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그리어슨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로버트 G. 그리어슨
具禮善 | Robert G. Grierson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1868년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사망'''
19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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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내다 출신의 장로회 선교사.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8년경 캐나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0년에 댈하우지 의과 대학을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파인힐 신학교를 거쳐 1897년 장로교 신학회를 졸업했으며, 189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에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하고 1898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그가 한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맥켄지(W. J. Mackenzie) 선교사에게서 비롯되었다. 홀로 한국에 가서 선교 활동을 하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가 1895년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캐나다 장로회에 유서를 보내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청원했다. 이에 캐나다 장로교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그리어슨과 W.P 푸트, D.M. 매크레 목사를 한국으로 파견했다. 그리어슨 선교사 일행은 1898년 9월 7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그리어슨은 원산, 성진, 함흥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어슨은 성진에 정착해 그곳을 선교 근거지로 정하고 이순창의 집을 예배로 처소로 정하고 어학 선생 홍순국의 통역을 받으며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신자가 30여 명에 이르자 예배당을 건축해 1901년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목수였던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이 직접 한국에 와서 그를 도와줬고, 그는 예배당을 크게 지어 서재에서 성경과 소책자를 판매하고 방 한쪽에서는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게 했다.
이후 1902년에 여러 선교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제동병원을 설립했고, 간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한인 이주민들을 장로교로 인도했다. 1903년 여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한인촌을 순회하며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파했으며, 1906년에는 홍순국 조사와 함께 용정에 예배 처소를 마련했다. 또한 그는 교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903년에서 1904년 사이에 보신학교를 설립해 1935년 은퇴할 때까지 보신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아이들을 돌봤으며, 그의 아내 레나 베노잇도 보신여학교를 세워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9년에 러시아를 다시 방문해 블라디보스토크 교회에서 주관한 성경공부한 강사로 부임하여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908년경, 그리어슨은 함경남도 단천군 원덕리 교회 장로 문성기로부터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수락하고 원덕리 교회에 도착한 뒤 자신의 말을 묶어놓고 결혼식이 열리는 신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군 병사들이 그리어슨의 말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가보니 병사 넷이 말 두마리를 번갈아가며 타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그리어슨은 말에 타고 있던 병사를 끌어내고 다른 병사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이 채찍에 맞은 병사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후 그리어슨은 병사의 상관인 덕원군 헌병분견소장 고바야시 센파치로(小林善八郞)에게 항의해 사과를 받아냈다.
1909년 봄, 이동휘가 그리어슨을 찾아와 자신에게 교직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어슨은 그가 일본에게 요시찰 인물로 간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를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이동휘를 조사로 임명해 국권회복운동을 자유롭게 하도록 후원했다. 또한 이동휘가 1914년 가을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외로 망명할 때 도와주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리어슨은 3월 7일 성진 일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했다. 이어 3월 9일 주일에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며 교인들을 격려했고, 3월 10일 성진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진 뒤 일본 군경과 소방대의 진압 작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치료해줬다. 성진경찰서는 이 일로 그를 취조했지만 해외 선교사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서양 열강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훈방 조치했다. 이후 그리어슨은 옥고를 치르는 성진교회 장료 및 교인들을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치게 했으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면회하고 교회 여신도들을 교대로 보내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게 했다.
그리어슨은 1935년에 정년 퇴임하여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갔고, 토론토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에 98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로버트 그리어슨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