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데스후트 전투

 


[image]
폴란드 카미엔나 고라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6월 23일 실리시아의 란데스후트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59년 8월 12일,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완패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참패에 완전히 의기소침했고 한동안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하거나 아예 퇴위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 완승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으로 곧바로 진군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어서 사후수습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러시아군은 만성적인 물자 부족 때문에 베를린까지 가기가 빠듯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더이상 진군하지 않고 행군을 멈췄고,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 다운 백작은 소규모 병력을 파견해 프로이센 본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에게 패한 뒤 당분간 프로이센 본토를 노리지 않았다.[1]
이듬해인 1760년, 약 1만 3천명의 프로이센군이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트 푸케 중장의 지휘 아래 실레시아 국경 수비대에 배속되었다. 푸케 중장은 란데스후트(현재의 카미엔나 고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이 32,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모라비아 국경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3월 중순, 푸케는 슈타인라우와 오베르그로그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예상되는 오스트리아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그리고 5월 말, 라우돈 남작이 로트코스테레츠에 군대를 집결시킨 후 5월 29일일에 실레시아를 침략했다. 푸케는 이에 평원으로 내려가 라우돈 남작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때 라우돈 남작은 적이 란데스후트를 비운 것을 포착하고 별동대를 파견해 란데스후트를 함락시켰다.
6월 11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푸케에게 6월 17일까지 란데스후트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당장은 병력이 부족했던 푸케는 넓은 평원에 진을 치고 병력을 모집했다. 라우돈 남작은 그런 적을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6월 23일까지 프로이센 진영에 접근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6월 23일 오전 1시 45분, 라우돈 남작은 공격 신호를 내렸고, 포병대는 포격을 개시했다. 라우돈 남작은 31,000명의 병력을 4개 대형으로 편성한 후 적을 향해 진군했다. 첫번째 대열은 라우돈 남작의 지휘하에 프로이센의 좌익을 향해 행진했고 두번째 대열은 뭄멜베르크 공략 임무를 맡았다. 또한 세번째 대열은 부크버그를 공격했으며 네번째 대열은 블라스도르프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의 측면과 후방으로 나아가 적을 섬멸하려 했다. 한편 푸케는 이에 맞서고자 군대를 소집했지만 많은 병사가 탈영해서 겨우 10,680명의 병력만 확보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4개 대열 중 가장 먼저 적과 맞붙은 부대는 라우돈 남작이 이끄는 첫번째 대열이었다. 그들은 뭄멜베르크의 좌측면을 방어하는 프로이센군 대대를 몰아냈고 뒤이어 적의 후방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번째 대열이 모젤의 보병대와 격돌해 쉽게 압도하고 뭄멜베르크를 점령했다. 한편 부크버그를 수비하던 프로이센 2개 보병대대는 적과 교전하자마자 도주했다. 푸케 장군이 1개 대대를 파견해 구원하려 했으나 프로이센 좌익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휘관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거듭된 패배로 사기가 저하될 대로 저하된 프로이센군 척탄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푸케는 어떻게든 아군을 최대한 보전하기 위해 1500명의 기병대를 파견해 오스트리아군의 추격을 저지하려 애섰다.
한편, 우익의 프로이센 부대는 오스트리아 제4대열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좌익과는 달리 쉽게 허물어지지 않고 격렬한 방어전을 벌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끝내 그들을 물리치고 블라스도르프의 고지를 점령했다. 이에 스헨켄도르프 장군은 프로이센 우익 병력을 수습해 갈겐베르그에 집결한 후 재차 반격을 단행, 오스트리아군을 다시 몰아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이 1개 보병여단과 좌익의 모든 기병대를 파견해 슈미드베르그로 가는 길을 점령해 프로이센군의 마지막 퇴로를 끊어버리면서 프로이센군은 압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에 푸케는 3개 후사르 기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격퇴하게 했다.
라우돈 남작은 아군이 적을 효과적으로 밀어붙이고 있긴 하지만 적군이 여전히 갈겐베르크와 키르흐베르크의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한 완전히 제압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라우돈은 우익의 기병대를 파견해 보베르의 좌측 둔지로 이동시켰고 키르흐베르크의 맞은편에 있는 지글베르크 언덕에 야전포대를 패치했고 보병 2개 대열을 근처에 배치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1대열이 란데스후트로 진군했고, 두번째 대열은 지데르 마을로 행진하여 키르흐베르크에 주둔한 프로이센군을 전면에서 공격했다.
이윽고 오스트리아군은 수적인 우세를 앞세워 란데스후트 마을을 지나 키르히베르크의 적을 몰아붙였다. 키르히베르크는 사실상 포위되었으나 프로이센 대대는 그곳을 용케 빠져나와 갈겐베르크로 후퇴했다. 푸케는 이제 갈겐베르크에서 항복하던가 오스트리아군을 뚫고 나가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그는 스헨켄도르프 장군에게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그의 지시를 가지고 가던 장교는 도중에 전사했다. 그러자 푸케는 아들에게 같은 지령을 가지고 스헨켄도르프에게 가게 한뒤 자신은 2개 대대의 선두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푸케가 레퍼스도르프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모든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발견했다. 그 후 그는 보병 대대에게 방진을 치게 한 뒤 총검돌격을 감행해 오스트리아 기병대와 격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곧 전열을 재정비한 뒤 추격해왔고, 푸케는 말이 총탄에 맞아 죽고 적에게 찔려 세번이나 부상당했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 척탄병 대대들이 속속 도착해 적을 웨워샀고, 프로이센군은 격렬한 저항을 벌였지만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결국 푸케는 항복했고 푸케를 따라갔던 보병대들은 궤멸했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프로이센군의 숫자는 겨우 1,500명에 불과했다. 이후 오전 8시,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시신 수습 작업에 착수했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란데스후트 전투에서 27명의 장교와 1,9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8,315명의 포로, 67개의 대포, 34개의 깃발을 상실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774명 사망, 2144명 부상, 실종 또는 포로가 발생했다. 실레시아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라우돈 남작은 여세를 몰아 7월 24일에 글라츠를 함락시켰다. 이제 슐리지엔이 위협받게 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슐레지엔의 구원에 나섰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과 라우돈 남작은 리그니츠 전투를 치른다.
[1] 대신 그는 작센에 고립된 14,000명의 프로이센군을 막센 전투에서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