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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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1740. 12. 16 ~ 1748. 10. 28
1. 개요
1740년대 중부 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유럽 열강 국가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쟁.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게 되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구도가 형성된다. 아울러 단일전쟁임에도, 세계로 식민지를 뻗아나가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한 지라 이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남아시아, 아메리카 등지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사실상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서 첫 번째 사례이자 .'''
프리드리히 2세가 전쟁을 일으킬 때 언급한 이유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의 황제출마시 지지 조건으로 슐레지엔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고, 전쟁이 사실상 본격화된 게 카를 알브레히트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영지를 수백 년 전 문서의 권리에 근거하여 자신이 받아야 한다"였으며, 보헤미아 왕위는 황제 선거에 투표권이 있는 선제후였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승계 문제도 걸려있던 전쟁이기에 제위 계승 전쟁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의 경우 명분상으로는 거리가 조금 있었으므로 '''왕위 계승 전쟁'''으로 불린다. 정확하게는 국사조칙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 세습령에 대한것이지 황제 선거와는 관련이 없다. 왕위라는 것은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에 대한 분쟁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계승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대대로 독점하긴 했지만 '''승계 방식은 어디까지나 선거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이고 전직 황제인 카를 6세고 간에 다른 가문에서 출마나 선출되는걸 막을 권한이 없었다. 애초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자라서 피선거권 자체도 없고...
2. 배경
1740년 10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의 왕 - 보헤미아의 왕 -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의 왕이던 카를 6세가 죽었다. 그의 아들은 오래 전에 사망했기에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카를의 영지를 모두 물려받게 되었다.
문제는,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내려온 살리카법이었다. 살리카 법에 의하면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옛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던 곳들에서 살리카 법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사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경험했던 카를 6세는 즉위 초 일찍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염려해서 살리카 법의 여성 왕위 승계 금지 조항을 무력화하는 국사조칙을 내놓았다.[1] 당시 이걸 내놓은 건 자신이 아들을 못얻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이 일찍 사망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로는 여성만 남게 되자 분란을 방지하고 가문의 영속성을 이어 나가기 위해 합스부르크 세습영지에 대해서는 살리카법과 상관없이 아들이 없으면 딸도 승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개요에서도 설명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에 대한 상속법의 개정이다.
그러나 카를 6세의 말년이 또 신통치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173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사실상 패하면서 나폴리, 밀라노, 시칠리아 등 스페인에게 빼앗겼고 외부 세력이 오스트리아를 얕보기 시작했다.[2][3] 그리고 같은 시기에 치뤄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참패하여 동부 지역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야 했다.[4]
두 차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모두 크게 패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내부 결속력이 약해지는 모습이 보이자 주변국들은 오스트리아를 뜯어먹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한 것이다. 주변국들은 이미 죽은 카를 6세와 합의한 국사조칙을 지킬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2.1. 프로이센측 배경, 그리고 슐레지엔
기존 통설은, 카를 6세의 사망과 오스트리아의 대내외적 혼란을 이용하여 바이에른 대공국의 카를 알브레히트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 그리고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라면 이를 가는 데다 독일에 영향력을 확대하길 희망했던 프랑스가 거의 동시에 국사조칙을 무시하고 영토 및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일으킨 것이라 본다. 그리고 바이에른과 프랑스의 경우 어느 정도 이걸로 설명이 된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기도 한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대왕에겐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세수 20%를 차지하는 꿀땅 슐레지엔의 경제적 이득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는 자신의 저서 <강철왕국 프로이센>을 통해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적 특징이었다. 