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트누아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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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5년 5월 11일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 프랑스군과 맞붙은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플랑드르 전선에서의 승기를 확보했다.

2. 배경


1745년 초,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플랑다르 남서부에 위치한 투르네 요새를 포위했다. 이 시기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하 국본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는 투르네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다. 국본군은 1745년 4월 28일 베존 동쪽에 진을 쳤다. 그날 저녁, 컴벌랜드 공작,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코니세그 원수, 네덜란드군 지휘관 발데크 왕자는 투르네를 포위한 프랑스군 진지를 정찰했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베존과 퐁트누아를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숲과 언덕 너머 프랑스군의 정확한 진형을 자세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다음날 컴벌랜드 공작의 숙소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본군 지휘부는 프랑스군을 베존에서 몰아내고 스켈트 강의 다리들을 공략해 프랑스군이 투르네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오전, 영국과 하노버 기병대 및 보병대가 출격해 베존의 프랑스 분견대를 공격했고, 프랑스 분견대는 짧은 저항 끝에 베존 후편의 비탈길로 물러났다. 컴벌랜드 공작은 막 점거한 베존에 본부를 설치했다. 이때 크로포드 경이 군대 우익에 있는 베리 숲을 점거할 것을 권고했지만 컴벌랜드 공작은 듣지 않았다. 이후 전투 대형을 편성한 국본군은 며칠 동안 적과 대치하다가 5월 11일에 퐁트누아를 공략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모리스 드 삭스 원수는 적이 베존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각 대응에 나섰다. 그는 정면 대결로는 적을 막기 버겁다고 판단하고 퐁트누아에 설치된 보루를 중심으로 수비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요새화된 퐁트누아에 본군을 두었고, 스켈트 강의 강둑인 안토잉 마을에 우익을 두었으며, 베리 숲에 좌익을 배치했다. 삭스 원수는 일부러 퐁트누아와 베리 숲 사이에 통로를 놔둬서 적이 그곳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이때 명목상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인 루이 15세는 퐁트누아 후편의 고원에 설치된 본영에 머물렀고, 드뢰 브레제 후작은 2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투르네 포위를 지속했다. 이윽고 5월 11일, 양측은 마침내 전투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루이 15세
  • 부사령관: 모리스 드 삭스 원수
  • 병력: 56,000명.

