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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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마요리아누스
'''휘'''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
(Flavius Julius Valerius Majorianus)
'''생몰년도'''
? ~ 461년
'''재위기간'''
457년 4월 1일 ~ 461년 8월 2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황제에 즉위하다
2.3. 황제 마요리아누스
2.3.1. 남부 갈리아 수복
2.3.2. 히스파니아 정벌
2.3.3. 내정
2.4. 반달 왕국과의 전쟁과 최후
3. 기타


1. 개요


서로마 제국의 황제. 서로마 제국 말기 황제들 중 가장 유능한 인물. 457년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옹립된 후 남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평정해 서고트 왕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내정을 잘 닦아 멸망 직전까지 몰리던 서로마 제국이 소생할 길을 열었다. 그러나 461년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공격하려고 함대를 준비했다가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함대의 습격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후 리키메르에게 폐위된 뒤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마요리아누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역사학계는 420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의 같은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는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기병대장이었고 일리리아 주둔군의 총사령관으로서 379년 시르미움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라는 이름은 대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영광스러운 명칭으로 각광받았다. 마요리아누스 역시 할아버지처럼 군대에 입대해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하로서 갈리아에서 복무했다. 이때 그는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친구가 되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여러 게르만족과 맞서 싸웠고 훈족과의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몇몇 사료에 따르면 450년 무렵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그의 딸인 플라다키아와 마요리아누스와의 결혼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요리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후계자로서 그의 사후 곧바로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이를 반대했고 자신의 아들과 플라다키아를 결혼시키려 했다. 결국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로부터 군문에서 쫓겨나 고향에 은거했다.

2.2. 황제에 즉위하다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손으로 아에티우스를 살해했다. 그는 아에티우스를 따르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아에티우스에게 축출되었던 마요리아누스를 다시 군대에 복무시켰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 2명에게 살해되었다. 마요리아누스는 왕위 계승을 놓고 페트로니우스와 경합을 벌였지만 페트로니우스에게 뇌물을 받은 원로원과 군대가 페트로니우스를 지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2달 후, 페트로니우스는 반달 왕국의 국왕 가이세르크가 로마에 쳐들어오자 이를 피하려고 도망치던 중 성난 군중들에게 붙들려 살해되었다. 이후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한 후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갈리아에서 황제로 추대된 아비투스가 455년 9월에 로마로 귀환하여 정식 황제로 등극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가이세리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민심을 잃었고, 결국 반달 해군을 격파해 민심을 얻은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에게 폐위되었다. 이때 마요리아누스가 친구의 쿠데타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일부 기록에는 그가 아비투스를 굶겨 죽이거나 목 메달아 죽였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후 리키메르는 친구 마요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정확히는 아비투스 사망후 1년 가까이 밍기적 거리며 새 황제를 뽑지 않는 리키메르에 원로원과 군대가 반발해서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알레마니 왕국에 대한 반격을 성공해 돌아오던 마요리아누스를 방패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 했고 자기가 황제가 될수도 없는 리키메르는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 동로마 황제 레오에게도 인정 받아 정식 서로마 황제로 올랐다

2.3. 황제 마요리아누스



2.3.1. 남부 갈리아 수복


458년 여름, 가이세리크의 처남이 이끄는 반달족 군대가 리리 강 또는 가릴리아노 강 하구에 상륙하여 캄파니아 일대를 약탈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그들을 공격해 가이세리크의 처남을 죽였으며 대부분의 반달족 또한 전사하고 일부 병력만이 북아프리카로 도주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모든 로마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소지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고 훈족, 수에비족, 고트족을 포함한 많은 야만족 출신 용병대를 모집해 군대의 역량을 강화했다. 또한 라벤나와 미세눔 항구에 함대를 재건했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리크 2세는 자신이 후원했던 아비투스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격노했다.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제국의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마요리아누스를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남부 갈리아로 진군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남부 갈리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테오도리크 2세는 마요리아누스와 새 조약을 맺어 그를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부르군트족을 격파하고 루그두눔을 점령했다.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도시들은 무거운 벌금을 내야 했고 사로잡힌 부르군트족 전사들은 로마군에게 강제로 편입되었다. 갈리아계 로마 귀족들은 아비투스의 편을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마요리아누스는 그들을 처벌하기보다는 화해를 원했다. 아비투스의 사위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황제를 기리는 찬양문을 반포했고 그 덕분에 측근이 되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는 루그두눔 시민들의 요청을 받은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따라 벌금을 감면해줬다.

2.3.2. 히스파니아 정벌


459년, 마요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치 장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을 격파하게했다. 두 장군은 루쿠스 아우구스티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스칼라비스를 점령했다. 그 동안 마요리아누스는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갔다. 이리하여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서고트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2.3.3. 내정


458년 3월 11일, 마요리아누스는 토지 소유자의 모든 세금 체납을 재심사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은 세금을 빼돌린 전적이 있는 공직자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명백히 금지했고 오로지 총독에게만 맡겨졌다. 그해 9월 4일, 마요리아누스는 또 다른 법률을 발표해 지방 법관들에게 스스로 모은 세금의 일부를 빼돌림으로서 황실의 재산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경고했다. 또한 마요리아누스는 지방 판결제도를 개선했고 시민들에게 과도한 학대나 재산 몰수를 강요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마요리아누스는 종교 방면에서도 손을 댔다. 당시 몇몇 부유한 가정에서는 딸이 순결을 맹세하고 결혼하지 않음으로서 자신들의 재산이 지참금으로 쓰이지 않게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이러한 풍습이 인구를 감소시키고 소녀들에게 평생 독신을 강요하는 등 국가에 해롭다고 생각했다. 이에 458년 10월 26일 순결 서약에 관한 법령을 공표했는데, 그 내용은 최소 40세가 넘은 처녀만이 순결을 맹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마요리아누스는 지참금과 혼인 전 선물 교환을 요구하는 관습을 금지시킴으로서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를 바꾸려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로마 귀족들을 포섭하는 데도 힘을 기울었다. 그는 전임 황제 아비투스가 몰락한 원인은 로마 귀족들을 무시하고 갈리아계 귀족들을 중용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460년부터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귀족들을 요직에 임명했다. 또한 그는 원로원 의원이 고발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고 실제로 이를 지켰다. 또한 마요리아누스는 공공 건물에서 대리석 등 자재를 빼돌리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이를 어긴 이들의 양손을 절단하는 형벌을 내렸다.

2.4. 반달 왕국과의 전쟁과 최후


461년, 마요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수복하기 위해 해군을 카르타고노바로 집결시켰다. 그런데 내부의 배신자들이 이 사실을 반달 왕국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알려줬다. 이에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화공으로 서로마 함대를 괴멸시켰다. 결국 원정을 단념한 마요리아누스는 이탈리아로 쓸쓸히 귀환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입지를 다지고 있던 마요리아누스에게 불안과 불만을 동시에 느꼈던 권신 리키메르는 북아프리카 원정이 실패로 끝난 틈을 타 친구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8월 2일, 리키메르는 토르토나 인근에서 마요리아누스를 체포했다. 마요리아누스는 그의 자의와 황관을 빼앗기고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5일 후, 마요리아누스는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이리아 강에 내던져졌다. 그후 리키메르는 3개월간 뜸을 들이다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3. 기타


토탈 워: 아틸라의 역사적 전투에 포함된 카르타헤나(461년)에서 플레이어는 반달족을 지휘해서 마요리아누스가 만든 서로마 함대를 격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