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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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7년 7월 2일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하 국본군)이 네덜란드의 라우펠트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플랑다르 전선에서의 승기를 확고히 한다.
2. 배경
1746년 4월 16일 컬로덴 전투에서 자코바이트 반란군을 섬멸한 영국은 플랑다르 전선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프랑스군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는 총사령관으로서 영국, 하노버, 헤센 연합군 3만 5천명을 지휘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연합군이 모두 집결한다면, 그 숫자는 13만 명 가량이 될 것이었다. 네덜란드군 사령관은 발데크 왕자였고,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은 바티야니 원수였다. 한편, 프랑스군은 지난해 겨울 동안 공략한 브뤼셀, 겐트, 류벤에 자리를 잡고 국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규모는 기병 및 드래군 240개 대대, 190개 보병 대대로 약 16만 명에 달했다.
1747년 3월 말, 국본군은 기병 146개 대대, 보병 101개 대대를 인솔하여 적을 향해 접근했다. 국본군은 뫼즈 강 하류의 루르몬트 일대에 대열을 형성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앤트워프를 탈환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수비대는 국본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에 국본군은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대군의 예상되는 공세로부터 마스트리히트를 보호하려 했다. 이때 28개 보병 대대를 거느리고 있던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통그르에서 클레르몽 원수의 프랑스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다운 백작은 코망드리 시로 진군하여 국본군의 우익을 형성했다.
컴벌랜드 공작의 군대가 마스트리히트로 접근하자, 모리스 드 삭스 원수는 국본군과 마스트리히트 남쪽의 뫼즈 강 사이에 군대를 배치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는 상당한 속도로 군대를 이동시켜 이틀 만에 50여 마일을 진군했다. 반면 컴벌랜드 공작은 하루 동안 푹 쉬다가 뫼즈강으로 이동했다. 이 시기 루이 15세는 퐁트누아 전투에 참관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프랑스군과 동행했다. 이윽고 1747년 6월 30일, 양군은 뫼즈 강 서쪽, 마스트리히트 남쪽 평원인 라우펠트에서 조우했다. 이때 모리스 원수는 사전에 정찰병들을 연이어 파견해 다가오는 국본군의 행방을 충분히 파악했다. 반면 컴벌랜드 공작과 그의 부하들은 프랑스군이 뫼즈강과 국본군 사이의 고지대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국본군 기병대의 지휘관 존 리고니어 경은 뫼즈 강을 따라 형성된 고지인 헤르데렌을 점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리고니어는 곧 프랑스 기병대가 이미 그의 병력보다 훨씬 많은 숫자로 헤르데렌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머지 군대의 도착을 기다리기 위해 헤르데렌에서 가까운 마을에서 대기했다. 그 후 7월 1일 자리를 잡은 국본군은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프랑스 후사르 분대와 국본군 후사르 분대가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고, 영국군 포병대는 라우펠트 외곽에 6파운드 포대를 설치하고 적과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저녁에 폭우가 내리면서 포격전은 끝났고, 양군은 그날 밤을 조용하게 보냈다. 이후 호우가 그친 7월 2일, 양군은 라우펠트 평원에서 맞붙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 총사령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
- 병력: 90,000명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루이 15세
- 부사령관: 모리스 드 삭스 원수
- 병력: 120,000명
4. 전투 경과
1747년 7월 2일 새벽 5시, 영국군 포대는 적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 포병대은 이에 맞서 새벽 6시부터 반격했고, 양측은 오전 8시 30분까시 포탄을 주고받았다. 이무렵, 컴벌랜드 공작은 블링겐과 라우펠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후방에 보병대를 물리기로 했다. 그는 마을들을 지키느라 헛된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자 존 리고니어 경은 요새화된 마을은 아군에게 큰 이점이 될 것이니 지금 당장 군대를 두 마을로 다시 옮겨서 구조물들을 남은 것들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리고니어 경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영국과 헤센 대대는 다시 라우펠트 마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영국 근위대는 마을 후방에 있는 보병대와 함께 대열을 형성했다.
국본군이 이렇듯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모리스 원수는 적이 블링겐과 라우펠트 마을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격하고 프랑스 보병대를 즉시 진격시키기로 결심했다. 얼마 후 프랑스군의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영국, 하노버, 헤센 대대는 라우펠트에 완전히 복귀하지 못했다. 프랑스 보병대 50개 대대는 블링겐과 라우펠트 마을을 집중 공격해 영국, 헤센 하노버 10개 대대를 4시간 만에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무렵, 컴벌랜드 공작은 프랑스군이 이렇게 빨리 공격해올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바타야니 원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적이 블링겐, 라우펠트 마을에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한 그는 황급히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영국, 하노버 대대를 급히 투입해 라우펠트 수비대에 합류시키게 했다. 적이 지원군과 합세하여 역습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뒤로 밀려났다. 컴벌랜드 공작은 보병대에게 진격을 명령하는 한편 바타야니 원수에게 전령을 보내 오스트리아군이 국본군 우익에서 진격하여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공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타야니는 그 요청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루이 15세는 아군이 밀리는 걸 보자 전장으로 접근해 병사들을 격려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다시 진군했다. 국본군 포병대는 그들을 향해 맹포격을 가했지만, 프랑스군은 개의치 않고 수적 우위를 앞세워 몰아붙였고, 프랑스 기병대는 네덜란드 기병대와 맞붙어 손쉽게 격파했다. 결국 라우펠트는 한낮에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갔고, 컴벌랜드 공작은 전군에 마스트리히트를 향해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좌익에서는 존 리고니어 경이 프랑스 기병 140개 대대의 공격에 맞서 기 위해 기병 60개 대대를 출격시켰다. 그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적 포병대가 위치한 뷜레 마을을 공격하려 했다. 이때 컴벌랜드 공작으로부터 라우펠트가 공략되었으며 아군이 마스트리히트로 철수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리고니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 전하면서 기병대로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겠다고 알렸다.
이후 리고니어는 국본군의 후방에서 대기하면서 적의 추격을 막다가 앙주, 카라비니어스, 로얄 브로이 기병대의 협공을 받았고, 결국 두 명의 프랑스인 기병들에게 붙잡혔으며 그가 이끌던 기병대는 와해되었다. 리고니어가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다가 붙잡힌 사이, 국본군은 마스트리히트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지만 3파운드 짜리 대포 9문과 6파운드짜리 대포 7문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노버군 역시 6개의 대포를 상실했다. 이리하여 라우펠트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국본군은 라우펠트 전투에서 6천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2천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여기에 대포 16문이 프랑스군에게 넘어갔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8,700명이었고 포로는 1,5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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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쿠더 작, 루이 15세(백마를 탄 인물)와 만난 존 리고니어 경(좌측에 고개를 숙인 인물).
라우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붙잡힌 존 리고니어 경은 모리스 원수의 안내를 받으며 루이 15세를 알현했다. 루이 15세는 리고니어를 잘 대해줬고 몇 주 후에 가능한 한 전쟁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를 컴벌랜드 공작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국본군은 프랑스군에게 열세한 전황을 버티지 못하고 마스트리히트에서도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1748년 5월 7일 모리스 원수의 지휘하에 마스트리히트를 공략했다. 결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연합국은 프랑스에게 휴전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이를 받아들여 공세를 중지했다. 그 후 10월 18일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