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내전

 


1. 개요
2. 배경
3. 과정
3.1. 1차 내전
3.2. 2차 내전
3.3. 3차 내전
4. 결과
5. 외부 링크


1. 개요


'''English Civil War'''
1642년부터 1651년까지 벌어졌던, 찰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가 잉글랜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와 3차례에 걸쳐 벌인 내전이다. 공화정이 수립되었을 때 청교도식 법규를 기반으로 하여 통치하였기에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린다. 한때는 청교도 혁명이라고 자주 불렸지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에 들어간 20세기 후반부터 콘래드 러설(Conrad Russell) 등 수정주의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성이 부정되고, 일반적으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라고 한다. 단적으로 영문 위키백과의 표제어가 English Civil War이다.
영국 내전이라고도 하지만 영국 내전과 잉글랜드 내전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영국 내전은 찰스 1세스코틀랜드 왕국 귀족들과의 종교 분쟁이 터지면서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군사적인 대응을 시작한 1639년부터 올리버 크롬웰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1651년까지의 사건을 의미하며 삼왕국 전쟁(Wars of the Three Kingdoms)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영국 내전 안에 잉글랜드 내전이 포함되어 있다.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 1세는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했다. 그리고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을 호국경[1]으로 삼아 잉글랜드 연방을 세웠다.

2. 배경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1628년 강력한 상비군을 만들려고 했다. 그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의회권리청원을 통해 의회의 동의 없이 국왕이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조항의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의회는 이듬해 1629년에 강제로 해산당했다.
그러던 중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찰스 1세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교회를 신봉하게끔 강요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장로교를 믿던 스코틀랜드가 이에 대항해 찰스 1세는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전쟁에 필요한 세금을 걷기 위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게 되었다. 의회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세금이 필요한 찰스 1세의 약점을 잘 이용해 오히려 국교회를 강제하는 정책을 없애버리고, 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법안을 만들어내고, 의회가 3년에 한 번씩은 꼭 열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던 즈음에, 의회에서 찰스 1세가 잘못했던 것들을 국민에게 알렸다. 찰스 1세는 분노했고 의회의 의원들과 지도자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의회도 그에 대비해 군대를 모았고, 1642년 여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회도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의회를 지지하는 의회파로 나뉘었고, 의회파와 왕당파의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 과정



3.1. 1차 내전


1642년 여름, 찰스 1세는 외국용병들을 바탕으로 강한 군대를 내세워 내전을 시작하였다. 반면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듬해 '신모범군'[2]을 조직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으나 찰스 1세를 싫어하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팔아버린다.

3.2. 2차 내전


추방당해서 의회측에게 감금당한 찰스 1세는 이후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계속 외부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며, 의회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게 되자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는 1년여 만에 프레스턴 전투의 패배로 또다시 진압당했고, 찰스 1세는 다시 포로가 된다. 크롬웰은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게 찰스 1세의 처형을 건의했으나 반역자로 몰리기 싫었던 의회는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분노한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의원들을 가두어 버리고 50여 명 남짓의 크롬웰 지지자들로만 의회를 편성했다. 이를 "잔부 의회"[3]라 하며,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3.3. 3차 내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찰스 2세프랑스루이 14세에게 망명한다. 그 사이 잉글랜드의 왕당파들은 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하여 내전을 계속하나, 의회파에게 격파당하고 만다. 이때 이른바 335년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왕당파 세력의 함대가 콘월의 실리 제도에 자리잡자, 잉글랜드와 협력 관계였던 네덜란드는 이 왕당파 해군에게 1651년 3월 선전포고를 했다. 교전 자체는 없었고 약 2달 후 왕당파 함대가 스스로 항복해서 전투는 그대로 끝나.....긴 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서로 남은 종전 선언이나 항복 의식을 하지 않아서 형식상으론 계속 전쟁이 지속된 것. 결국 1986년(!)이 되어서야 실리 제도의 자치 의회 의장과 네덜란드 측이 정식으로 종전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조약을 잘못해서 형식상 전쟁이 지속된 사례가 제법 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에 반기를 들었던 언약파 정부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질시했으며, 결국 찰스 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잉글랜드 의회 뒷통수를 치려 했다. 이에 따라 크롬웰이 지도하는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언약파 사이에서 전쟁이 치러졌는데 크롬웰은 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대파했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 정복당했으며, 찰스 2세는 다시 프랑스로 망명한다.

4. 결과


의회파의 승리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 잉글랜드 연방이 들어서게 된다.
초대 호국경으로 올리버 크롬웰을 선출하나 결과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상업을 보호 하기 위해 항해법을 만들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배나 물건을 생산한 나라의 배로만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든 법으로, 상공업자들의 큰 지지를 이끌어내고 잉글랜드의 해운업, 조선업을 크게 발전시켜 같은 분야의 경쟁 상대이던 네덜란드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잉글랜드인은 크롬웰이 너무 지나치게 청교도 정신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예를 들자면 연극 같은 문화 생활이나 축구 같은 운동 경기도 금지했고, 12월 25일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도 금지했다. 현재까지도 '영국 음식맛이 없다.'는 평을 받는 원인 중 하나로, 이 당시 청교도 금욕주의에 의해 음식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금기시한 역사를 들기도 한다.
크롬웰이 사망하고 난 후 공화정은 붕괴되었고, 왕당파는 찰스 2세를 왕위에 앉히게 된다. 그래서 1660년, 잉글랜드는 다시 왕국이 되었다. 찰스 2세는 어느 정도 온정적인 통치를 펼치면서 그럭저럭 나라를 안정시켰지만 찰스 2세의 후계자이자 남동생인 제임스 2세는 친 가톨릭에 전제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주면서 의회와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는 명예혁명이라는 결과물을 낳게 되었다.

5. 외부 링크




[1]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은 영국에서 왕권이 약할 때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던 귀족에게 붙였던 칭호이다.[2] New Model Army. 간혹 '신형군'이라고도 부름. 흔히 철기병으로 알려졌지만...[3] Rump parliament. 문자 뜻 그대로, 크롬웰 파의 '''찌꺼기'''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