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이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부친'''
로버트 크롬웰
'''모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자녀'''
로버트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 2세
브리짓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헨리 크롬웰
엘리자베스 크롬웰
메리 크롬웰
프랜시스 크롬웰
'''생몰년'''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59년 4개월 9일)
'''재위기간'''
(호국경)
1653년 12월 25일 ~ 1658년 9월 3일(4년 9개월 22일)
'''서명'''
[image]
1. 개요
3. 왕의 목을 자르다
4. 아일랜드 진압[1]
5. 스코틀랜드 침공
6. 종신 호국경 취임 및 군사독재
7. 사후
8. 군사적 능력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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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크롬웰 문장
17세기 잉글랜드군인정치가.
젠트리 계급 지주 출신으로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스스로 종신 호국경이 되어 독재정치를 펼쳐 영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이후 이 되려 하였으나 군대의 반대로 지연되어 정치적 협상을 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결국 죽기 전에 아들 리처드 크롬웰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사후 아들이 호국경 자리를 세습했다.
토머스 크롬웰의 먼 친척이다.[2]

2. 잉글랜드 내전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가 충돌,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철기군(Ironside)를 조직하여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내전 초반 왕당파에 군사적으로 밀리던 의회파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크롬웰은 철기군을 중심으로 신형군(New Model Army)을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648년 스코틀랜드군 9천 명이 찰스 1세의 복위를 외치며 잉글랜드 북부를 심하게 약탈하자 병력 8600명을 이끌고 북상해 프레스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섬멸했다.

3. 왕의 목을 자르다


의외지만 찰스 1세와는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사로잡히고 나서도 크롬웰이 깍듯이 예우 했으며, 찰스 1세는 군대가 의회보다 자신에 우호적이라 여길정도로 착각하며 재기를 꿈 꿀정도였고, 말이 포로지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찰스 1세의 편지보관함 궤짝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변하는데 '크롬웰을 비롯한 의회파들에게 사로잡혀서 좋은 말로 속이고 있고, 추후에 남김없이 모가지를 칠것'이라고 으스대는 내용의 찰스 1세가 왕비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크롬웰은 국왕 처형에 찬성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이후 국왕과 협상하려는 장로파에 맞서 국왕을 극형에 처하자는 독립파의 수장이 되었으며, 결국 장로파를 몰아내고 결국 찰스 1세 처형의 주동자 중 하나가 된다.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크롬웰과 그가 이끄는 독립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부인 '잉글랜드 연방 혹은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3]

4. 아일랜드 진압[4]


1649년 잉글랜드 대내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크롬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잉글랜드가 내전으로 정신없을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통제불능이었던 아일랜드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는 것이었다. 찰스 1세 시절 잉글랜드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4천~2만의 잉글랜드인들을 살해하거나 쫓아내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기 때문.[5] 게다가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돈인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귀금속을 담보삼아 사채를 빌리고 이 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하여 1만 병력을, 또 아일랜드에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꼬드기며 1만 병력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내전이 끝나고 나서 아일랜드 토벌군을 모집하여 파견하려 하자 그동안 전쟁에 지친 병력들이 파병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의회 대다수는 시골지주, 교수, 상공인 같은 무리들이었고 내전 기간 피를 본 군대가 이들 명을 받을 리가 없었다. 결국 군대를 이끌고 공을 세운 크롬웰이 나서서 항명을 일으킨 병력들 가운데 주모자 몇 명을 처형했고 도망간 탈영 부대들을 추격하여 이들이 숨은 마을에 가차없이 포격을 하여 진압했으며, 잡힌 반란군 400명을 총살시켜 버렸다. 이렇게 가차없이 폭동을 막은 공로로 이 과정에서 크롬웰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반란 병력을 막고 나서 역시 군대를 스스로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하는데 처음엔 농민과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사태가 여의치 않자 익히 알려진 것처럼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정없이 초토화시키고 살인과 방화, 약탈을 동반하여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들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던 20~30만 가량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아일랜드에서 크롬웰은 여전히 악의 축으로 취급받는다.[6]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이 바로 드로이다(Drogheda[7]) 공성전으로, 1649년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 함락이 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 남녀노소 2000명을, 그것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소설 및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언급된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아버지이자 아일랜드 출신인 제럴드 오하라[8]는 이 드로이다 학살 당시를 스칼렛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200년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남북 전쟁(1861-1865)이 배경이다) 이게 트라우마가 된 스칼렛은 애틀란타 포위전 당시 레트 버틀러에게 셔먼 장군이 크롬웰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며 두려워한다. 그러자 레트는 "셔먼은 크롬웰하고는 달라요"라고 안심시킨다.[9] 이렇듯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크롬웰이 자행한 폭력은 아일랜드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뿌리 깊은 트라우마를 안겼다.
