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턴 무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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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
3.2. 의회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4년 7월 2일 요크 시에서 6마일 떨어진 마스틴 무어에서 국왕군과 의회군이 격돌한 전투. 의회군은 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둬 영국 북부 일대의 지배권을 획득했고, 그때까지 팽팽하게 이어지던 내전의 전황은 의회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이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잉글랜드 내전 초기, 의복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랭커셔와 요크셔의 일부 도시들을 제외한 잉글랜드 북부 일대에서는 왕당파가 우위를 점했다. 1943년 6월 30일, 뉴캐슬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는 이러한 우세에 힘입어 브래드포드 근처의 아드왈튼 무어 전투에서 페어팩스 경이 지휘하는 의회군을 격파했다. 이에 페어팩스 경은 그의 아들 토마스 페어팩스와 함께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헐 항구로 도망쳤다. 뉴캐슬 공작은 그의 군대 중 일부를 랭커셔로 남하시키고 대부분의 병력으로 헐 항구를 포위했다. 하지만 의회를 지지한 해군이 헐 항구에 보급물자를 전달해준데다 헐 항구를 포위한 아군을 지원하러 이동하던 왕당파 군대가 개인즈버러 전투와 윈스비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합류하지 못하면서, 뉴캐슬 공작의 헐 항구 포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든 스코틀랜드 반란군과 동맹을 체결해 왕당파가 강성한 잉글랜드 북부 일대를 공략하게 했다. 이에 1644년 초, 레븐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잉글랜드 북부에 진입했다. 그러자 뉴캐슬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분할하여 존 벨라시스 경 휘하의 분견대를 남겨 헐 항구를 봉쇄하게 하는 한편 본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해 레븐 백작과 대치했다. 1644년 3월과 4월 초, 뉴캐슬 공작은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타이네 강을 건너 뉴캐슬 시를 포위하지 못하도록 지연 작전을 몇차례 수행했다.
그런데 4월 11일 페어팩스 경이 공세를 개시하여 존 벨라시스 경과 그의 병력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경악한 뉴캐슬 공작은 요크가 위험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요크는 잉글랜드 북부의 왕당파의 중심지였기에 요크를 잃는 것은 왕당파의 대의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그는 즉시 요크로 달려가서 그곳을 지키려 했다. 이에 레븐 백작은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뉴캐슬을 공격하게 한뒤,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뉴캐슬 공작을 추격해 4월 22일 웨더비에서 패어팩스 경의 의회군과 합류했다. 이후 그들은 요크를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다.
옥스퍼드에서 요크가 함락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접한 찰스 1세는 그의 조카 루퍼트 왕자에게 요크를 구원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루퍼트는 5월 16일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슈루즈버리에서 출발해 요크로 진군하면서 증원군을 징집했다. 그러던 중 볼튼 시민들이 군대 모집에 저항하자, 그는 국왕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시민 1600명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그렇게 병력을 모집하면서 요크로 진군한 그는 뉴캐슬 공작의 소속이었다가 요크 포위 초반에 빠져나온 조지 고링 경 휘하의 기병대, 더비셔의 작은 부대, 그리고 랭커셔에서 갓 징집된 신병들과 합류했다. 루퍼트는 6월 6일 의회의 거점인 맨체스터를 지나 리버풀에 접근하여 5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를 장악했다.
그 후 그는 요크를 구하러 갈 지, 아니면 랭커셔에서의 왕당파의 지배를 공고히하기 위해 남을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찰스 1세 주위의 전쟁 평의회 인사들을 불신했고 자신이 왕에게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의 우려는 들어맞았다. 전쟁 평의회 인사들은 루퍼트 자신이 멀리 가 있는 동안 옥스퍼드에서 수비에 전념한다는 그의 정책을 뒤집고 레딩과 아빙돈 공략에 군대를 투입시켰다. 그러자 에섹스 백작과 윌리엄 뮐러 경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기회를 포착하고 옥스퍼드로 진군했다. 이에 찰스 1세는 서둘러 옥스퍼드를 떠나 우스터로 향했다. 그리고는 루퍼트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있었다.
"만약 요크가 버틸 수 있고 네가 두 왕국의 반란군을 물리친다면, 짐은 아마도 네가 짐을 도울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짐이 네게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너는 즉시 네 처음 의도에 따라 요크 구원에 전력을 다하거라."
루퍼트는 국왕이 먼저 요크를 구원하고 스코틀랜드-의회 연합군을 격파한 뒤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이에 루퍼트는 1만 4천여 군대를 이끌고 요크로 진군했다. 한편 요크를 포위하고 잇던 연합군은 루퍼트가 북상하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페어팩스 경은 요크 주변이 강에 의해 분리되어있어서 루퍼트의 공격에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들은 6월 30일 밤에 포위망을 거두고 헤세이 마을 근처에 병력을 집결시킨 뒤 마스턴 무어로 진군해 루퍼트와 일전을 벌이기로 했다.
7월 1일, 루퍼트가 파견한 기병대가 요크에 당도해 루퍼트의 군대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고 알렸다. 이에 뉴캐슬 경은 루퍼트 왕자에게 사람을 보내 감사를 표했지만, 루퍼트는 이에 응하지 않고 조지 고링 경을 통해 자신이 다음날 아침 적과 일전을 벌일 예정이니 요크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뉴캐슬 공작은 적군이 포위 기간 동안 요크의 성문을 막기 위해 쌓았던 흙더미들과 시신들을 치우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즉시 합류하지 않았고, 뉴캐슬 공작의 병사들 역시 오랫동안 지연된 봉급을 주지 않는다면 더이상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며 뻣댔다. 결국 루퍼트는 요크의 군대가 올 때까지 장시간 기다려야 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북부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가 개막했다.