프로이센 공국 항목에도 있지만, 프로이센 공국의 후계자가 단절되면서 호엔촐레른 가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했고, 나중에 프로이센 왕국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로 국호를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아니었던 프로이센으로 사용한 것이다. 즉 국호에서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벗어난 독립된 왕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실질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통합된 상태였지만 법률적으로 존속하고 있었고[5] ,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꾸준히 프로이센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애당초 프로이센이 공국에서 왕국으로 변하게 된 것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대가였던지라, 합스부르크는 이 일을 계속 후회하고 있었고, 시시건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정작 프로이센에게 떨어진 떡고물이 없었다는 것. 특히 서부 독일의 라인 강 동안에 위치한 베르크 공국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매우 희망하던 떡고물이었다. 17세기 초 공국 시절에 이미 해당 공국의 후손이 끊기자 인척관계를 통해 획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곳인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사조칙을 승인하는 대가로 베르크 공국의 프로이센 영유를 오스트리아가 지원'''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는데 국사조칙 승인과 달리 이 부분은 문서화가 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는 나중에 이를 모른 체 하며 베르크 공국의 영유권 분쟁에서 다른 나라를 지지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치를 떨고 이를 갈며 아들에게 오스트리아를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그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은, 웬수같은 아버지의 유언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를 매우 싫어했다. 모친인 조피 도르테아가 영국의 공주인지라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모친의 주선하에 영국 조지 2세의 공주 빌헬미나 소피아와의 결혼이 성사되기 직전 '''역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오스트리아의 강권으로 마음에도 없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Elisabeth Christine)와의 결혼을 해야 했다. 이 가문은 영국 하노버 왕가의 방계이기도 했지만,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보다 더 가까워서 장인은 오스트리아의 군 지휘관이었고, 장모의 여동생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였다.''' 이처럼 자신의 결혼조차 모친과 본인의 뜻을 꺾고 오스트리아 마음대로 진행되었으니, 오스트리아에 이를 가는 게 당연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프로이센에 있어 '''풍족한 땅 슐레지엔의 획득'''이라는 영토 확장 목적보다는 '''프로이센 왕국의 성장을 계속 방해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타도하고 독립된 국가 프로이센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더 컸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볼때, 슐레지엔이 공격대상이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당시 프로이센 왕국이 유일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바로 슐레지엔'''이었다. 슐레지엔이 꿀땅이라 노린게 아니라, 오스트리아랑 전쟁을 하려보니 붙어있는 땅이 슐레지엔이었던 것. 실제로도 슐레지엔 아니더라도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절부터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 실시하여 국내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즉, 프로이센 입장에선 요약하자면
- 사사건건 간섭해대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한데
- 이놈들이 국사조칙 승인조건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프로이센의 영토확장에 태클을 걸었고
- 프로이센은 이 시점에서 국사조칙 승인은 오스트리아가 먼저 파기했다고 판단
- 안그래도 열받는데 마침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패해 상태도 메롱하고
- 그 시점에서 국왕까지 죽고 여자가 왕위에 올라 나라는 혼란스럽고 그 틈을 타 바이에른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랑 싸우려드는 찰나에
- 2백년 전 이야기긴 하지만 프로이센에 영유권을 주장할 명분도 있고, 오스트리아 수비대가 고작 8천명에 불과한 슐레지엔을 기습
- 그리고 프랑스-바이에른에 전력투구하는 틈을 타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로부터 정치적 독립 달성하고 슐레지엔은 덤.
3. 발발
전쟁의 시작은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기의 부국강병책으로 프로이센은 중동부 유럽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사조칙을 별 조건 없이 승인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카를 6세보다 약간 이른 1740년 5월 31일에 죽고,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야심과 명예욕에 가득찬 젊은 프리드리히는 국사조칙 승인 조건으로 수백 년 전 문서를 들고오면서[6] 오스트리아 세수의 22%가량을 차지하는 꿀땅 슐레지엔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7] 당연히 이뭐병 같은 제안을 오스트리아에선 거부.
거의 동시에, 요제프 1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와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만이 아니라 1546년에 있었던 계약을 토대로 오스트리아 대공 및 합스부르크 나머지 영토의 왕의 자리도 요구하기로 결정, 자신이 승인한 국사조칙을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부르봉 왕가 역시 이에 동조하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8] 로 진공할 준비와 함께 바이에른에 원군을 파병했다.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며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세력을 밀어낼 기회를 노렸다.