이는 단순히 크롬웰의 잔혹함으로 끝나지 않고 아일랜드의 이후 역사를 바꿔버렸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진압 정책의 핵심이, 아일랜드 정복 이후로도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힘을 아예 기반부터 절멸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 및 재분배 정책'이었다. 계획적으로 크롬웰의 병사들은 씨앗 한 톨, 돼지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처절하게 불지른 다음,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알토란 같은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처절하게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아일랜드의 기형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는 이렇게 크롬웰의 초토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아일랜드가 크롬웰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2008년에 일어났는데, 아일랜드 총리였던 버티 아헌이 영국 고관대작 한 명을 만나 회담을 하던 중 회담 장소에 '크롬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걸 보자 외교적 결례도 무릅쓰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박차고 나온 일이 있었다.

5. 스코틀랜드 침공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1650년, 찰스 왕세자를 데려와서 국왕 찰스 2세로 추대하자, 크롬웰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1650년 7월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런데 이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군연합이었고, 국왕이 같은 사람일 뿐 별개의 나라였다. 그런데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왕이기도 한 찰스 1세를 죽여버렸고, 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1세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인 찰스 2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크롬웰이 이것을 시비걸고 넘어져 침략해온 것은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명백한 내정간섭 행위이자 명분 없는 침략행위였다.
잉글랜드 내전의 승리에 도취한 크롬웰은 호기롭게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스코틀랜드군이 전면전을 회피하고 청야전술로 괴롭히자, 크롬웰은 결국 많은 병사들을 질병과 굶주림으로 잃은 채 잉글랜드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던바 남쪽에 주둔한 스코틀랜드군이 퇴로를 가로막자, 그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이후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크롬웰은 100명의 손실만 입은 채 적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크롬웰은 본국으로 돌아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651년 9월 잉글랜드로 쳐들어온 스코틀랜드군을 우스터 전투에서 괴멸시키고 왕당파 세력을 전부 일소시켰다.

6. 종신 호국경 취임 및 군사독재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중상시민, 젠트리 층의 권익을 위해 중상주의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1651년에 항해조례(=항해법)를 반포하여 네덜란드 중계무역상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일어난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제1차 영란전쟁)에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면서 네덜란드 유일의 패권체제에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제해권과 식민지 개척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653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상원 의사당을 폐지한 후 남아있는 의원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단 기존 의회의 대다수는 청교도들이긴 한데, 다수파는 장로회였지만 크롬웰 그의 군대는 소수파에 속하는 독립파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고, 크롬웰이 찰스 1세가 마지막 저항 시도를 했던 스코틀랜드와 의회 장로회가 연관되었다고 약간의 조작과 진상조사 없이 그 구실을 핑계로 장로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화정이라는 정부가 수립 직후 한 첫 번째 일이 의회 해산(...). 그는 존 램버르트와 함께 영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는데, 전 유럽에서 헌법 작성은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본인이 갈아엎고 군사독재를 시작해버린다(...). 평등한 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 그 외 가톨릭, 왕당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청교도 법령을 반포하는 등 군사독재권력을 휘둘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시킨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강제 병합하고 국가원수 '호국경(Lord Protector)'에 취임했다.'''[10] 호국경의 정식 명칭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연방 호국경(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었다. 영국 역사의 유일한 성문법이자 헌법인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이 제정되었는데, 최고 통치권과 정부권을 호국경에게 위임하는 것을 규정했다. 이는 의회가 아닌 장로교회의 아이디어였다.