4. 전투 경과


5월 11일 새벽 2시, 국본군은 전투 준비를 완료했다. 새벽 4시 영국 우익 보병대와 합세한 컴벌랜드 공작은 프랑스군의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앞서 보낸 정찰병들로부터 베리 숲과 퐁트누아 사이에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국본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한동안 논의한 끝에 네덜란드군이 퐁트누아와 앙토잉 마을을 공격하는 사이 영국 여단이 새로 발견한 길을 따라 침투하기로 결정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토마스 잉골즈비 준장에게 제1 근위대와 제12, 13 보병대,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 하노버리안 보병대를 이끌고 영국군 우익을 겨냥하고 있는 프랑스 포병대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잉골즈비 준장은 적 포병 진지를 향해 진군했지만 경사로가 워낙 험난한 데다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많은 희생이 소모될 것이 예상되자 부대를 잠시 멈춰세운 후 컴벌랜드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 포병대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 지휘관 로버트 먼로 경은 자신이 정찰병을 보내보니 베리 숲 속에 프랑스 비정규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일부 병력을 파견해 적을 숲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진언했다. 잉골즈비 준장은 그의 충고가 일리 있다고 여겼지만 대포가 올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얼마 후, 컴벌랜드 공작의 명령을 받든 미첼슨 대위가 6파운드 짜리 대포 3문을 가지고 와서 잉골즈비 준장과 합세했다. 이후 잉골즈비 준장은 포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적 포병진지를 향해 진격했지만, 적군이 숲에서 총 세레를 퍼붓는 바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잉골즈비 준장은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작전을 성사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컴벌랜드 공작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컴벌랜드 공작은 이를 받아들여 그쪽 방면의 공세를 중단하기로 했다.
오전 7시, 대포 4문의 사격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기병대가 퐁트누아와 앙토잉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퐁트누아, 앙토잉, 그리고 스켈트 강 건너편의 진지에 설치된 프랑스 포병대의 집중 포화에 직면한 기병대는 많은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고, 네덜란드 포병대가 출격해 프랑스 포병대를 향해 사격했다. 오전 6시 30분, 제임스 켐벨 중장이 영국군 15개 기병 분대를 이끌고 베존에서 전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국과 하노버 보병대의 주요 진군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영국군 기병대 역시 적 포병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패퇴했고, 켐벨 중장은 치명상을 입고 전장을 이탈했다.
이후 존 리고니어 경 휘하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베존에서 출격해 프랑스군 진영의 바로 앞 평원까지 나아갔다. 프랑스 포병대는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3파운드 짜리 영국 대포 7문이 이에 맞서 적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오전 9시, 영국, 하노버 보병대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리고니어 경은 잉골즈비 준장이 아군 우익 방면에 포격을 가하는 적을 제압해주길 희망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별 소식이 없자 제프리 애머스트 대위를 잉골즈비 준장에게 파견해 왜 아직도 진군하지 못했는지 물어봤다. 얼마 후 잉골즈비로부터 컴벌랜드 공작이 나머지 영국 보병대와 연계하여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답변을 접한 리고니어는 그들이 진군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좌익 방면에서는 발데크 왕자가 지휘하는 네덜란드 보병대가 퐁트누아와 앙토잉을 공격하기 위해 대열을 형성해 진군했지만, 요새화된 두 마을에서 퍼붓는 대포 세례로 인해 격퇴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컴벌랜드 공작과 쾨니세크 원수는 적 대포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퐁트누아에 대한 추가 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를 잉글즈비의 여단에서 차출하여 퐁트누아에 대한 공격에 투입시키기로 했다. 이후 블랙워치 하이랜드 연대는 퐁트누아로 접근했지만 실패했고, 네덜란드군의 추가 공세 역시 프랑스 드래곤 부대의 좌측면에서의 역습으로 패퇴했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더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오 무렵, 컴벌랜드 공작은 영국과 하노버 보병대에게 고원의 적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프랑스군의 포격 세례를 감수하며 적을 향해 접근했고, 6파운드 짜리 대포 12문이 적의 포격에 맞서 대응사격을 퍼부었다. 얼마 후,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적 보병대에 수십m 거리까지 접근했다. 볼테르에 따르면, 이때 영국군 근위대 지휘관 찰스 헤이 경이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라고 말하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은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직후 영국군 보병대가 먼저 사격을 개시해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본다.
확실한 사실은 프랑스군의 일제사격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영국군의 일제 사격은 7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 보병대의 전열이 흐트러졌고, 영국, 하노버 연합군은 기세를 타 적진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때 루이 15세는 전투를 직접 살펴보려고 최전선에 가 있었는데, 아군이 뿔뿔히 흩어지고 적이 쇄도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피하시라는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삭스 원수는 국왕의 무모한 행동에 경악해 급히 최전선으로 달려와 예비대를 이끌고 적을 막게 하면서 루이 15세의 안부를 확인했다.
삭스 원수로부터 적을 격퇴하라는 지시를 받은 아우베테르 연대는 즉각 출격해 영국-하노버 보병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적을 도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삭스 원수는 프랑스군 기병 연대를 출격시켜 영국, 하노버 보병대를 공격하게 했지만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기병대가 악전고투를 벌이는 사이 후방에서 보병대를 집결시켜놨고, 이후 프랑스 보병대는 아일랜드 연대, 스위스 연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아일랜드 여단은 중앙의 영국 부대를 공격했고, 스위스 근위대는 좌익의 하노버군을 공격했다.
이후 한 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인 영국, 하노버 보병대가 적의 기세에 눌러 밀려나기 시작하자, 삭스 원수는 그동안 아껴두고 있던 메종 드 루아 기병대를 투입했다. 메종 드 루아는 데팅겐 전투에서 저지른 실책을 만회하고자 무지막지한 공세를 감행했고, 영국, 하노버 보병대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컴벌랜드 공작은 이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친히 전장으로 달려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될 수 있는 한 군대를 질서정연하게 철수시키고자 노력했고, 프랑스군은 적을 격퇴한 것에 만족하고 더이상 쫓지 않았다. 이리하여 퐁트누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 하노버 연합군의 사상자는 5,842명에 달하며, 네덜란드군의 사상자는 1,544명이었다. 또한 3,000~4,0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대포 40문을 상실했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7,137명이었으며 포로는 400명이었다. 국본군은 전투가 끝난 후 전면 퇴각했고, 삭스 원수는 투르네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삭스 원수는 브뤼즈, 겐트, 나우포르트,오스텐더 등 플랑다르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했고, 이러한 프랑스군의 성공에 고무된 자코바이트 반란군이 1745년 7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1]의 지휘하에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결국 컴벌랜드 공작은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영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삭스 원수는 이 틈을 타 1745년 겨울 공세를 개시해 브뤼셀, 앤트워프, 몽스, 샤를루아 등을 공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