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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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찰스 1세 (Charles I)
'''출생'''
1600년 11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던퍼믈린 던퍼믈린 궁전
'''사망'''
1649년 1월 30일 (48세)
런던 화이트홀
'''장례식'''
1649년 2월 9일
잉글랜드 윈저 성 세인트 조지 교회
'''신체'''
163cm
'''재위'''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의 왕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배우자'''
프랑스헨리에타 마리아[1]
(1625년 결혼)
'''자녀'''
찰스 제임스[2]
찰스 2세
메리
제임스 2세 & 7세
엘리자베스

캐서린[3]
헨리
헨리에타
'''아버지'''
제임스 6세 & 1세
'''어머니'''
덴마크
'''형제자매'''
헨리
엘리자베스
마거릿
로버트
메리
소피아
1. 개요
2. 모래성 위의 왕권
3. 의회 없이 혼자 놀기
4. 기독교 문제
5. 의회와의 신경전
5.1. 단기의회
5.2. 장기의회
6.1. 1차 내전
6.2. 2차 내전
7. 신하에게 목이 잘리다
8. 가족
8.1. 부모와 형제자매
8.2. 아내와 자녀들
9. 평가
10.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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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 must tell you,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 If I would have given way to an arbitrary way, for to have all laws chang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word, I needed not to have come here, and therefore I tell you that I am the martyr of the people."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신민과 통치자란 완벽하게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모든 법률을 좌지우지하는 검의 힘으로 독단적 정치를 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이 분명히 밝히건대, 짐은 국민의 순교자다!"

ㅡ 찰스 1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제임스 1세와 덴마크의 앤[4]의 차남[5]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군주였다.
찰스 1세는 키가 작았으며, 늘 수줍음을 탔고 말이 적으며 내성적이었다. 잘 알려진 반 다이크의 초상화[6]보다 실제의 위엄은 덜했다고 한다. 신앙심이 돈독하였기에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궁정 내의 저속한 분위기가 즉시 사라졌다고 한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고, 이 시각에 입권해 교권 강화는 곧 왕권 강화, 또 왕권 강화는 곧 교권 강화라는 입장이 강했다. #
당시 왕족의 결혼이 그랬듯이 즉위 직후 정략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누이인 앙리에타 마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 데다가, 왕의 측근들은 프랑스에서 온 왕비를 홀대하도록 왕을 부추겼기에 초기에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7] 그러나 왕비의 반대파가 죽거나 실각한 후에는 부부 사이가 좋아졌으며 자식도 몇 명 두었다.
찰스 1세의 치세는 국제 정세와 국내의 기독교 종파 간의 갈등, 의회와의 권력 분쟁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며, 이후 내전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지도하는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재판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모래성 위의 왕권