의회를 해산시킨 크롬웰은 자신이 지명한 인원들로 새로운 의회인 배어본스 의회(Barebones Parliament)를 만들었으나 이마저도 반 년 후에 폐지시켰다.
하지만 국내 사정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 이유는 엄격한 청교도법령에 입각한 강력한 군사독재 정치 때문. 크롬웰과 청교도들은 그 '청교도 도덕성' 곧 엄격한 도덕주의를 지키도록 할 법을 도입했는데, 극장이나 운동 경기나 춤 등 청교도 입장에서 죄악시될 수 있는 행동들을 폐지하는 것.[11] 심지어 대중음악마저도 금지해서 영국인들은 노래라고는 오로지 찬송가만 부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금지되어 의회가 매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크롬웰의 정치는 근본주의 성향에 가깝게 엄격하여 결국 민중들은 그나마 자유롭던 왕정 시대를 그리워하게 됐다. 특히 찰스 1세가 사형당한 것에 대한 동정론이 일면서 왕을 사형시킨 건 잘못이라는 여론까지 생겼다.[12] 이 때문에 왕당파의 복귀를 두려워한 젠트리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크롬웰은 1654년 배어본스 의회를 해산시키고 군부독재 하에서 '''종신 호국경'''이 되었다.
독실한 청교도임에도 불구하고 '''1290년에'''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는데, 원래 크롬웰이 믿는 청교도가 속한 칼뱅파 급진주의 교단들은 이 때만 하더라도 공적인 스페인 중심의 가톨릭 절대주의를 막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해적들과도 협력하는 등, 기독교 외부 종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타종교에 대해 청교도가 관용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 그대로 당장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을 잡은 것.
크롬웰이 종신 호국경이 되자 의회에선 그를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는 젠트리 계급이 그를 왕위로 올리는 대신 의회가 군부를 재정적으로 통제하려고 하던 일환이었다. 크롬웰 본인도 왕이 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이는 그의 치세 후기의 주요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의 반대로 크롬웰이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일단 타협한다. 크롬웰은 왕이 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나 이전에 사망하고 만다. 결국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을 후임 호국경으로 지명하고 사망한다. 이는 크롬웰 체제가 사후 붕괴하는 원인이 된다.

7.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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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으로 재현한 크롬웰의 임종.
1658년 9월 3일 크롬웰은 독감으로 사망했고, 크롬웰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 자리를 승계받았으나, 조지 멍크 장군과 장로파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의회의 반 크롬웰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리처드를 축출하고 유럽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를 불러들여 그를 다시 왕으로 옹립, 왕정복고를 실행하자 크롬웰 세력은 간단하게 와해되어 몰락한다.
