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니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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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8월 15일 실레시아의 리그니츠(Liegnitz, 현 폴란드 레그니차(Legnica))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이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실레시아를 사수했다. 참고로 519년 전 이곳에서 몽골 제국과 폴란드 연합군이 맞붙었다가 폴란드 연합군이 대차게 깨지면서 몽골의 위엄을 서유럽에 알렸다.

2. 배경


1760년 5월,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지엔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실레시아 국경을 수비하고 있던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트 푸케 장군의 프로이센군이 맞서 싸웠으나 란데스후트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실레시아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 라우돈 남작은 여세를 몰아 7월 24일에 글라츠를 함락시켰다. 이제 슐리지엔이 위협받게 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슐레지엔의 구원에 나섰다.
8월 14일, 오스트리아군은 오데르 강을 건너 리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그로스브레사에 진을 쳤다. 같은 날,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는 캣츠바흐를 지나 리그니츠 교외에 본부를 설치했다. 한편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가 이끄는 80,000명의 병력이 라우돈 남작과 합세하기 위해 7~8km 떨어진 지점까지 이르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도착하기 전에 라우돈 남작과 승부를 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의 장군들과 함께 슈워츠와세르 강을 가로질러 파펜도르프 고지까지 가서 그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런 후 진지로 돌아온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날 늦은 오후 오스트리아군 탈영병으로부터 그날 밤 공격이 계획되어 있다는 경고를 입수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후 8시부터 군대를 몇개의 대열로 편성한 뒤 글로고로 진군했다.
얼마 후, 라우돈 남작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야습을 감행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후 11시, 그는 적의 진영이 텅 비어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가 정찰병들을 급히 보내 적의 행방을 알아보게 하는 사이, 프로이센군은 8월 15일 새벽 1시경에 슈워츠와세르 강을 도하했다. 새벽 2시 30분, 프리드리히 대왕은 임시 진지를 설치한 후 불을 피우게 한 뒤 그 앞에서 숙면을 취했다. 이때 후사르군 대장 헌트 소령이 달려와 왕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곧 왕 앞으로 소환된 그는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노위츠와 포히슈데른으로 진군해 프로이센군 좌익을 노리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대왕은 전군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고, 이렇게 리그니츠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 병력: 보병 24,450명, 기병 8,200명, 대포 56문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리그니츠 전투의 전장 한복판을 가르지르는 슈워츠와세르 강은 북쪽으로는 높은 지대로 둘러싸인 말발굽 형태를 형성하고, 남쪽으로는 리그니츠 쪽으로 움푹 패인 형태를 취했다. 그후 오데르 강 방면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캣츠바흐 강과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북쪽의 말발굽 모양의 지대에 군대를 숨겨뒀다가 적이 가까이 오자 미리 정해둔 대로 군대를 배치했다.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의 군대는 슈워츠와세르 부근에 주둔해 우익을 맡았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캣츠바흐 부근에서 좌익을 이끌었다. 이후 대왕은 헌트 소령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라고 명령했으며 여단의 최좌측에 있는 스첸켄도르프 장군에게 비엔노위츠 근처의 볼프스베르그에 군대를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령에 따라, 스헨켄도르프 장군은 볼프스베르그에 야전포대를 설치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진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당시 라우돈 남작은 적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프리드리히 대왕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포격 세례를 받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병사들에게 볼프스베르그 언덕에 설치된 적 포대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몇개 보병대대가 고지를 올라갔지만 프로이센군은 스헨켄도르프 장군의 격려를 받으며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
한편, 안할트-베르부르크 보병대와 프린츠 페르디난트 보병대가 오스트리아군과 먼저 맞붙고 있던 스헨켄도르프 부대의 좌측면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예비대가 투입되어 이들을 지원했고 프로이센 기병대도 아군의 좌측면에 배치되어 적의 측면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머지 프로이센군은 휴멜른에서 비엔노위츠까지 슈바르츠와세르 강을 따라 배치되어 유리한 위치를 점유했다. 한편, 라우돈 남작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볼프스베르그 언덕을 향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적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공략에 애를 먹었다. 라우돈의 우익 기병대는 적의 좌측면을 돌파하는 임무를 성공시키는 듯했지만 곧 적이 기병-보병 합동 공격을 가해오자 패퇴했다.
라우돈 남작은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새로운 대대를 데려와 우익을 보강시켜서 프로이센군 좌익을 능가하는 병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워낙 급작스런 상황이었던 데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서 부대 이동에 애를 먹었고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이때를 틈타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돌파했다. 한편 라우돈 남작은 휘하 기병대에게 다시 적의 좌측면을 다시 한번 돌파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번에도 프로이센군의 거센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렇듯 프로이센 좌익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프로이센 우익은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과 웨델 장군의 지휘 아래 리그니츠 방면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운 백작의 원군이 당도할 때를 기다리면서 리그니츠에서 이곳으로 오는 두 도로를 가로막는 강력한 야전 진지를 설치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우돈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군대를 좌측으로 이동시켰고, 그 과정에서 치텐 백작의 전선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선 간에 상당한 공백이 발생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워낙 혼란에 빠져 있어서 이 상황을 알아채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곧 이 공백을 7개의 예비 대대를 투입해 메꿨다.
라우돈 남작에겐 설상가상으로, 프로이센군의 포격이 오스트리아군의 화약 마차에 직격해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오스트리아군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라우돈 남작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해 어려운 상황을 만회하려 했지만 프로이센 포병대의 일제 사격으로 기세가 꺾인 데다 좌익에 위치한 안할트-베른부르크 연대가 주도하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반격을 받아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다섯 차례의 돌격 시도 끝에, 라우돈 남작은 마침내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프로이센 기병의 추격을 막기 위해 비엔노위치에 소형 야전 포대를 설치했다. 새벽 4시, 라우돈 남작의 군대는 완전히 철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병력을 아낄 필요가 있어서 감히 라우돈 남작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라우돈 남작이 마침내 퇴각할 무렵, 다운 백작이 이끄는 8만 병력이 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고 전투를 단념한 채 철수했다. 이에 대해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며 맞서 싸웠거늘 근처까지 와놓고 철수해버린 것에 격노해 다운 백작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이 일로 인해 서로 반목한다.

5.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3,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4,734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82개의 대포를 상실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3,390명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의 승리로 슐레지엔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슐레지엔에 병력을 집중시킨 사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1760년 10월에 베를린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병력을이끌고 구원에 나서자,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점령 4일 만에 철수했다. 프로이센 국민은 수도가 잠시나마 함락되었다는 것에 크게 동요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수도 경비에 많은 병력을 두는 것은 가뜩이나 없는 전력을 깎아먹는 짓이라고 판단해 여전히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후 그는 그해 11월에 작센에 주둔하고 있는 다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고자 진군했고, 양 측은 11월 3일에 토르가우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