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헨바흐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2년 8월 16일 보헤미아의 라이헨바흐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2. 배경
1762년 7월 21일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프리드리히 대왕은 시비드니차 요새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했다. 이에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 장군이 이끄는 별동대에게 케셀베르크와 스테인-시퍼스도르프 사이의 고지인 라이헨바흐로 진격해 적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8월 16일 오전 10시 브렌타노 장군의 군대와 함께 적을 향해 진군하다가 그날 오후에 랑-비엘라우에 숙영지를 설치한 뒤 저녁 식사를 요리하게 했다. 이걸 본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은 다음날까지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였다. 레이시 장군은 오후 3시 극비리에 장군들과 협의하여 각자의 군단을 배치시켰다. 브렌타노 장군의 군단과 오도넬의 기병대는 니데르 페일라우 앞에 배치되었고 레이시 본인은 몇 개 대대를 거느리고 미텔 페일라우 부근에 두 개의 포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벡 장군의 군단은 라이헨바흐에 주둔한 베베른 공작의 좌익을 공격하기 위해 오베르 페일라우를 거쳐 오베르 페일라우와 길스도르프 사이에 두 개의 배열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들은 오후 5시부터 적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 병력: 보병대 11개 대대, 기병대 25개 대대 + 증원군 보병 9개 대대, 기병 20개 대대, 대포 62문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
- 병력: 보병 33개 대대, 기병 9개 대대, 후사르 3개 분대
4. 전투 경과
오후 6시 경 오도넬의 기병대가 미텔 페일라우에 도착했다. 이걸 목격한 프로이센의 렌툴루스 장군은 18개 기병 대대를 이끌고 보병대 뒤편의 숲 사이로 이동해 그들을 공격했다. 한편 페테르스왈다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기병대는 포병대의 지원 포격에 힘입어 라이헨바흐 동쪽에서 오고 있던 적 보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스트리아군 보병대의 일제사격에 압도되어 아군 보병대 후방으로 피신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포격에도 굴하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켰고, 벡 장군은 길스도르프와 숲과 고지를 장악한 뒤 포병대를 고지에 배치하여 적 포병대가 위치한 피쳐르베르크를 포격했다.
오후 6시 30분, 렌툴루스 장군의 프로이센 기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격파했고,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니데르 페일라우 외곽으로 패주했다. 뒤이어 프로이센 중기병대 대다수가 라이헨바흐로 전속력으로 이동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친히 9개 보병 대대를 이끌고 그들을 따라갔다. 이때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이 시점에서 적 참호를 향해 진군했으나 프로이센 포병대의 격렬한 포격에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그러다가 오후 7시에 벡 장군의 군단이 숲을 간신히 빠져나와 프로이센군 후방의 평원에 들어섰다. 이에 다른 오스트리아군도 전력을 모아 적을 향해 진격했다. 이후 양측은 라이헨바흐 평원 일대에서 격렬한 총격전 및 육탄전을 벌였다.
그러던 오후 7시경, 다운 백작은 적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격을 중단하고 전 병력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때에 전달되지 않아 여전히 전투를 지속하는 오스트리아군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니데르 페일라우 근방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를 격퇴하기 위해 15개의 프로이센 기병 부대를 투입시켰고, 이들은 곧 임무를 완수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는 가까스로 재집결했으나 곧 렌툴루스 장군 휘하의 또다른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공격당해 완전히 무너졌다. 여기에 해가 진 후 묄렌도르프 장군의 6개 프로이센 보병 대대가 도착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이리하여 라이헨바흐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라이헨바흐 전투에서 921명의 병사와 기병 645명을 상실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약 600명을 상실했다. 다운 백작은 작전이 실패하자 요새 구원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로 철수했고, 시비드니차 요새에 고립된 오스트리아군은 적에게 포위된 채 몇달간 버티다가 1762년 10월 11일에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