그리고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인 1661년 1월 30일에 복수심에 불타던 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체가 분해되는데, 머리를 베고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안 그래도 생전 크롬웰의 엄격한 정치에 등을 돌린 민중은 그의 시신에 욕설을 하고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등 한풀이를 했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자들이 줄줄이 교수형 당하는 것으로 짧은 영국 공화정은 막을 내린다.[13]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이나 귀족 또는 명사들이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엠버밍을 마친 후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14] 이 방부처리가 아주 잘 되어 있어 이후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 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크롬웰의 머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그의 잘린 머리는 한동안 시가지에 효수되었다가 실종되었다. 이후 그의 머리를 지키던 경비병의 가족들이 경비병이 죽은 후 크롬웰의 머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인 수집가에게 팔아버렸고 프랑스로 건너간 후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어 가며 훈제 당하거나 창에 꿰어져 전국을 순방하며 효수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창에 있던 좀벌레가 머리로 옮겨져 턱엔 구멍이 생기고, 그 유명한 코도 폭삭 주저앉았다. 결국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그의 머리는 자그마치 300년이나 세상을 떠돌다가 1960년에서야 다시 모국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 곁에[15] 묻혔다. 그러나 실제 웨스트민스터 사원 관리인의 이야기로는 크롬웰의 머리가 효수되었다가 폭풍이 불던 어느 날 바닥에 떨어졌고 그것을 경비병이 주워서 자기 집에 계속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에 그 경비병의 후손들이 크롬웰의 머리를 그의 모교에 돌려주어 정원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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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크롬웰의 관이 안장되었던 자리. 현재는 공석이다.
웨스트민스터 궁 옆에 세워진 크롬웰의 동상.
짧은 통치 기간이었지만 군사적인 연전 연승과 국왕을 처형하는 독단적 태도와 그리고 통치 시기의 무자비함 때문에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는 민간 신앙 이상의 레벨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의 전설들은 아니었는데, 그 예들을 보자면 17세기 후반에는 강력한 폭풍을 '크롬웰 폭풍'이라 부르기도 하고, 크롬웰의 정체가 흑마술사 또는 주술사로써 악마를 부렸다거나 초자연적인 검은 개를 끌고 다녔다던가 하는 전설들이 만들어졌다.

8. 군사적 능력


기라성 같은 무장이나 명장들이 나타나고 사라져간 유럽의 전쟁사에서 크롬웰의 능력은 크게 부각될 게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꽤 기묘한 전력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40세 이전까지 거의 시골 소지주나 기껏해야 하원 의원으로 머물렀던 인물이, 어느 날 갑툭튀해서 나라를 평정해버렸으니 말이다.
당시에 왕당파 세력이, 크롬웰이 몸담던 의회 세력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모집할 수 있었던 기병 전력의 수나 병력의 응집력 면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딱히 병력의 질이나 전술, 전략적인 면에서 우위에 섰던 건 아니었고, 민병 위주로 구성된 의회군의 경우 일종의 향토예비군 성격이 강해서 자신들의 구역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에 운용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요약하자면 왕당파는 숫자만 많은데, 그나마도 병력활용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고, 여기서 크롬웰이 잘한 것은 지극히 기본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사실 백전노장의 전쟁경험자나 천재도 아닌데 기묘한 계책으로 상대방을 흔들 수 있었을리는 없다. 크롬웰은 기존의 약점을 충실히 보강하고 내실을 다져서 싸울 수 있는 '군대'를 길러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기병의 운용과 질이 전술의 키포인트임을 파악하고 이를 육성하는데 애쓴 것, 싸울 의욕이 없는 병사들에게 명분을 심어준 것[16], 그전까지 민병대 수준이었던 군대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정규군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 귀족이나, 서열상 연장자라는 이유로 장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전투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제대로 지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대체한 것이 크롬웰의 군사행동의 핵심이었다.
