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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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리비우스 세베루스
'''휘'''
플라비우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세펜티우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Libius Severus Serpentius Augustus)
'''생몰년도'''
? ~ 465년
'''재위기간'''
461년 11월 19일 ~ 465년 8월 15일
1. 개요
1.1. 생애
1.2. 초기 경력
1.3.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
1.4. 사망


1. 개요


서로마 제국의 황제. 461년 11월 마요리아누스 황제를 살해한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 의해 옹립되어 4년간 통치했으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동로마 제국, 서고트 왕국, 반달 왕국, 프랑크 왕국 등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1.1. 생애



1.2. 초기 경력


세베루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원로원 의원이 되기 전까지 어떤 경력을 쌓았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몇 문헌에 따르면, 세베루스는 독실한 기독교도이며 성격이 원만해 정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1.3.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


461년 8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는 북아프리카 원정에 실패한 후 반달족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환하던 마요리아누스를 전격 체포해 폐위시킨 후 처형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의 양 부모 모두 명백한 야민족 출신인 데다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라서 정통파 신봉자들이 대부분인 로마에서 황제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강대한 세력을 갖추고 있던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는 자신과 연관이 있는 올리브리우스를 새 황제로 지명하라고 요구했고 마요리아누스와 맺었던 평화 협정을 깨고 로마로 침공하려 했다. 이에 리키메르는 가이세리크에게 사절을 파견해 조약을 존중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가이세리크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로원 의원 세베루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세베루스는 461년 11월 19일 라벤나에서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에 대해 서로마 제국 주변의 국가들은 전부 인정하지 않았다.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는 물론이고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 트라키안도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고 갈리아의 로마군 지휘관 아이기디우스 역시 복종을 거부했으며, 일리리쿰을 지배하고 있던 마르셀리누스도 세베루스를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베루스의 통치를 따르는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되었다.
세베루스는 아이기디우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추종자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로 파견하여 아이기디우스의 권력을 대체하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마요리아누스의 통치 시기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가 리키메르에게 사면된 적이 있었다. 아그리피누스는 이 인연으로 리키메르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그의 의향에 따라 고트족과 연합해 아이기디우스를 공격했다.
한편, 세베루스는 마르셀리누스가 언제라도 일리리쿰에서 출격해 이탈리아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해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레오 1세는 비록 그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마르셀리누스를 설득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지 않게 했다. 세베루스는 그 보답으로 464년과 465년에 동로마 제국에서 지정한 인사를 집정관으로 선출시켰다.

1.4. 사망


465년 8월 15일, 세베루스는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분명하지 않다. 일부 사료에서는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고 하고 일부 사료에서는 자연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