시즌엔 레인저스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했고, 2009년 5월 25일에 팀을 떠났다.
3.4. 미들즈브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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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6일, 스트라칸은 챔피언쉽의 클럽인 미들즈브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첫번째 경기에서 플리머스 아가일에게 1:0으로 패배했다. (당시 아담 존슨이 패널티킥을 실패한 게 컸다.) 12월 5일, 미들즈브러는 QPR을 상대로 원정에서 5:1 대승을 거뒀는데, 이것이 스트라칸이 미들즈브러에 부임한 이래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미들즈브러는 홈에서 블랙풀에게 3:0으로 패하고 카디프시티에게 1:0으로 패하는 등 심각한 부진에 빠졌다. 다행히 스컨더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홈에서 3:0으로 이기면서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2010-11 시즌, 스트라칸은 실망스러웠던 지난 시즌에 비해 훨씬 안정된 경기력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들즈브러는 오히려 이 시즌에 더욱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고 10월 무렵엔 20위로 추락했다. 결국 스트라칸은 10월 18일에 상호동의하에 계약을 해지하고 팀을 떠났다. 이때 그는 미들즈브러의 부진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상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3.5. 스코틀랜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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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5일, 스트라칸은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번째 경기인 에스토니아와의 평가전에서 1: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2014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웨일스와 세르비아에게 패하고 말았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뒤늦게 크로아티아와 마케도니아를 격파했긴 했지만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는 유로 2016까지 그를 신임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UEFA는 유로 2016 본선에 진출하는 팀의 수를 16개 팀에서 24개팀으로 늘렸다. 스코틀랜드로서는 이 좋은 기회를 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지역예선에는 독일, 폴란드, 그리고 아일랜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예선 1차전에서 독일에게 패했고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조기 탈락을 예상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는 놀랍게도 조지아, 아일랜드, 그리고 지브롤터를 홈에서 격파했고 원정에서 폴란드와 아일랜드와 비기면서 진출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조지아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패배한 것도 문제지만 경기력이 너무 떨어졌다는 것이 제일 뼈아팠다. 식자들은 스코틀랜드의 축구가 너무 재미없다고 비난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홈에서 독일에게 패했고 3위 아일랜드와 승점 4점차로 뒤쳐쳤다. 어떻게든 3위 안엔 들어와야 하는데 남은 경기는 불과 2경기... 스코틀랜드로서는 반드시 폴란드를 격파하든지 아일랜드가 독일에게 패하기를 바래야 했다.
일단 폴란드와의 경기에선 경기 막판까진 2:1로 리드하면서 가능성이 열리는 듯 했다. 그런데 아일랜드가 뜻밖에도 독일을 1:0으로 제압했고, 이제 남은 길은 폴란드를 무조건 이기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오오 통제라... 경기가 끝나갈 무렵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동점골을 넣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2:2 무승부를 기록했고 아일랜드가 독일을 이겨버리는 바람에 유로 진출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스트라칸은 경기가 끝난 뒤 운이 안 좋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후 스트라칸은 감독직을 물러나는 듯 했지만 스코틀랜드 FA는 감독 계약을 연장했다.
이후 2018 러시아 월드컵 진출을 목표로 준비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유럽예선 조 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해 예선에서 탈락했고, 결국 경질되었다.
4. 평가
스트라칸은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하고 가끔 4-5-1 포메이션을 활용한다. 그는 측면 공격을 중시하는 옛날 영국식 스타일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다. 또한 경기가 끝난 뒤 클럽의 경기를 답은 비디오를 구해 2번, 때로는 3번 연속 돌려보기도 한다. 그는 선수들의 체력과 피지컬을 매우 중시하고 술을 절대로 마시지 못하게 하며 롱볼 패스를 아군에게 정확히 보내서 경기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선수들을 가르쳤다. 또한 체중도 매우 중요시하여 매 시즌 체중검사를 실시하고 불합격 처분 받은 선수는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절대로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고 강제로 살을 빼게 했다.
이러한 그의 지도 스타일은 확실히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셀틱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클럽이니 우승할 확률이 애당초 높기는 하지만, 레인저스가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어려운 조에 걸리는데도 2년 연속 16강에 진출했으니 그의 지도력이 훌륭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의 전술은 스코틀랜드 밖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스코틀랜드 밖에서 맡은 코벤트리, 사우스햄튼, 미들즈브러에서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기대치에 크게 미달한 결과를 초래하는 바람에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사실 그의 전술은 과거 퍼거슨이 구사한 4-4-2 전술과 유사하다. 하지만 퍼거슨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전술을 변화시켰지만, 그는 아직도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했다. 그러다보니 스코틀랜드 안에서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지만 밖에서는 그의 전술에 대한 파훼법이 퍼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큰 실적을 거둘 수 없었다. 이것이 퍼거슨의 제자로 손꼽히는 그가 메이저 대회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
5. 수상
5.1. 선수
1. 에버딘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 1979-80, 1983-84
스코틀랜드 컵 우승 : 1982, 1983, 1984
유로피언 위너스 컵 우승 : 1983
유로피언 슈퍼컵 우승 : 1983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 1977-78, 1980-81, 1981-82
스코틀랜드 컵 준우승 : 1978-79, 1979-80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A컵 우승 : 1985년
1부 리그 준우승 : 1987-88
3. 리즈 유나이티드
2부리그 우승 : 1989-90
1부리그 우승 : 1991-92
커뮤니티 실드 우승 : 1992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 수훈 : 1993 관보링크
5.2. 감독
1. 사우스햄튼
FA컵 준우승 : 2003년
2. 셀틱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 2005-06, 2006-07, 2007-08
스코틀랜드컵 우승 : 2007
스코틀랜드 리그컵 우승 : 2006,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