3. 양측의 전력



3.1. 국왕군


  • 총사령관: 라인란트의 루퍼트 왕자[1]
  • 부사령관: 뉴캐슬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
  • 병력
1) 루퍼트 직속 병력: 보병 9,000명, 기병 5,000명
2) 윌리엄 캐번디시 직속 병력: 4,000명
3) 대포: 20문

3.2. 의회군


  • 총사령관: 페어팩스 경
  • 스코틀랜드 반란군 지휘관: 레븐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
  • 부관: 올리버 크롬웰
  • 병력
1) 페어팩스 직속 병력: 5,000명 + 후속부대 6,000명(맨체스터 공작 에드워드 몬타구 지휘)
2) 스코틀랜드 반란군 병력: 보병 11,000명, 기병 2,000명, 용기병 500명 대포 50문

4. 전투 경과


1644년 7월 2일, 루퍼트 왕자의 군대는 마스턴 무어로 진군했다. 이에 의회군과 스코틀랜드 반란군은 마스턴 무어에 군대를 편성해 적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롱 마스턴과 토크워드 로드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평행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전열을 배치했다. 이에 대해 루퍼트의 군대는 맞은 편 능선에 진지를 세웠다. 국왕군의 위치 앞에는 울타리가 받쳐진 긴 도랑이 형성되어 있었다. 루퍼트는 국왕군 좌익에 조지 고링 경이 이끄는 2,100명의 기병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보병대는 윌리엄 블레키스톤 경의 기병 여단과 함께 군 중앙에 세개의 대열로 배치했으며, 바이런 경이 지위하는 2천 명의 기병대를 우익에 배치했다. 그리고 루퍼트 본인은 후방의 예비 기병대를 지휘했다. 이에 맞서는 의회군-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좌익에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 기병연대와 데이비드 레슬리 소장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기병 연대를 배치하고 중앙에 세개의 대열을 형성한 보병대를 배치했으며, 우익에 토머스 페어팩스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배치했다.
군대 배치를 완료한 루퍼트는 전투를 개시하려 했지만 요크 수비대가 저녁 늦게서야 도착해 제때에 공세를 개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지자, 루퍼트는 이틈을 타 적군을 야습하려 했다. 이때 에이틴 경 제임스 킹이 지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적을 공격할 수 있겠냐며 내일 전투를 시작하자고 건의했다. 루퍼트는 자신의 뜻을 고집했지만 비가 소나기로 변하자 제임스 킹이 "보십시오. 주님께서 전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주장하고 그의 상관인 뉴캐슬 공작도 동의하자, 루퍼트는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혔고, 그의 군대는 인근 계곡에 진영을 차렸다. 반면, 페어팩스 경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시점에서 적의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라고 판단해 그의 부하들에게 적진을 야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후 7시경, 의회군과 스코틀랜드 반란군 좌익 부대는 국왕군을 공격하기 위해 경사면을 따라 전진했다. 그들이 도랑에 이르렀을 때, 국왕군 포병대가 적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크롬웰이 이끄는 기병 60명이 재빨리 도랑을 건너 돌진해 적 포병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후 연합군 좌익 부대는 적의 우익을 강습해 큰 타격을 입혔다. 반면 연합군 우익은 도랑을 어렵게 건너 적에게 접근했다가 조지 고링 경이 이끄는 기병대의 거센 반격에 직면했다.