제임스 1세는 선대왕인 엘리자베스 1세의 능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이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통치 경력도 있었는 데다, 청교도와 성공회를 단합시키는 등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제임스 1세가 사망한 후 차남[8]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막 즉위한 찰스가 당면한 문제는 그의 아버지 대부터 올라가고, 오랜 시간 동안 곪아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 초기에는 헨리 7세 시절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미전쟁으로 몰락하고 왕실에서 패배한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면서 귀족 가문은 30여 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튜더 왕조는 재정적으로나 권력으로나 절대우위를 누리며 절대왕정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대외 팽창과 전쟁으로 재정적 수요가 폭증하면서 소수 귀족을 제외한 젠트리[9]에 대한 의존이 강해졌고 이들 세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했었다. 이미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절대왕정의 바탕이던 왕실 토지들은 젠트리들에게 팔아 넘기면서 기반이 약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의회에 손 벌리거나 백성들에게 욕먹는 새로운 과세보단 왕실소유 토지를 팔아치우는 걸 선호했기 때문. 따라서 후대 왕이 될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면서 그들은 점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들어온' 왕조였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계였다.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리 강력한 왕조는 아니었는데,[10]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운 좋게 얻기는 했지만 세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1]
더불어 헨리 8세가 무분별하게 몰수한 뒤 헐값에 처분했던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매입한 상공업 계층은 젠트리, 요먼 계층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고 더이상 헨리 시대의 거수기 노릇은커녕 국왕권을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의 세력도 강성해져 국교회(성공회)를 지지하던 국왕과 대립하는 판국이었다. 왕실의 재정 위기는 이미 헨리 8세 말년에 표면화된 것이었고,[12] 엘리자베스는 긴축정책과 해외 투자, 드레이크 등의 해적질 수입 등으로 이를 메웠었지만 아버지가 만든 빚이 하도 많다 보니 미봉책에 불과하여 영국 국왕의 재정적 기반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프랑스가 교회를 온존시키되 자주 원조금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교회 돈을 받아낸 것에 비하면, 헨리의 한탕 정책은 본인의 낭비 이후 자손들의 돈줄을 차단하고 신흥 세력의 기반을 닦아버렸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제임스 1세는 강력한 왕권을 원하여[13] 그를 위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했다.
당연히 의회는 심하게 반발하였으며,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는 이것이 암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3. 의회 없이 혼자 놀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지라 찰스도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고, 아버지의 노선을 계속 밟았다. 그러나 실권을 가지고 있던 총신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14]가 여러 실정을 범했고, 무리한 해외 원정도 줄줄이 실패하여 영국에는 악재가 겹쳐 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의 개신교도 반란을 지원한 사건인데 이때 프랑스 라 로셸에서 농성 중인 개신교도를 지원했다가 대패한다. 이러한 실정이 발생하면서 과세 부담이 중해졌고 의회는 1628년에 권리청원[15]을 내놓는다. 찰스 1세는 일단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지만, 몇 개월 후 입을 싹 씻고 의회를 해산해 버렸으며 이후 11년간 그 문을 걸어 잠가버리게 된다.
의회를 열고 닫는 것은 왕의 권한이었기에 의회파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만큼의 분노와 불만을 쌓고 있었다. 그동안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특별세를 거두며 재정을 충당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4. 기독교 문제


더 큰 문제,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반란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는 찰스가 즉위하고부터 착실히 뿌린 씨앗을 거둬들인 결과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칼뱅파 교육을 받았음에도 청교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 39개 신조에 기반한 잉글랜드 국교회 일원화 정책을 지속했고, 이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까지 강요하여 분란이 되었다. 다만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에서 의회와 대립했으나 통치는 원만하게 해냈으며 스코틀랜드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만큼, 스코틀랜드를 잘 알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을 다스리는 데는 능숙했고 애착심을 여러 차례 보이는 방법으로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신망을 받아 통치에 성공을 거두었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서도 수시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의 유력 클랜 귀족들과 만남을 가지며 회유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었기에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착이 없었고, 스코틀랜드를 무시하여 그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헨리 8세 이래로 종교에 의한 피바람을 몇 번이나 맞았던 잉글랜드였기 때문에, 가톨릭교도인 왕비의 존재는 곧 찰스가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화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찰스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고교회파'[16]윌리엄 로드(1573~1645)를 지명하자 분쟁은 커져만 갔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윌리엄 로드의 됨됨이였다. 매우 전투적이었던 그는 성공회의 세력권에 침입한 청교도를 '박멸'하기 위해 그들의 코나 귀를 자르는 만행을 서슴치 않던 자였고, 장로회가 우세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잉글랜드 성공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으며, 이때문에 1639년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5. 의회와의 신경전


처음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진군하였으나, 결국 군비의 부족으로 스코틀랜드 반군에게 패하면서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5.1. 단기의회


그리하여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한 특별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1640년 4월 13일 의회를 열었다. 의회는 찰스 1세가 요구한 전쟁 예산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가 징수해 오던 다른 특별세를 심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상원에 전쟁 예산이 특별세에 대한 불만처리에 앞선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하원에 보조세를 성립시켜 준다면 선박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하원은 반발하며 그 말을 쿨하게 무시했고, 찰스 1세는 추밀원 회의를 열어 또다시 혼자놀기를 선언하는 동시에 5월 5일에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5.2. 장기의회


