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팅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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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3년 6월 27일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바이에른의 데팅겐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은 전투. 영국과 하노버의 국왕 조지 2세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사로잡힐 뻔했지만 프랑스군의 실책에 힘입어 가까스로 승리했다.

2. 배경


1742년 7월 10일, 스테어 백작 존 달림플이 지휘하는 영국군 16,000명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의 오스텐더 항구에 상륙했다. 이들의 표면적인 목적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로부터 하노버를 지키는 것이 핵심 목적이었다. 이후 영국군은 하노버, 헤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군과 연합해 "Pragmatic Army", 즉 "국본군"을 결성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1743년 초, 국본군 수뇌부는 프랑스군에 대항해 어떻게 군대를 운용할 지를 놓고 대립했다.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인 아렌베르크 공작 레오폴트 필립은 바이에른을 향해 진군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지 2세는 하노버 사수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에 국본군이 바이에른으로 침투하는 틈을 타 프로이센군이 하노버를 기습공격할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하고 마인 가을 따라 진군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결국 국본군은 조지 2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1743년 5월 플랑다르에서 출진해 아샤펜부르크 근처에 진을 쳤다. 노아유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마인 강 서안의 남쪽 둑을 점령해 국본군을 견제했다.
1743년 6월 8일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군대와 합류한 조지 2세는 며칠 동안 마인츠에 있는 교회 예배와 행사들에 참석했다. 그러나 노아유 공작이 라인 강과 마인 강을 따라 이어지던 국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국본군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일주일 동안 빵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국본군 내에서 기아의 기미가 감돌자, 조지 2세는 6월 16일에 하나우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후퇴한 후 플랑다르를 향해 북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6월 27일, 데팅겐 마을로 접근하던 국본군은 전방에 프랑스군이 강력한 방어진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군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군


  • 총사령관: 조지 2세
  • 부사령관: 스테어 백작 존 달림플, 아렌베르크 공작 레오폴트 필립
  • 병력: 50,000명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노아유 공작 아드리앙 모리스
  • 부사령관: 그라몽 공작 루이 드 그라몽
  • 병력: 70,000명

4.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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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팅겐은 마인 강 북쪽 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쪽으로 70마일, 아샤펜부르크에서 서쪽으로 3마일 떨어져 있었다. 노아유 공작은 그라몽 공작에게 23,000명의 병력를 맡겨 마인 강과 슈페사르트 산맥 사이에 위치한 평원을 틀어막아서 국본군의 진군을 저지하게 했고, 자신은12,000명을 이끌고 마인강 남쪽 둑을 따라 진군하다가 아샤펜부르크 방면에서 도하하여 국본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프랑스 포병대는 마인강 건너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국본군을 향해 포화를 퍼붓는 임무를 맡았다.
국본군 지휘부는 데팅겐에서 군대를 결성해 적과 대치하던 중 강 건너편의 프랑스군이 아샤펜부르크 방면으로 진군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의 의도를 대강 파악했다. 그들은 황급히 아샤펜부르크 방면에 영국군 분견대와 하노버리안 보병 근위대를 파견해 적의 도하를 최대한 저지하게 하고, 본대는 데팅겐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정면 돌파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국본군은 6시간 동안 강 건너편의 프랑스 포병대에게 집중 포화를 얻어맞으면서 데팅겐의 적군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간 굶주려서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었고, 데팅겐 평원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방어 상태가 견고했기 때문에 이를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약 데팅겐의 프랑스군이 제자리에서 버티기만 했다면, 국본군은 결코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고 조지 2세는 후방으로 침투한 노아유 공작과 전방의 그라몽 공작에 의해 협공당해 포로 신세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라몽 공작은 적이 접근해오자 노아유 공작의 지시를 잊고 메종 드 루아 기병대에게 국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메종 드 루아는 즉각 출격해 국본군 선봉대를 무찌르고 영국군 기병대와 보병 대열을 돌파하여 여러 개의 군기를 포획했다. 이에 전의가 상승한 프랑스 보병대는 방어선에서 이탈해 적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데팅겐의 프랑스군이 제 위치에서 벗어나 적을 향해 진군하는 바람에 영국군의 역습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고, 강 건너편의 프랑스 포병대는 아군에게 오인사격할 것을 우려해 더이상 대포를 쏘지 못했다.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국본군 소속 오스트리아 3개 부대가 프랑스군의 양 측면으로 침투해 포위를 시도했다.
적의 대대적인 역습에 직면한 프랑스군은 결국 전열이 붕괴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마인강을 건너려고 다리로 몰려들다가 다리가 붕괴되는 바람에 익사했다. 국본군은 적이 지리멸렬해진 틈을 타 하나우로 진군하는 통로를 확보하고 서둘러 데팅겐 마을을 돌파했다. 이후 양군 수뇌부는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전투 중에 부상당한 채 사로잡힌 병사들을 전쟁포로로 대우하지 말고 각자가 알아서 잘 대우하기로 합의했다. 국본군은 많은 부상병들을 전장에 남겨둔 채 하나우로 서둘러 진군했고, 프랑스군은 약속대로 남겨진 국본군 부상병들을 잘 대우해줬다. 이리하여 데팅겐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데팅겐 전투에서 15명의 장교, 250명의 군인, 그리고 327마리의 말을 잃었다. 또한 장교 38명, 병사 520명, 말 155마리가 부상당했다. 하노버군은 177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당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315명이 사망하고 663명이 부상당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 ~ 4,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국본군은 데팅겐을 가까스로 돌파한 후 하나우를 거쳐 플랑다르로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조지 2세를 사로잡을 호기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본국으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