심지어 스웨덴마저 프로이센에 동조하여, 오랜 숙적이자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하면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오스트리아에겐 러시아 외에 전통적인 동맹국 영국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했다는 소식에 '''프랑스가 참전했다고? 엿먹이러 가자!'''(...)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참전했다. 물론 단순히 이유가 이것뿐인 것은 아니고,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패권 경쟁과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무너질 경우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국이 위험해진다는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원래 동맹으로서의 의무도 있는 데다가, 앤드류 톰슨 교수의 조지2세 전기에 따르면, 영국의 여론도 '''"치사하게 힘없는 여자를 괴롭혀?"'''라는 식으로 프로이센에게 안 좋게 돌아갔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편에 대해 참전하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4. 전개
선전포고도 없이, 1941년 6월의 독일 마냥 기습 공격을 감행한 프로이센은 불과 개전 한 달여 만에 슐레지엔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프로이센이 상비군 체제여서 국왕의 의지에 따른 병력동원이 신속했고, 오스트리아는 애초에 전쟁 준비가 미처 안되어 있어서 병력 동원에 시간이 걸려 슐레지엔 방어를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또 슐레지엔은 개신교 지역이였기에, 가톨릭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별 미련이 없어서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군을 환영하며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실질적 전쟁은 1741년부터 시작되었고, 모두들 유럽의 전통적 강자인 오스트리아가 신흥국 프로이센을 쳐바를 거라고 생각했으나...'''예술을 사랑하는 연약한 문학소년''' 이미지로 알려져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첫 전투인 몰비츠 전투에서는 그 이미지대로 온갖 뻘짓과 삽질로 군대를 냅두고 퇴각하는 막장짓까지 벌였지만, 첫 전투의 실책들에서 제대로 된 교훈과 경험을 얻어 그 다음부터는 미칠 듯한 먼치킨 능력을 보여주며 오스트리아 군을 보이는 대로 족족 관광보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지휘한 첫 번째 전투였던 몰비츠 전투에서 뻘짓과 삽질을 거듭했다. 돌격 타이밍에 대열을 재편 시킨다든지, 거리를 잘못 잡아서 부대 일부를 강 뒤에 배치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든지. 거리를 잘못 잡았다는 건 휘하의 슈베린 장군이 지적했지만 무시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프로이센의 우익 기병대를 붕괴시키고 보병대를 그대로 공격했고, 프로이센 보병대가 철저히 훈련받은 대로 일제 사격을 가하는데 아군을 향해 쏴서 사상사자 급격히 증가하는 등 전체적으로 악재가 쌓이고 있었다. 슈베린은 다시 프리드리히에게 퇴각을 조언했고, 프리드리히는 이걸 받아들여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양익 사령관이 전사했다. 이 상황을 보고한 장교가 어느 방향으로 퇴각하냐고 묻자 슈베린은 '적의 본대를 넘어간다.'라는 대답과 함께 공세를 명령했고, 프로이센군은 보병대의 훈련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앞서고 있었기에 초반의 실수를 극복해 승리를 차지할수 있었다. 이 승리는 사실상 슈베린과 정예화된 보병대 덕분이였고, 프리드리히는 군을 두고 전장을 떠나기까지 했었다. 후일 프리드리히는 다시는 군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를 충실히 지켰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 '몰비츠는 나의 학교'라는 말도 남겼다. 이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세적인 전략을 선호하게 되었고,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프랑스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지원을 약속하며 대규모 파병을 개시하여 보헤미아 지방(지금의 체코)을 침공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멋대로 카를 7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까지 합스부르크가에 등돌리기까지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큰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프리드리히 2세와 비밀조약을 맺고 슐레지엔을 일시 포기한 다음, 보헤미아 방어에 주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헝가리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 반격의 토대를 마련했다.
비밀조약에 의거, 프로이센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고 1742년 1월에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으나[9][10] 오스트리아가 역으로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을 점령하자, 보헤미아의 동맹군도 패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1742년, 프랑스군이 도나우 강 일대에 공세를 강화하고, 프로이센이 다시 비밀조약을 깨고 공세로 나서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내 위기에 처했다. 결국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참패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은, 1743년 영국 왕 조지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륙 전선에 참전하며 데팅엔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하자 깨지게 되었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에 위기를 느껴,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고 1744년부터 다시 전면 공세로 나섰다. 1744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1745년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라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며 결국 최종적으로 슐레지엔을 확보하였다.
슐레지엔을 포기했음에도 오스트리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영토를 포기하더라도 오스트리아로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왕, 보헤미아의 왕,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왕 자리를 확보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까지 오스트리아가 가져야 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은 실질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계승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1743~45년 전역에서 바이에른-프랑스 동맹군을 연파하고,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제노바까지 점령하며 승기를 굳힌 오스트리아군은 때마침 카를 7세가 죽고 신성 로마 제국 제위가 다시 공석이 되자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어 슐레지엔을 할양하는 대신 차기 황제선거에서 프란츠 1세를 지지할것을 조건으로 강화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작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옹립했다.
프란츠 1세의 즉위 이후 프로이센은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했고, 네덜란드와 독일 일대에서 전개되던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지자 결국 양측은 1748년 10월에 아헨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5. 결과
신흥국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한 산업지역인 슐레지엔을 획득함으로써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2세의 천재적 용병술이 부각되면서 그의 전략, 전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비록 슐레지엔을 상실했으나,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계승을 인정받아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왕으로도 즉위했고,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해 전쟁의 본질적 목적인 왕위 승계를 이뤄내고 주변국들로부터 국사조칙을 인정받았으며, 해체 위기에 놓였던 제국을 재통합시켰다[12] .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그로기 상태에서 전쟁을 끝냈으나 유럽의 대표적인 강국답게 아직 체력이 남아 있었다. 특히 유럽의 전쟁과는 별개로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는 새로운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동맹의 역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유럽에 만들어 놓는다.