사실 이 '기본'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도 크지만 이걸 제대로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는 그보다 훨씬 크다. 이 기본을 이론상으로 아는 것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엄연한 차이가 있기도 하므로 이론만 안다고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이걸 문자 그대로 백면서생이 해냈으니 대단한 것이다. 물론 당시 여러가지 상황이나 배경이 이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병력이 이리저리 분산되어서 그렇지, 왕당파에 비해 의회파 군의 규모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왕당파군은 잘 훈련된 군사전문가라기 보다는 적지에 들어가면 약탈자로 돌변하는 폭도에 가까웠다. 내전 초기에는 의회군도 비슷했었다. 아니, 오히려 왕당파는 찰스 본인의 왕위를 통한 인맥으로 30년 전쟁의 전장에서 당시 현대적인 대륙의 대규모 전쟁에서 잔뼈가 굳은 용병들을 많이 고용할 수 있어 군사적인 인프라는 왕당파가 더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였던 크롬웰의 결벽증적인 성향과 체제를 정비하는 동안 매우 엄격해진 군율 등이 잘 맞아떨어져 이러한 폭도 성향은 줄어 들었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봉급 체계가 확실하게 잡혀 더 이상 민가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 병사들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이전에는 지역 유지들의 향토 방위군 수준에 불과했던 잉글랜드의 군대를 처음으로 유럽 대륙의 사례를 본 딴 정규군으로 진화시켰다. 즉, 크롬웰은 근세 유럽의 군대가 중세 시대의 개별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모집한 군벌 집단에서 국가의 획일적인 관리 하에 지휘 체계가 딱딱 편성된 현대적인 의미의 정규군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기여를 한 것이 군사사적 관점에서 그의 가장 큰 의의라 할 수 있다. 크롬웰 아래 새롭게 재편성된 의회군은 신식군(New Model Army)이라고 불리며 전원이 당시 가장 값 싸고 병사들의 부상도 숨겨주는 효과가 있었던 저질 싸구려 붉은 색 염료로 도색된 옷을 일괄적으로 입혀 최초로 현대적인 의미의 군복이 생기는 것에도 일조 했으며, 이는 왕정이 복고된 후대의 영국군에게도 계승되어 그 유명한 영국 레드코트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다.
그리고 크롬웰이 전공을 세워나가는 동안 내부에서 이렇다 할 큰 견제는 받지 않았던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 때문에 크롬웰은 자신이 직접 육성한 철기대(鐵騎隊)의 육성 커리큘럼을 의회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크롬웰의 지휘 능력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요에 따라 진형을 전환하거나 기병의 부무장으로 권총을 지급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유연성도 습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크롬웰의 군사적 업적은 직접적인 야전 사령관이 아니라 군제 개혁가로서의 업적이다. 야전에서 크롬웰은 본인의 철기대만 지휘하는 기껏해야 대대장 정도의 지휘만 했지, 전체적인 의회파 신식군의 야전 지휘관은 그의 친구였던 '흑색 톰' 토머스 페어펙스 경이었다. 야전 지휘관으로서 페어펙스는 내전기 영국의 아일랜드 가톨릭 연방군의 오웬 로 오닐, 스코틀랜드 왕당파의 몬트로즈 백작 제임스 그래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장으로서, 당시 영국에서[17] 대륙식의 대규모 회전과 병과의 합동 전술을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휘관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본인이 의회파의 수장이었을지 언정, 야전에서는 크롬웰도 페어펙스의 일개 부관에 불과했고,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와 이런 미묘한 위치에 있으면 무슨 식으로든 마찰이 생기기 마련인데 크롬웰은 현명한 처신으로 야전에서는 페어펙스에게 전권을 확실하게 밀어주어 항상 대귀족과 왕족 출신 지휘관들의 군공 다툼으로 지휘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왕당파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9. 기타


1차 영란전쟁 종전 당시 네덜란드측 대표였던 요한 드 비트에게 '오라녜 가문이 슈타트홀더 자리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평소 오라녜 가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드 비트는 이 제안을 얼른 받아들였는데, 실은 네덜란드 내의 국론을 분열시켜서 영국과 경쟁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요한 드 비트는 친 오라녜파 시민들에게 매국노처럼 각인되었고, 나중에 동생 코넬리우스와 함께 숙청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큰 코를 두고 별명이 많았는데 구리 코, 빛나는 코, 심지어는 '전능하신 코'도 있었다. 코 외에도 눈 위와 입술 아래에 큰 사마귀와 여드름이 있었다. 피터 렐리(Peter Lely)가 그린, 본 문서에도 있는 초상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피터 렐리는 초상화를 그릴 당시 이 사마귀와 여드름 자국을 지워서 당대의 관행대로 외모를 적당히 미화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은 미화하지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릴 것을 명했다. 그래서 초상화에서도 그대로 나온 것. 여기서 나온 영어 표현이 warts and all이다. wart는 사마귀란 뜻으로, 표현의 전체 뜻은 '있는 그대로 숨기지 않고'라는 의미이다. 비슷한 의미로 paint a person with his warts가 있는데, '~의 모습 그대로 그리다.'란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영국에 독일군이 상륙했다는 경보 암호가 '크롬웰'이었고, 그의 이름을 딴 순항전차 크롬웰도 만들어졌다.
