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이름'''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
(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
'''출생'''
1717년 5월 13일
[image] 오스트리아 대공국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780년 11월 29일 (63세)
[image] 오스트리아 대공국 호프부르크 궁전
'''재위'''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여대공,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의 여왕
1740년 10월 20일 ~ 1780년 11월 29일
보헤미아 왕국의 여왕
1차
1740년 10월 20일 ~ 1741년 12월 19일
2차
1743년 5월 12일 ~ 1780년 11월 29일
'''배우자'''
프란츠 1세 (1736년 결혼 / 1765년 사망)
'''자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안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아버지'''
카를 6세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자매'''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
'''서명'''
[image]
1. 개요
2. 결혼 이전
3. 결혼
4.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보헤미아의 여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5. 평가
6. 사생활
6.1. 성격
6.2. 가정
6.3. 자녀들


1. 개요


'''"역사 속에서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게 된 군주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나의 백성들은 내 첫 아이들입니다."'''[1]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2] 카를 6세의 장녀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다.[3]

2. 결혼 이전


[image]
10~11세 때 그려진 초상화.[4]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5][6]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럽 최고 왕가의 빼어난 미모를 가진 황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
카를 6세는 일찍이 즉위 초에 딸도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국사조칙[7]을 내렸고 주변 국가들도 이를 승인했다. 이후 태어난 외아들이자 장남이 일찍 죽은 데다 딸만 내리 셋을 낳는 바람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인이 된다.

3. 결혼


  • 처음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상대자로 거론된 사람 중 한 명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였다. 다만, 카를로스 3세의 경우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겹사돈을 맺게 된다. 카를로스 3세의 5녀인 마리아 루이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 레오폴트 2세와 결혼하는데, 마리아 루이사의 셋째 남동생이자 카를로스 3세의 3남인 페르디난도와 레오폴트의 여동생 중 하나인 마리아 카롤리나 역시 부부가 된 것.
  • 당시 프로이센 왕세자였으며 나중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프리드리히 대왕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하면서 남편감으로 고려되었다. 실제로 카를 6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었던 후보가 이 프리드리히였다. 그러나 이 혼담은 무리가 많았다.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단적으로 청혼한 것이었기 때문. 실제로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왕위계승권과 종교도 다 버리고 몸만 가도 된다고 간청했으나, 왕세자를 졸지에 종교도 다른 외국에 갖다 바쳐버리는 꼴이라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노발대발하며 반대하고 오스트리아의 국보급 장군인 사부아 공자 외젠도 이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성사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일찍이 사촌인 영국 공주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오이겐의 추천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가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 가문 출신 여성과 결혼한다.
  •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1732년 빈에 유학온 프랑수아 에티엔[8]과 사랑에 빠졌는데, 자기 전에 꿈에서 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시녀들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당시 영국 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카를 6세도 로렌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혈연이 있는 데다[9] 양가의 인연과 인품이나 지성이 쓸 만하다고 여긴 프랑수아를 마음에 들어했고 로렌을 둘러싼 이해관계[10]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애가 맞물리면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100%는 아니지만) 연애결혼을 했다.[11] 단, 둘째 딸 마리아 안나와 프란츠의 동생 샤를 알렉산드르(로렌의 샤를)와 겹사돈 맺는 것은 반대했다. 이 둘은 카를 6세가 죽고 나서야 결혼한다.
로렌의 프랑수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인 로렌을 포기해야 했는데, 그의 어머니[12]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고향을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 로렌을 루이 15세의 장인인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바치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을 받는다는 조건의 서류를 보자 죄책감과 미련, 양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주저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여러 번 펜대를 던졌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때마다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던진 펜을 계속 주워다 주었고'''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다.