얼마 후, 토머스 페어팩스가 지휘하는 연합군 중앙 보병대는 적의 중앙 보병대와 격돌했다. 그러던 중 그의 부관 램버트가 조지 고링 경이 이끄는 국왕군 기병대에 의해 아군의 우익이 곤경에 처했다고 보고했다. 그의 의회군 장교들 중 많은 수가 전장에서 도망쳤고 페어팩스의 동생인 찰스 페어팩스 대령은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에 페어팩스는 우익 제3선에 배치된 스코트랜드 연대를 투입시켰고, 고링은 이들의 반격에 직면해 하동안 격전을 벌였다. 한편 올리버 크롬웰은 국왕군 우익 사령관 바리언 경과 맞붙었다가 팔에 부상을 입었지만 바이런과 그의 부하들을 전장에서 멀리 쫓아냈다.
이 무렵, 루퍼트는 언덕 위에 올라가 전장을 살피고는 국왕군 좌익이 이기고 있고 중앙은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으나 우익은 궤멸되어버렸음을 확인했다. 이에 루퍼트는 예비 기병대를 이끌고 우익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해 결국 우익의 붕괴를 막을 길이 없게 되자, 루퍼트를 따르던 기병대 대부분이 탈주했다. 루퍼트는 요크 도로로 후퇴하는 국왕군을 규합하려고 동분서주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중앙에서는 양군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뉴캐슬 공작은 몸소 적의 기사 3명을 베어 죽이는 등 무용을 뽐냈고, 연합군은 국왕군의 맹렬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편, 크롬웰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왔다. 이때 페어팩스 경이 그에게 당장 우익으로 달려가서 조지 고링의 기병대를 쳐부수라고 명령했다. 이에 크롬웰은 팔을 붕대로 동여맨 채 부하들과 함께 우익으로 달려가 조지 고링의 기병대를 습격했다. 이후 몇차례의 접전이 벌어진 끝에 크롬웰이 승리를 거두었다. 고링은 요크로 패주했고 연합군 우익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좌익과 우익 모두 패주하자, 중앙의 국왕군 보병대는 동요하여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붕괴되어 요크로 패주했다. 이리하여 의회군-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저녁 9시 무렵에 승리를 쟁취했다.

5. 결과


마스턴 무어 전투는 국왕군에게 참담한 타격을 입혔다. 그들은 300명의 적병을 죽이는 동안 4,000명의 전사자, 1,500명의 포로를 잃어버렸고 대포 14문을 잃었다. 그후 루퍼트와 뉴캐슬 공작은 영국 북부에 더 이상 있어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합류하기 위해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남하했다. 그 후 잉글랜드 북부는 얼마 안가 의회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또한 올리버 크롬웰은 이 전투에서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무릅쓰고 우익의 적 기병대를 격파한 뒤 위기에 빠진 아군 우익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 적 좌익 기병대 마저 격퇴하는 대활약을 선보인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따르기를 희망했다. 이후 크롬웰은 자신을 따르기로 맹세한 이들을 모아 '철기대'를 결성하고 잉글랜드 내전에서 대활약한다.
[1] 찰스 1세의 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