어쨌든 크롬웰이 당시 제해권을 가졌던 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이면서 훗날 영국이 해상제국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현대 영국인들이 뽑은 영국 역사상의 위인 중에서도 항상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다만 그 정치적 위치와 행적 때문에 해군의 함선에 이름이 붙지는 못했다.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든 간에 영국 왕실 입장에서 반역자라 '''왕립''' 해군인 영국 해군의 함선에 '반역자'의 이름이 붙는 건 어렵다. 윈스턴 처칠이 해군 장관에 재직하던 시절 각각 아이언 듀크급 전함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에 크롬웰의 이름을 붙이자는 제안을 올렸으나, 당시 왕실에서 이건 곤란하다며 강경하게 반대해서 처칠도 이를 취소해야 했다.
만화 헬싱 2권에서 아카드가 변신할 때의 "상황 A <크롬웰> 발동"이란 대사가 나오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암호와 크롬웰에 대한 민간 신앙적 두려움을 작가가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등장인물인 셰리 크롬웰의 성은 이 인물의 성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에 가보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왕의 목을 딴(...) 인물이기에 국왕과 대귀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역사적으로 반대해 온 영국 하원의 반골 기질과 필요하면 힘으로도 의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을 상징하는 의회의 수호 성인 비슷한 존재로 대접받아 세워졌다. 현재도 영국에서는 소수 의견이지만 항상 존재해 왔던 영국 공화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고 있는데, 내력을 보면 오히려 의회의 견제 때문에 한번도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권위와 권력을 누려본 적 없이 항상 분리된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게 전통이었던 잉글랜드의 왕들에 비해 훨씬 더 현대적인 의미의 독재자에 가까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뭔가 미묘한 점이 많다.
올리버 크롬웰 동상
성 마가렛 교회 찰스 1세 흉상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맞은 편 건물 세인트 마가렛 교회 벽에는 찰스 1세의 흉상이 걸려있다.구글 스트리트 뷰 이를 가리켜 서로가 서로의 숙적을 바라보고 있는 묘한 배치라고들 한다.[18]
화가가 그의 얼굴을 그릴 때 왜곡하여 잘 생기게 그릴까봐, "내 얼굴을 본 모습 그대로 그리지 않으면, 아니 종기 1개라도 빼먹고 그리면 돈 1푼도 안준다"고 한 바 있다고 한다. 이렇듯 정직이라는 청교도적 가치엔 꽤나 충실했던 인간이었다.
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로 등장하고[19] 오비완을 연기한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로 등장한 사극 영화 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제목처럼 주인공이다. 영국과 미국 합작에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 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헌데 찰스 1세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 때 왕자인 찰스 2세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찰스 1세를 사형장으로 보내고 홀로 왕좌같은 자리에 앉은 모습으로 나오며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영화평은 그냥저냥 범작 수준의 사극으로 평가되며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 도싯 주 도체스터 인근의 언덕그림(hill figure)인 루드 맨의 정체가 이 인물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조선 말기의 선교사이자 조선사를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을 이 인물에 비유하였다.
