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바이트

 

1. 개요
2. 배경
3. 스튜어트 왕조의 단절


1. 개요


Jacobite
명예 혁명 이후 영국아일랜드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복위를 주장하던 정치 세력.
명칭의 유래는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인 제임스 1세에서 따왔다. 히브리 이름인 야곱을 라틴어로 야코부스(Iacobus), 영어로는 제이콥(Jacob)이나 제임스(James)라고 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접미사 -ite를 붙어 Jacob + ite 자코바이트가 되었다. 실제 통치하는 영토가 없다는 데서 '''물위의 국왕'''(The King over the Water)으로 불렸다.
특히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서 지지자가 많았다. 그 이유는 당시의 영국의 구조와 종교적 문제에 기인한다.

2. 배경


제임스 2세가 속한 스튜어트 왕조는 본래 스코틀랜드 왕가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여 튜더 왕조가 단절되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혈통상 따져보면 헨리 7세의 외증손이 된다는 이유에 따라 잉글랜드 왕위를 겸하여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서 즉위하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이 되어서 한 묶음이 되었다.
그런데 명예 혁명은 잉글랜드 의회 단독의 요청으로 일어났다. 더군다나 명예혁명은 1707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법적, 공식적인 통일 시점에서 20년쯤 전이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부, 조직 등이 아직 서로 따로 존재하고 있던 시절이라, 제임스 2세의 스코틀랜드 왕위를 잉글랜드 의회가 무단으로 빼앗았다고 해석할 여지가 생겨나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스코틀랜드 사람이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 경우도 있어서 자코바이트 중에는 스코틀랜드계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는 이미 철저하게 잉글랜드 국교회청교도가 다수였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서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가 많았고, 따라서 친가톨릭 성향이 있었던 스튜어트 왕조의 복귀를 바라는 가문이 많았다. 여전히 인구의 80%가 가톨릭이었고, 17세기 중반 올리버 크롬웰 치하에 치떨리는 탄압을 당한 아일랜드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원래 제임스 2세는 명예혁명 전에 나이가 50세가 넘은 고령이었고 딸 메리, 앤 외에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의회에서는 제임스 2세가 사망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1688년 제임스 2세가 늦둥이 제임스(제임스 3세)를 낳아버렸다. 이에 의회에서는 네덜란드에 있던 메리의 남편 오라냐공 빌렘을 불러들였고 제임스 2세는 왕비, 갓난아들 제임스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에 잉글랜드와 적대하던 프랑스는 제임스 2세와 그 자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복위를 지지하기도 했다. 1701년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고 1766년 만 77세로 사망한 뒤후에는 그의 장남 찰스 3세가 또 왕위를 요구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귀족 작위도 서임했는데 이를 Jacobite Peerage라 부른다.

3. 스튜어트 왕조의 단절


그리고 1714년 8월 1일 앤 여왕이 후사없이[1] 죽자, 왕위계승권은 제임스 1세의 손녀인 하노버 선제후비 소피아[2]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자코바이트 운동은 여전히 기승을 부려 1715년에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지방에서 대대적인 봉기가 있었고, 이윽고 1745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 다시 한번 스코틀랜드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며칠 만에 스코틀랜드 전역을 점령하고 런던을 함락시킬 뻔한 적도 있었다. 이 1745년 봉기는 영국 본토에 있었던 사상 최후의 지상전인 컬로든 전투에서 조지 2세의 3남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 왕자 휘하의 영국군에게 궤멸당해 자코바이트 운동은 실질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다.[3]
종국에 1788년 자코바이트를 지휘하던 제임스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투어트가 만 67세로 사망하자 그의 사생아 딸 샬럿 스투어트(1753~1789)외에는 후계자가 없었다. 그밖에 찰스의 동생 헨리 베네딕트 스투어트(1725~1807)가 있었지만 그는 왕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성직자가 되었으며 교황청 또한 그를 영국의 적합한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고 요크의 추기경 공작(Cardinal Duke of York)으로 명명하였다. 이로서 자코바이트 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헨리는 추기경이 되어 1807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장수한 추기경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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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임스 및 그의 두 아들 찰스와 헨리는 바티칸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대성당 내부에는 1829년에 제작한 세 사람의 기념물이 있다.
그러나 명예 혁명 직후 대규모 자코바이트 봉기를 일으킨 아일랜드에서는 비록 정치적인 세력은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강해서 1641년의 아일랜드 연맹 봉기, 1798년의 통일 아일랜드인 봉기, 1916년의 부활절 봉기 같은 사건들과 더불어 나아갈 아일랜드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07년에 제임스 3세의 아들인 추기경 헨리가 사망한 후로는 자코바이트의 계승권을 들어 왕위에 대한 클레임을 제기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추기경 헨리의 사망 이후 이론상 자코바이트의 계승권은 사르데냐 왕국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 갔는데[4] 본인이 사르데냐 왕이었으므로 자코바이트 계승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후에 여계를 통해 합스부르크 왕조(이탈리아의 에스테 분파)를 거쳐 비텔스바흐 왕조로 넘어갔다. 현대 자코바이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찰스 1세의 먼 후손이 되는 비텔스바흐 왕가 당주인 바이에른의 프란츠 공(1933~)이 프랜시스 2세(Francis II of Scotland)로서 현대의 적법한 왕위 요구자가 된다.[5]
[1] 아들 윌리엄(1689년 ~ 1700년)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다. 윌리엄 말고는 유산 6명, 사산 10명을 낳았는데, 이들까지 포함하며 무려 17명이나 된다! [2] 1714년 6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아들 조지 1세가 물려받았다. [3] 당시 유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세계전 구도였고 자코바이트의 봉기도 프랑스의 지원이 있었다.[4] 찰스 1세의 막내딸 헨리에타의 딸의 증손자다.[5] 프란츠 공에게는 자녀가 없어 이후 계승권은 동생인 막스 공(1937~), 그 다음은 맏딸인 리히텐슈타인 공세자빈 조피(1968~), 그 아들인 공세손 요제프 벤첼(1995~) 순서다. 요제프 벤첼은 자코바이트 (이론상)계승자들 중 300년만에 처음으로 영국(런던)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 당시, 만약 스코틀랜드가 왕국으로 독립한다면 프란츠 폰 바이에른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다만 프란츠 공 본인은 자코바이트 왕위/스코틀랜드 왕위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자코바이트 왕위에 대해 '이론적인 것일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