4.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보헤미아의 여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4.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카를 6세가 죽자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수장 지위와 상속령과 여러 나라의 작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인이긴 해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 했었고''' 그에 따라 계승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주에게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 한 것.[13] [14]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15]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10살이나 연상인 데다 어려서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기 어렵다 보고 아내를 설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할라 치면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나가리…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고 한다. 결과를 보면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똑똑하고 재능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후계자로서의 교육이 부족했으며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 크리로 견문이 짦았던 데다 나이가 젊어(23세) 생긴 일이다.[16]
[image]
1741년 3월 13일 넷째이자 첫 아들인 요제프가 태어났고, 6월 25일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넷째 이전에 낳은 세 아이가 모두 딸이라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적으로 돌아선 상태에 보헤미아는 배신을 때려 카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마저 동요하며 이탈할 움직임이라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기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로 달려가 의회 연설에서 장자 요제프를 선보이며 군자금과 병력을 얻어냈다.[17]
그러나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에는 빈 코 앞까지 당도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해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 적을 하나 줄이고, 한 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간 사이,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하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적국 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을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영국과 손 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4.2. 동맹의 역전


해당 문서 참조

4.3. 7년 전쟁


즉위초와 달리 통치 경험이 원숙해진 데다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공고해졌기에 왕위 계승 전쟁 때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주도하게 되는데, 십여 년간 내정 개혁과 군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18]를 등용해 프랑스에게 접근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의 실세인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동맹을 유도했고, 개인적으로 프로이센 까에 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하는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협력해 프로이센 공격을 감행한다. 초반에는 그 동안 힘을 쌓은 보람도 없이 또 프로이센 군대에 털리면서 프라하까지 밀렸지만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이었고[19] 너무 깊숙이 쳐들어오다가 보급 수래 3000대가 습격당하면서 자국으로 철수 위기를 넘긴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길 만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 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독일 홀슈타인 지방 출신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20]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털려서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전 재정 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 수입인 2억 6천만 굴덴을 쏟아부었고,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 해인 1763년에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 3배(7000만 굴덴)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1]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4.4. 통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거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내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22] [23] 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서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델'''로 여겨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은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지만, 적국인 프로이센을 배우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100년 전 대선제후 시절에 했던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도입함으로서 근대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의 오스트리아의 지방 행정은 충성 서약을 받은 봉건 영주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각 왕국/공국에 중앙에서 임명한 총독을 내려보내고, 중앙 관청을 설립하여 각 지방에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를 국가 조직에서 배제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지방을 크라이스라고 불리는 행정 단위로 구분하여 중앙집권을 안정화시키고, 지주의 횡포로부터 농민을 보호했다.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분리하는 한편, 대법원을 설치하고 <테레지아 법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오스트리아 민법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조세 제도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으며, 오스트리아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일반징세대장이 도입되었다. 예수회로부터 대학에 관한 감독 권한을 빼앗아 고등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만드는 동시에, 빈 의대를 설립하였다. 초등 의무 교육 외에도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시범학교를 도입했다.
슐레지엔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상주의에 입각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독점 기업을 불허하였고, 길드 규약을 철폐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국의 섬유 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이주 정책을 통하여 슬로바키아와 지벤부뤼겐(트란실바니아)의 광공업을 크게 증진시켰다.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24]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에게 예의를 표하라고 지시해야 했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해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 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안습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국왕(1741~1780), 보헤미아 국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황제'로 취급된다.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25]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26]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라는 지위를 주었지만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인 것.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27]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적인 가톨릭 도덕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당대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계몽전제군주를 꿈꿨던 요제프 2세는 항상 대립했고,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이러한 면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그녀는 1780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죽기 전 그녀는 자녀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죽기 직전에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요제프 2세에게 "이리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여행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남긴 날 그녀는 사망하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대로 안장되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숨을 거둔 후 며칠 동안 어머니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요제프 2세는 정치적으로는 자주 어머니와 대립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다.

5. 평가


동시대에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처럼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 반면[28], 7년 전쟁은 질 수 없는 싸움[29]을 운빨로 날려먹었다.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 보고 보수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으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30] 직접 전쟁에 참가해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후계자(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들마저 잘 키워냈으니 능력 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카를 5세, 그의 동생이자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인 페르디난트 1세 시대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군주는 없었다.[31] 그녀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형식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1781년 1월 6일 추모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은 그녀와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그녀의 치세나 능력에 대해선 나쁘지 않게 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차례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후대 군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32] 또한, 여성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33],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써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흠이었다.
이렇듯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들에게 진정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 느슨한 동군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다. '통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8세기까지도 중세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던 오스트리아의 후진적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그녀의 대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살아 생전 이미 '국모'[34]로 불릴 정도였고, 그의 사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 정책 방향은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고수하며 오랜 안정을 유지했으며 후계자와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여담으로 이 사람이 국내에선 워낙 생소한 인물이다보니 프리드리히의 라이벌이었던 여왕이라고 설명하면 세계사 잘 아는 축에 속하고 보통 설명을 하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엄마라고 해야 아~하고 알아듣는 편이다.