신해철의 가명 중 하나인 크롬이 이 인물에게서 따왔다. 영국에서 작업하던 시기에 다른 엔지니어들이 넌 크롬웰처럼 독한놈이라는 말을 하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 다만 아일랜드 정복을 시작한 것은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취임하기 전이다.[2] 토머스 크롬웰의 great-great-grandnephew[3] "Commonwealth and Free State"라고도 불렀다. 공화국이자 자유국. 혹은 연방 자유국 정도로 번역되는 이름. Commonwealth란 단어 자체는 영연방 등에서 사용된다.[4] 다만 아일랜드 정복을 시작한 것은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취임하기 전이다.[5] Modern historians estimate the number massacred in Ireland in 1641 at between 2,000 and 12,000." Marshal, John (2006). John Locke, Toleration and Early Enlightenment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65114-X, Page 58, footnote 10.[6] 2차 대전 당시 아일랜드는 반영 감정으로 영국이 독일에 폭격당해서 고소하다는 소리도 했지만, 전쟁 초기 벨파스트를 폭격하러 간 독일 폭격대가 구름 때문에 더블린을 불바다로 만들자 그런 소리는 쑥 들어갔다.[7] 원체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이 엉망이라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찾아본 결과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라고 읽는다고 한다. 굳이 한국어로 전사한다면 드라허다 혹은 드러더 정도. 한국에서는 '드로이다'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위키피디아도 드로이다로 연결된다.[8] 일단 오하라(O'Hara)부터가 아일랜드 성씨다.[9] 셔먼의 전술의 핵심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하되 불필요한 살인은 금지시켜 공포와 절망에 빠진 이들 만을 남기는 것 이었다.[10] 크롬웰에게만 줬던 직위가 아니라 직계왕족이 아닌 섭정을 호국경이라 한다. 리처드 3세도 호국경 시절이 있었는데 에드워드 3세의 현손자에 불과한 방계혈족이었고, 4대 글로스터 공작시절. 크롬웰 이전 최근 호국경은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11]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창살 없는 감옥이 이거구나..."''', '''"크롬웰은 나라를 수도원으로 만들 셈이냐!"''', 라는 대사가 나온다.[12] 특히 유럽 전역이 왕을 몰아내고 죽이기까지 한 것에 대해 경악하며, 특히 왕권이 강하던 프랑스는 영국을 야만적이라고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나라 망신이라는 여론도 컸다.[13] 찰스 2세는 영국의 왕정복고로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 찰스 1세의 사형 당시 주도적으로 개입한 대표들 중 26명 정도를 사형에 처했지만, 나머지 역할이 적은 사람들 또는 당이나 여론에 휩쓸려서 찰스 1세 사형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찬성한 사람들은 처벌하지 않거나 가벼운 경형을 내렸다.[14] 실제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행한 장례법이라 한다.[15] 정확한 장소는 비밀로 부쳐젔는데 위치가 알려지면 다시 수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다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묻혔다는 소문도 존재한다.[16] "찰스 1세는 사탄이고, 왕당파는 사탄의 부하다. 니네는 우리 땅에서 사탄과 그 부하들이 날뛰게 내버려둘 셈이냐?"하고 종교적으로 철저히 세뇌시켰다.[17] 편의상으로 영국이라 부르는데, 이 시절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모두 다 국왕만 같지, 법이나 정치, 주권 등은 모두 다 분리된 개별 왕국이었다.[18] 찰스 1세가 처형당한 뱅퀴팅 하우스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뱅퀴팅 하우스에서는 스코틀랜드 야드가 가로막고 있어 올리버 크롬웰 동상이 안보이고 올리버 크롬웰 동상은 서쪽, 길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북쪽에 있는 뱅퀴팅 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헷갈리는 이유는 뱅퀴팅 하우스와 웨스트민스터 궁, 세인트 마가렛 교회가 서로 별로 떨어지지 않았고 뱅퀴팅 하우스와 세인트 마가렛 교회 두곳 다 찰스 1세의 흉상이 그것도 비슷한 크기로 벽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19] 아이러니하게도 리처드 해리스는 아일랜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