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보스카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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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1. 개요


영국의 해군 제독.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보스카웬은 1711년 8월 19일 영국 콘월주 토레고스난에서 태어났다. 그는 휴 보스카웬과 샬롯 고드프레이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1723년 12세의 나이에 프란시스 호시어 제독이 이끄는 서인도 함대에 소속된 슈퍼브 호의 선원으로서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726년, 보스카웬은 찰스 와거 제독 휘하의 캔터베리 호, 헥토르호, 그리고 나무르 호로 재배치되었다. 729년, 보스카웬은 영국과 스페인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킨 세비야 조약에 따라 서인도 제도에서 카디즈와 리보르노로 항해하는 나무르 호에 탑승했고, 1732년 5월 5일 중위로 진급했으며 8월에 지중해 함대에 소속된 핵터 호에 승선했다.
그후 3년간 핵터 호에서 활동하던 보스카웬은 1735년 10월 16일 그라프톤 호에 승선했고, 1736년 3월 12일 존 노리스 제독에 의해 레오파드 호의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1738년 6월, 보스카웬은 쇼레햄 호의 지휘권을 부여받았으며, 곧 있을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에드워드 버논 제독과 함께 서인도 제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이 발발하면서 쇼레햄 호도 출격 명령을 받았지만 곧 항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이 내려지자 그 배에 소속되어 있던 보스카웬은 포르토 벨로를 포위 공격하는 영국 함대에 자원했다. 1739년 11월 포르토 벨로 포위전 때, 보스카웬은 찰스 놀스 경과 함께 항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이에 보스카웬은 3주 동안 122배럴의 가량의 화약을 준비한 뒤 불을 질러 항구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영국으로 귀환한 그는 항해 준비가 완료된 쇼레햄 호의 지휘를 재개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보스카웬은 또다른 카리브해 항구인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함대에 소속되었다. 당시 영국군의 규모는 이 스페인 식민지 도시를 둘러싼 요새 주변 해협에 쳐진 사슬을 파괴하기 위해 상륙한 8천 명을 포함해 3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동원되었다. 반면 스페인군은 정규 군인, 선원, 지역의 충성파 원주민들로 구성된 약 6,0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18,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도 함락에 실패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이질, 괴혈병, 황열병 등 각종 질병으로 인해 발생했다.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보스카웬이 이끄는 육군은 3월에 산 루이스 요새와 보카치카 요새를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는 이 공로로 프린스 프레드릭 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42년 5월, 보스카웬은 프린스 프레드릭호와 함께 영국으로 귀환했고 뒤이어 새로 건조한 드레드노트 호의 선장으로서 존 노리스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에 합류했다. 같은 해, 그는 트루로의 지역 의원이 되었고 프란체스 에블린 글랜빌과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다. 1744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 침공을 시도했을 때, 보스카웬은 노리스 제독 휘하의 함대에 배속되어 이들을 저지했다. 프랑스 해군이 후퇴하자 영국 해군은 추격하려 했으나 영불 해협을 휩쓴 격렬한 폭풍으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보스카웬은 이 와중에도 폭풍을 뚫고 프랑스 호위함 메데호를 포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해 연말, 보스카웬은 로얄 쇼버린 호의 지휘권을 부여받아 정박지의 경비를 맡았다.
1745년, 보스카웬은 그의 옛 함선인 나무르호 지휘관에 임명받아 영불 해협을 경비하는 함대 휘하의 소대 지휘를 맡았다. 1747년, 보스카웬은 안손 제독과 합류하는 명령을 접수하고 5월 14일 1차 피니스테레 곶 전투에서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프랑스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지만 도중에 어깨에 총탄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7월 15일, 보스카웬은 후위대장으로 승진하여 동인도 지역으로 파견된 영국 함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해 11월 4일, 보스카웬은 니무르 호를 비롯한 다섯 전열함을 이끌고 영국에서 출발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나아가던 중 남아프키라의 모리셔스 섬을 기습적으로 공략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1748년, 보스카웬은 항해를 재개했고 7월 29일에 마침내 인도의 항구인 세인트 항에 도착했다. 그는 곧 퐁디셰리에 있는 프랑스인 정착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접수받고 공세를 개시했지만 보스카웬의 육상에서의 공세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그의 지휘하에 있는 기술자와 포병장교의 미숙함, 작전 계획 누설, 그리고 프랑스 총독 조세프 프랑수아 뒤플리스의 기민한 대응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후 그는 장마철 동안 세인트 데이비스 요새에 머물렀지만 그 사이에 폭풍이 항구를 덮치면서 그의 주력함이었던 나무르 호가 600명 가량의 선원 및 병사들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1750년 영국으로 돌아온 보스카웬은 1751년 제독의 반열에 올랐고 제독 위원회에 가입해 죽을 때까지 제독 위원회 집행 위원으로 활동했다.

