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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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중 부상당한 프로이센 병사에게 자신의 스카프를 건네 상처를 동여매도록 지시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2년 7월 21일 슐레지엔의 부르케르스도르프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한 전투. 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뒀으며, 프로이센은 이 전투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개시한다.
2. 배경
1762년 초, 프로이센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1761년 10월 5일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가 총리 직에서 물러난 뒤 새 총리에 임명된 뷰트 백작이 이끄는 영국 내각은 프로이센에 대한 자금 지원을 대폭 삭감해버렸고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데 집중했다. 가뜩이나 7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으로 프로이센군의 전체 병력은 7만 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영국의 지원 중단 결정은 프로이센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제 프로이센은 조만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압도되어 멸망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 1762년 1월 5일 러시아의 새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군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표트르 3세는 러시아가 빼앗았던 프로이센의 영역을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돌려줬고,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던 스웨덴을 설득해 전쟁에서 이탈하게 했으며, 심지어 체르니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 2만 명을 파견해 프리드리히 대왕을 돕게 했다. 이 극적인 상황 반전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포기하고 작년에 프로이센으로부터 탈취했던 시비드니차 요새를 중심으로 삼아 부르케르스도르프 일대에 주둔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1762년 6월 말에 러시아군과 합세하고 부르케르스도르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던 7월 9일, 표트르 3세가 궁정 쿠데타로 축출되고 황후 예카테리나가 새 차르로 즉위했다. 7월 18일, 체르니셰프 장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새 차르가 자신에게 러시아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알렸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으니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투를 벌이는 3일 동안만이라도 현장에 남아있어달라고 설득했고, 체르니셰프는 대왕의 설득에 넘어가 이에 따르기로 했다. 이후 7월 20일 아침, 프로이센군은 모든 할당된 위치에 도달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진형을 살펴본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주둔한 부르케르스도르프 언덕과 루드비그스도르프 언덕이 울창한 숲과 매우 가파른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음과 같은 작전을 구상한다. 먼저 러시아군과 라민 장군, 만테푸펠 장군 휘하의 일부 프로이센군은 언덕 위에 포진한 적과 대치해 적의 시선을 잡 아끈다. 그 사이에 프로이센 주력군은 루드비그스도르프 마을과 오베르 위스트리츠 마을 주변에서 오스트리아군의 극우익을 향해 비스듬하게 진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군대를 직접 이끌 작정이었다. 그리고 위드 장군은 프로이센 극좌익을 이끌고 적의 고지를 급습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7월 20일 저녁 베르거도르프에 자리잡은 뫼렌도르프 장군은 야전 대포 55문을 베르거도르프 요새 근처에 배치해 적 포대를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듯 모든 작전을 수립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음날인 7월 21일에 전격 공세를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대왕
- 병력: 4만 명
3.2.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 병력: 3만 명
4. 전투 경과
7월 21일 새벽, 프로이센군은 해가 뜨기 전에 행진을 시작했다. 위드 장군의 군단은 루드비그스도르프의 고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3개 부대로 나눠졌는데, 2개 부대는 고지를 올라가 적을 몰아내는 임무를 맡았고 한 부대는 루드비그스도르프 마을을 점거해 오스트리아군의 역습으로부터 고지를 점거한 아군의 좌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들이 루드비그스도르프 주변의 적군 진지를 급습하려 했을 때, 전날에 프로이센군이 아군을 습격할 가능성을 고려한 다운 백작에 의해 파견된 브렌타노 장군의 선두 대대가 도착하여 진지를 사수했고 프로이센군은 뒤로 밀려났다. 이에 2개의 프로이센 대대가 추가로 파견되어 공격을 강화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다시 쫓겨났다. 이후 루툼 대령이 이끄는 2개 보병 연대가 루드비그스도르프 고지를 급습해 적을 몰아냈다.
한편 뫼렌도르프 장군이 설치해둔 야전 대포 55문이 적 기병대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결국 오스트리아 기병 연대 2개 대대가 출격하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그 후 뫼렌도르프의 보병대가 투입되어 전장을 우회하여 오스트리아군 본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여기에 북쪽 방향에서 만테우펠 장군의 프로이센 우익이 트라우틀리베르스도르프와 노이 로센도르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다. 이 협공에 견디지 못한 오케이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은 진지를 버리고 퇴각했다. 결국 다운 백작은 더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팔에 부상당한 채 오베르 위스트리츠 주변 전투 현장을 떠나고 있던 프로이센 화승총 병사와 만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병사가 답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병사가 부상당했음을 확인하고 그에게 스카프를 건네 상처를 동여매게 했다. 그때 그의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러시아군 지휘관 체르니셰프 장군은 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하느님의 보우하사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적은 도망가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이겼습니다.
다음날인 7월 22일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이 글래츠로 철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시비드니차 요새를 포위했다. 하지만 요새 수비군은 항복하지 않고 몇달간 항전했다가 10월 11일에 비로소 항복했다.백성들이 왜 그토록 대왕에게 열성적으로 헌신하는지 알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들에게 매우 친절하시군요.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1,600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2,500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를 향한 마지막 공세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