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버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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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6월 8일부터 7월 26일까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루이스버그 요새를 놓고 맞붙은 전투.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세인트로렌스 강의 항로를 확보하고 이듬해 북미 프랑스 식민지의 핵심기지인 퀘벡 공략전에 착수한다.

2. 배경


케이프 브리튼 섬의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루이스버그 요새는 세인트 로렌스 강의 입구와 프랑스령 캐나다를 지키는 보루였다. 영국이 북미 프랑스 식민지를 점거하기 위해서는 루이스버그 요새를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사실 이 요새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영국 북미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민병대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지만 1748년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프랑스에게 귀속되었다. 1758년 2월, 에드워드 보스카웬 제독의 영국 함대는 제프리 애머스트 장군의 육군을 싣고 영국으로부터 북미 식민지로 향했다. 함대의 규모는 157척에 달했고 병력은 11,000명이었다. 1758년 6월 2일, 함대는 루이스버그 요새의 서쪽인 가바루스 만에 근접했다. 이후 상황을 살펴보던 함대는 6월 8일 날씨가 충분히 누그러져 공격을 개시할 수 있게 되자 본격적으로 루이스버그 요새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 사령관: 오귀스탱 드 보쉔리
  • 병력: 육군 3,500명, 해군 3,500명, 군함 5척.

4. 전투 경과


영국 함대가 섬에 상륙할 수 있는 장소는 프레시워터 코브, 화이트 포인트, 그리고 플랫포인트의 3곳이었다. 이에 울프 장군이 이끄는 병력이 프레시워터 코브를 공격하는 동안, 로렌스 장군과 휘트모어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화이트포인트와 플랫포인트에서 적을 유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울프는 연대의 모든 척탄병 부대를 지휘해 3척의 보트를 타고 적군 포병대의 포격 세례를 뚫고 목적지에 상륙했다. 그러나 적이 워낙 거센 반격을 가해와 손실이 갈수록 거세지자, 울프는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던 중 울프 사단의 선박 한 척이 프랑스의 포격으로부터 자유로운 해안을 발견하고 그곳을 장악했다. 이에 울프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에 프랑스군은 서둘러 루이스버그 요새로 후퇴했다.
이후 울프는 6월 12일에 1,200명 의 병력을 항구에 파견하여 등대를 점령하게 한 뒤 포위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파도가 매우 거세고 늪지대 위로 포대를 옮기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요새 공격은 6월 19일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영국군 포대는 70개의 대포와 다양한 크기의 박격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대포들은 성벽을 파괴하고 요새 내 몇몇 건물들을 손상시켰다. 여기에 7월 21일 등대에 설치된 영국군 포대를 공격했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의 거센 역습으로 패퇴했고 3척이 파괴되었으며 나머지 2척은 도주했다. 이후 7월 23일, 영국군 대포가 쏜 포탄이 루이스버그 요새의 건물인 킹스 바스티온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요새 수비군의 희망은 꺾여버렸다.
7월 25일, 영국 함대는 항구에 숨어있던 2척의 프랑스 함선들을 파괴했다. 이제 루이스버그 요새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군은 7월 26일에 항복했다. 요새 사령관 오귀스탱 드 보쉔리는 프랑스군의 명예를 존중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영국 측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모든 무기와 깃발을 바쳐야 하며 그들의 팔을 결박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보쉔리 장군은 이 통보에 분노했지만 루이스버그 요새 내 민간인들의 안전이 그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루이스버그 요새는 영국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5. 결과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이었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5,600명이 200개의 대포와 수많은 군수품을 바치며 항복했다. 이후 케이프 브레튼 섬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영국군은 퀘벡을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