2.3. 7년 전쟁


1755년 2월 4일, 보스카웬은 부함장에 승진되어 북미 일대의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이 캐나다로 증원군을 수송하기위해 프랑스 선박들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보스카웬은 4월 27일 전열함 11척, 프리깃함 1척, 슬루프 1척, 육군 2개 연대와 함께 포츠머스에서 출항했다. 그는 프랑스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뉴펀들랜드의 남쪽 해안 근처에 있는 생로루렌트 만까지 항해했다.
5월 3일, 프랑스 함대는 많은 지연 끝에 마침내 브레스트에서 출항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사방에 흩어졌다. 6월 7일, 7척의 프랑스 함정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던 보스카웬의 함대에 의해 목격되었다. 이에 보스카웬은 추격을 명령했고 영국 함대는 쏜살같이 추격했다. 6월 8일, 영국 함대는 짙은 안개가 끼면서 4척을 놓쳤지만 케이프레이 앞바다에서 나머지 3척을 따라잡았다. 이때 던커크 호가 프랑스 전열함 알시데 호로 접근했고 보스카웬이 탑승한 토르베이 호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이때 알시데 호 선장 호크워트 대위가 소리쳤다.

평화인가, 아니면 전쟁인가?

그는 곧 던컨크 호 선장 하우 대위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접했다.

La paix, la paix(평화, 평화)

이에 호크워트 대위는 영국 측 제독의 이름을 묻고, 에드워드 보스카웬 제독이라는 대답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그는 나의 친구다.

그러나 그 직후 던컨크 호가 난데없이 포격을 퍼붓자, 알시데 호는 적의 포탄 세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호크워트 대위는 전사했다. 이후 알시데 호와 로스타잉 호는 포획되었고, 도핀 로얄 호 만이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보스카웬은 1,500명의 포로와 8만 파운드 상당의 물자를 노획했다. 영국군 함대는 재결성을 위해 핼리팩스 항으로 향했지만 열병이 함대 내에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열병으로 인해 죽어간 병사들의 숫자는 2,000명에 달했다.
1756년, 보스카웬은 체널 제도의 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했으며 포츠머스에서 미노르카 해전에서 패전한 존 빙 제독의 군사재판을 주재했다. 보스카웬은 국왕 조지 2세가 존 빙 제독의 사면을 허락하지 않자 사형 명령서에 서명했고, 결국 존 빙 제독은 처형되었다. 이후 1757년 10월, 보스카웬은 에드워드 호크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부제독으로 임명되었다. 1758년 2월 7일, 보스카웬은 제독으로 진급하여 루이스버그 요새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은 함대 23척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그는 함대를 이끌고 루이스버그 전투에 참가해 6월과 7월에 요새를 포위한 제프리 애머스트소장의 영국 육군을 지원했고 근처의 프랑스 함선들을 모조리 소탕했다. 결국 루이스버그 요새는 7월 26일에 마침내 항복했고, 임무를 완수한 보스카웬은 가을에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하원과 하원의 감사장을 받았고, 조지 2세는 보스카웬을 추밀원 지도원으로 임명했다.
1759년 4월 14일, 보스카웬은 전열함 3척과 프리깃 함 몇 척을 이끌고 스피트헤드 항을 떠나 지중해 함대와 합세해 그들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4월 27일 지브롤터에 도착한 보스카웬은 그곳에서 순양함과 보급함들의 편성을 맡았다. 5월 3일 지브롤터에서 출발한 보스카웬은 5월 16일 툴롱 근처 시시 곷에서 터머스 브로데릭 부제독과 합세하여 프랑스 해군의 영국 본토 침공을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군이 툴롱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6월 7일 보스카웬은 프랑스 프리깃함 2척을 추격해 툴롱 근처의 요새화된 만으로 몰아넣고 6월 8일 그의 함선들 중 세척에게 이 만 안에 갇힌 프랑스 프리깃함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2시간 동안 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은 채 패퇴했다.
이후 보스카웬은 툴롱 봉쇄를 계속 유지했지만 7월 초에 식량 보급과 함선 수리를 위해 지브롤터로 가야 했다. 그는 7월 8일 타라고나 근처에 있는 살라우에 도착하여 7월 24일까지 그곳에 머물렀고 8월 4일 지브롤터에 도착했다. 한편 영국 프리깃함 2척은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말라가와 에스테포나와 세우타 사이를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던 8월 17일, 프리깃함 지브롤터 호는 툴롱에서 출항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프랑스 함대를 목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보스카웬은 지브롤터 호에게 장교 한 명을 보내 적군을 계속 감시하고 수시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후 보스카웬은 함대를 집결시킨 뒤 프랑스 함대를 추격했고, 8월 18일 라구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 함대는 이 해전에서 패해 사방으로 흩어졌고, 보스카웬의 함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전열함 3척을 나포하고 2척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보스카웬은 부제독 브로드릭 휘하 함대에게 카디스로 도망친 5척의 전열함과 프리깃 3척을 봉쇄하게 한 뒤 영국으로 귀환했다.
1760년, 보스카웬은 키브롱 만을 중심으로 프랑스 서해안 일대를 순찰하며 프랑스 함대의 출전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장티푸스에 걸려 뭍으로 올라와 고열 증세로 고통받다가 1761년 1월 10일 서리의 해치랜드 파크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5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