6. 사생활



6.1. 성격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상당한 다혈질에 자존심도 셌다. 30대까지는 빼어난 미모와 달변을 자랑했고 밤새 춤추고 노는 것을 즐겼다.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서도 '''내가 임신중만 아니었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성격이었다. 허례허식을 혐오해 궁정의 경직된 예법을 혁파했으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위의 각종 도덕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이 때문.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5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래서 점점 살이 쪘고,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

6.2. 가정


남편복과 자식복이 많았다. 거의 20년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아이를 낳아서 다른 유럽 왕가들이 부러워했다고.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아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35]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처세를 잘 했고, 여러 대에 걸친 근친혼으로 구성원들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번성시키는 역할도 매우 잘 해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중했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유일한 동생[36]인 마리아 안나는 전술한 대로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로트링겐(로렌)의 카를과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트링겐 가문과 너무 단단히 맺어지는 것을 경계해서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의 여파로 일찍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시동생 카를 알렉산더는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전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벨기에 총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코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군 지휘를 맡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맨날 깨졌다.[37] 7년 전쟁 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 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또 호구잡히면서[38]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가 압력을 넣으면서 스스로 사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시동생에다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자신이나 남편의 체면상 자르지도 못 했고, 결국 전쟁에 지는 데 한 몫 했다. 하지만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반면[39] 카를은 무척 무능했다.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무려 16남매를 낳았으나 이 중 4명은 요절하고 12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의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랄 만한 생존률을 보여준 셈.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는 않아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고,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에는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쪽인 프란츠 슈테판 쪽이 자상한 아버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좀 거리가 있었고,[40]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아서 마리아 아말리아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위와 같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16세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때 남편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6.3. 자녀들


마리아 테레지아/가족관계 참조.