제7차 교육과정 세계사에서는 이 사건이 사실상의 최종 보스 역할을 한다. 다만 평가원, 교육청 문제에서는 잘 출제되지만 수능에는 잘 출제되지 않는 듯.
6. 주요 전투
- 몰비츠 전투 - 1741년 4월 10일.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 코투지츠 전투 - 1742년 5월 17일.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 데팅겐 전투 - 1743년 6월 27일. 프랑스 vs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
- 퐁트누아 전투 - 1745년 5월 11일. 프랑스 vs 영국-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
-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 1745년 6월 4일.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작센 연합.
- 조르 전투 - 1745년 9월 30일.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 헨넬스도르프 전투 - 1745년 11월 23일.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작센 연합.
- 케셀스도르프 전투 - 1745년 12월 15일. 프로이센 vs 작센.
- 로쿠스 전투 - 1746년 10월 11일. 프랑스 vs 오스트리아-영국-하노버-네덜란드 연합.
- 라우펠트 전투 - 1747년 7월 2일. 프랑스 vs 오스트리아-영국-하노버-네덜란드 연합.
[1]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이었다. 국사조칙 이후 장남이 태어났다가 요절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딸 둘이 더 태어났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않았다.[2] 폴란드 왕위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지원한 아우구스트 3세가 차지하기는 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3세에게 밀려 왕위를 빼앗긴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영지인 로렌이 주어졌다.[3] 프란츠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인을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자기 나라 앞마당에 오스트리아 영토가 세워질까 경계한 프랑스가 혼인 승인을 조건으로 영지인 로렌을 내놓으라 요구했고 울며 겨자먹기로 프란츠는 로렌을 프랑스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얻은 로렌은 루이 15세가(스타니스와프의 사위였다) 폴란드 왕위를 빼앗긴 스타니스와프에게 보상으로 줬으며 후사가 없던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한 뒤 프랑스가 그대로 합병한다.[4] 1718년 빼앗은 세르비아 북부와 서부 왈라키아 일대. 여담이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이 독자적으로 유럽 국가에 승리한 마지막 전쟁이었다.[5] 실제로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한 후에도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에 참석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 연방이 구성된 후에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전까지 의장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차지했다.[6] 1537년 체결된 브리그 조약으로 약 200년이 넘는 시간차다.[7] 브리그 조약은 체결된 당시 독립된 공국이던 슐레지엔의 브리그 공국이 공국의 대가 끊길 시 영지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한테 물려준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는데, 당시 로마왕으로서 황제인 형 카를 5세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관리하던 페르디난트 1세가 조약 승인을 씹어버리는 바람에 효력이 정지되었다. 문제는 브리그 공국이 보헤미아 왕국의 속국이라는 점. 그리고 공국의 종주국인 보헤미아의 왕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차지였다(페르디난트는 1526년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다.). 1675년 브리그 공국의 대가 끊기면서 보헤미아 왕을 겸한 오스트리아가 속국이라는 이유로 낼름 먹어버렸고 브란덴부르크는 조약을 근거로 들어 영유권를 주장했으나 국력 차 때문에 깨갱할 수 밖에 없었다.[8] 리에주 대주교령을 제외한 현재의 벨기에 지방이다.[9] 카를 본인이 선제후인 바이에른 공작이고 합스부르크를 배신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보헤미아 왕위를 카를에게 갖다바치면서 카를 본인은 2표 행사.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구성원인 팔츠 선제후와 쾰른 선제후의 지지를 얻고 프리드리히(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격)와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작센 선제후 자격) 또한 카를에게 투표. 결국 투표 결과는 안 봐도 뻔할 거라 생각해 영국 왕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 자격)가 불참하고 원래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기로 한 트리어 선제후와 마인츠 선제후가 배신하면서 만장일치로 당선.[10] 그와중에 카를은 자기 영지인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게 짓밟히는 동안 선거 장소인 프랑크푸르트까지 대군을 끌고와선 투표 후 즉위식까지 펼치는 뻘짓을 선보인다.[11] 이 때문에 이 전쟁, 특히 북미 전역을 영국과 미국에서는 조지 왕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2] 황제가 된 건 프란츠 1세지만 실권자가 마리아 테레지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이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대공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위는 각각 계승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가 황제를 자처한 것은 몇 십 년이나 지난 뒤에,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에 자극받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