[1] 하지만 180년 후에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안 좋은 상황나라를 떠맡은 군주가 그녀의 자손들 중에서 나왔고 이때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말았다.[2] 그녀는 여러 왕국의 여왕이자 여군주였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신성 로마 제국만은 여제 즉위가 불가능해서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대신해서 황제로 세웠다. 다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그녀가 실질적 통치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여제의 위치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엄밀히 명목상 카이제린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여제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3] 연합뉴스 2020.02.11. : 오스트리아의 국모,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4] 그림 설명. 허리가 말도 안 되게 가는 건 코르셋 때문이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답게 턱이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와있다. 저 턱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시집간 마리 루이즈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5] 이 가문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으로도 알려진 하노버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 주로 영국이나 프로이센 왕가와 통혼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이종사촌이고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독일.폴란드 원정의 프로이센 지휘관)과 테레지아는 5촌이다.[6] 왜 신교도 가문과 카를이 결혼했는지 궁금하다면 브라운슈바이크의 2번 항목 참고.[7] 국사조칙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책봉하고 나서가 아니라 첫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공표한 것이다. 1713년에 공표했으므로 1717년 태어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혜를 받았을 뿐, 애초에 딸에게 상속할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으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성하고 나서도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 했다'''. 국사조칙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 6세 항목 참조할 것.[8] 프란츠는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어를 모어로 하고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결혼하고 나서야 독일식 이름인 프란츠 슈테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9] 프랑수아의 할머니는 카를 6세의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랑수아는 8촌. [10] 로렌 가문은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적당히 지체가 높고 로렌 공국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 영방에 속하면서도 프랑스 왕국 깊숙이 자리잡은 위치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킬 위험이 없었다. 거기에 로렌은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다.[11] 프란츠의 아버지 로렌 공작 레오폴드는 프란츠의 형이 살아있을 때부터 후계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장가 보내려는 시도를 했다. 사돈인 프랑스 왕실(레오폴드의 배우자는 루이 14세의 조카)에서 경악해서 경고할 정도.[12] 로렌 공작 레오폴트의 아내이자 프랑수아의 어머니였던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은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딸이자 루이 14세의 조카인지라 완전한 프랑스인이었고 프랑스 왕국에게 해가 되는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동생이던 샤를 알렉상드르는 적극 찬성했다. 그 이유는 본인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 마리아 안나와 연애 중이었기 때문.[13]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첫 자식이자 유일한 아들 레오폴드가 태어나기 3년 전(당연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취한 조치였다.[14] 그렇다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정치를 접해 본 경험이 완전히 없었다는 것은 것은 아니다. 카를 6세는 몇 번 정도 그녀를 궁정회의에 참석시키기도 했다. 물론 상술했듯 체계적인 제왕학 수업에 비하면 이러한 그녀의 경험과 배움은 초라한 수준이다.[15] 무려 200년 전 문서를 들고 나왔다. 오스트리아는 2~3년 전 카를 6세의 말년(1737~1738)에 치러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패배해 나폴리, 시칠리아를 잃었고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해 동남부 영토를 잃었다. 전쟁에서 패했고 거기서 2년밖에 안 지났으니 주변국들이 호구로 보고 뜯어먹을 구석을 찾은 것.[16] 적국의 프리드리히 2세도 5살 연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로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책을 저질렀다. (1741년의 첫 전투에서 줄행랑치는 병크를 저질렀는데도 군대가 무너지지 않고 부하들이 잘 마무리해주어서 이길 수 있었다.)[17] 이전까지 헝가리 의회와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크든 작든 반항적인 자세로 일관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과단성에 감복해 왕에게 3만명의 병력과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유의미한 사건이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이기도… 한 것은 좋으나 보내준다는 병력은 늦게 와서 별 도움은 안 되었고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력으로 막은 거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가 유일할 정도였고, 이 시기를 가리켜 헝가리 귀족들의 황금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고.[18] 시동생 카를의 수하로 벨기에를 잘 다스린 공적으로 재상으로 등용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179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재상을 역임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유이한 국가재상(슈타츠칸츨러, Staatskanzler)으로 다른 한 명은 카우니츠의 손녀사위이자 빈 회의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이다.[19] 러시아, 프랑스를 제외하고도 작센, 스웨덴도 동맹을 맺었다. 바이에른은 중립, 스페인은 부르봉 가문이 왕위에 등극한 지 2~ 3세대이던 시절이라 프랑스 2중대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승리해 그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등극한 아우구스트 3세 시절이었는데, 왕위에 오른 과정이 과정인 만큼 당연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측에 붙었고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안 했지만 통행로와 주둔지 제공 등으로 러시아군을 서포트. 당대 유럽 국가 대부분이 적이었다. 사방이 적이라는 것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도 서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으로 작센과 오스트리아, 북쪽 스웨덴, 동쪽 러시아로 완전히 둘러싸여있었다.[20] 어처구니 없게도 표트르 3세 정도는 아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며 후계자 요제프 2세까지도 적국의 원수인 프리드리히 2세 빠가 되면서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고.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숭배 분위기가 퍼져있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2세가 단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영국에서도 (프랑스 털어주니까)인기가 엄청나게 높았으며,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프리드리히 지지자가 많았다. 훗날의 나폴레옹도 프리드리히의 지지자였는데, 나폴레옹 이전에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숭배 수준이었다.[21] 프란츠 1세 항목에 전쟁 중 왕실은 돈을 꽤 벌었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왕실 예산은 3% 내외(사치가 심한 프랑스는 5%)였기 때문에 국가 예산과 비교가 안 된다. 당시 가장 큰 지출인 상비군 수십만 명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고, 현대에도 돈 잡아먹는 귀신인 화기, 군함, 대포 등은 당시 경제활동 상황을 고려해보면 국가에 큰 부담이었다. 적국 프로이센도 전쟁으로 국토가 잿더미에 빚이 쌓였으므로 당분간 서로 충돌할 일은 없었다만. 그렇지만 남편이 벌어놓은 재산 덕에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고 하니 왕실 재산 규모가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건 사실인 듯.[22] 이미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했으며, 농사 짓는다는 핑계로 신민들이 이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즉, 이 정책도 프로이센 따라히기 정책의 일환이었다.[23] 이 당시 교육개혁의 책임자였던 펠비거의 학제 발표를 보면 '양성 청소년 교육을 시행한다'라고 규정이 되어있다. 즉, 여성들또한 교육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여성들을 탄압했다는 평을 주로 듣는 가운데 의외인 부분.[24] 한때 퐁파두르에게 'cousin'이라고 쓴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는 추문이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한 번도 퐁파두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당대 예법으로는 신분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데 편지를 썼을 리가.[25] 물론 7년 전쟁에서 실패와 남편 프란츠의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국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영향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요제프는 아버지처럼 어머니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황제는 아니었다.[26] 물론 아들 많다고 후계자를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도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승계했고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은 현직 왕이라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훗날 손자대의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로는 2세) 시절 승계자 페르디난트 1세#s-2는 신체장애에 정신지체까지 앓던 폐인이었지만 다른 이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조차 꺼내지 못 했다.[27] 영토 문제에 있어서 아들의 팽창 정책인 1차 폴란드 분할(1772년)이 개시되기 전에도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1769년에 제국 내 위치한 폴란드 왕국령의 월경지를 침략하여 무단으로 합병하였는데, 이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투르크 령의 부코비나를 합병하는 것은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28] 비록 실질적으로 전쟁을 끝낸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유리한 입장을 차지했으나 정작 프로이센에게 주요 공업지역이던 슐레지엔을 상실함으로써 유의미한 경제적, 영토적 손실을 수반함으로써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29] 시동생 카를 알렉산더(로렌의 샤를)이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에서 박살나고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훗날 장조카 요제프 2세 때 삼촌이자 이모부를 다시 등용하려지만 결단코 사양한다.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 시절 사보이의 외젠을 명장이라고 은퇴도 못 하게 노인학대(?)한 전력이 있다.[30] 부부간 금슬이 나빴거나 손이 귀해 자식이 적었다면 임신으로 인한 리스크는 경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주제에서 대를 이을 후손의 생산은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므로 등한시할 수는 없다. 더욱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자 후손이 없어서 여자의 몸으로 왕관을 쓰게 되어 승계 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치른 입장이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부부간 금슬도 너무 좋았고 본인이 처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 자식욕이 남들보다는 높았을 것이라 보이고 애가 많은건 당연하지만... 신체적으로 부담을 주는 임신-출산 기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여자 통치자로서 아무래도 다산은 국정에 전념하기에 불리하다.[31] 굳이 따지자면 후손 프란츠 2세 정도지만 역시 좀 모자라다. 그리고 카를 5세는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개인적 고향과 성향은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잊지 않았던 겐트 출신의 네덜란드인, 군사적 기반은 스페인, 활동 중심지는 이탈리아와 독일 내륙 지방으로 순전히 오스트리아의 군주로 치기는 좀 그렇다. 카를 5세 휘하 네덜란드에서 나폴리, 헝가리에서 스페인까지 총괄하는 넒고 넒은 영지들 중에서 이 당시 오스트리아는 저지대 네덜란드, 카스티야, 밀라노 같은 핵심적인 영지와는 게임도 안되고,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만 봐도 보헤미아 왕국이 차라리 훨씬 더 역량 있는 중심지였다[32] 그 전비가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이었으며,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난 결정적인 이유도 마리아 테레지아 대에 소모된 막대한 전비 때문에 개혁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3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쇤부른 궁전을 건축하는 모습, 100여년 전 자국을 멸망위기에서 구해준 국가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멸망시키는 모습이 그 사례라고 볼 수 있다.[34] 동아시아에서 흔히 왕비를 국모라 부르는 것과 달리 업적에 대한 평가다.[35]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적응하기 더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족이어도 사생활이 있었는데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그런데 묘하게도 궁정문화 자체는 오스트리아 쪽이 더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6] 막내 여동생도 요절했다. 1남 3녀인 카를 6세의 자식들 중 딸 둘만 남았다.[37] 슐레지엔을 두고 벌인 1차전에서는 1742년 5월 코투지츠 전투에서 깨지면서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슐레지엔을 내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벌인 2차전에서는 1745년 6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동년 9월 조르 전투에서 깨지면서 2차전 역시 포기해야했다.[38] 1757년 5월 프라하 전투에서 깨지면서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가 패하지 않았으면 프라하가 넘어갈 뻔 했으며 동년 12월 로이텐 전투에서 또 깨지면서 기껏 점령한 브레슬라우를 넘겨줘야 했다.[39]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로이텐 전투는 현재 각국의 사관학교에서도 가르칠 정도로 프리드리히의 뛰어난 전술 역량을 보여준 전투인데 하필 거기서 지는 바람에...[40] 다만 권력을 내주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부분에 있어선 남편인 프란츠에게 순종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