그러나 국왕 폐하의 혼자놀기는 오래 가지 못하여,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에 침입하여 북부 2개 주를 점령하자 찰스 1세는 이를 인정하고 화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가 짓눌린 왕은 요크에 귀족만의 의회를 열었고, 다시 11월 7일 웨스트민스터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11년 동안 짓눌렸다가 제대로 터뜨리지도 못하고 삭혀야 했던 울분이 터져나왔고, 의회는 마침내 왕이 어질러 놓은 나라 꼴을 도로 갈아엎기 시작했다. 특히 왕권의 상징인 특별재판소를 폐지하고, 왕의 측근인 윌리엄 로드를 탄핵하고, 스트래퍼드 백작[17]을 체포하여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1628년의 전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는 최소한 3년에 한 번은 열려야 한다'''라는 규칙을 제정했다.
이렇게 이 의회는 1653년에야 폐회되는 '''장기의회'''가 되었고, 그 사이에 국가의 주권이 국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념이 등장하여 왕과 의회의 사이는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때맞춰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18]
이에 의회는 국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의하고, 다시금 찰스 1세의 잘못을 2백 개 조항에 걸쳐 시시콜콜히 나열하며 '''삼가 시정해 주십사'''는 대항의문을 내놓는다. 그러자 격분한 찰스 1세는 결의문 통과를 주도한 다섯 의원을 체포하고자 몸소 근위대를 이끌고 의사당에 난입했으나, 의회는 의회 경비병들을 동원해 저지하며 국왕의 요구를 '''면전에서 묵살해 버렸다'''. 이는 왕권에 대한 의회의 본격적인 도전이라서 찰스 1세는 분노해 의회를 아작내기로 마음먹는다.

6. 잉글랜드 내전


이제 국왕과 의회 사이에 남은 것은 현피 떠서 이긴 쪽이 끝장을 보는 것뿐이었다.
의회는 지방의 민병대 통솔권을 자신들에게 주는 법안을 결의했다. 이에 맞서 찰스 1세는 노팅엄에 가서 자신의 깃발을 내걸었다.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 둘로 갈라졌다. 왕당파는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스에서 세력을 떨쳤고, 잉글랜드 남부는 대체로 의회파를 지지했다.

6.1. 1차 내전


내전은 처음에는 왕당파에게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대부분 토호들이 각 지방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들이었으며, 그나마 자기 고향 밖으로 출정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왕당파 역시 그리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양측은 엣지힐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는 등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올리버 크롬웰이 이듬해 '신모범군'[19]을 조직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신모범군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높은 사기를 갖춘 군대였다. 특히 그들의 높은 사기는 종교적 열정의 힘으로써, 싸움터에서도 늘 성경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적인 왕당파 군대가 곧 사탄의 군대이며, 자신들은 "곧 이루어질 것이 분명한" 재림 예수의 천년왕국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연거푸 승리하자 크롬웰은 의회에서 점차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이끄는 급진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의회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결국 네이즈비 전투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대세가 기울자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으나 찰스 1세를 싫어하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크롬웰에게 찰스 1세를 팔아버린다.
탄핵되어 투옥되어 있던 윌리엄 로드는 찰스 1세가 사면하려고 여러 노력을 했으나 국회가 끝끝내 거부하고 1644년 그를 재판에 회부해 ,1645년 참수시켜버렸다.

6.2. 2차 내전


결국 1646년 4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항복하면서 내전이 잠시 종식되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를 싫어한터라 크롬웰에게 40만 파운드의 돈을 받고 추방시킨다. 추방당해서 의회측에게 감금당한 찰스 1세는 이후 의회파의 손아귀 내에서 계속 외부와 연락하며 기회를 엿보았으며, 의회의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수평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하게 되자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는 1년여 만에 프레스턴 전투의 패배로 또다시 진압당했고, 찰스 1세는 다시 포로가 된다. 크롬웰은 더 이상 왕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회에게 찰스 1세의 처형을 건의했으나 반역자로 몰리기 싫었던 의회는 크롬웰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빡친 크롬웰은 164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기습하여 찰스 1세의 처형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의원들을 가두어 버리고 50여 명 남짓의 크롬웰 지지자들로만 의회를 편성했다. 이를 "잔부 의회"[20]라 하며, 왕을 재판할 최고법원을 열었다.

7. 신하에게 목이 잘리다


최고 법원의 재판은 뻔한 결말에 뻔한 줄거리로 흘러갔다. 왕은 자신이 반역자에게 희롱당하고 있을 뿐이라며 재판 내용을 거부하고 차라리 혼자놀기를 택했다. 법원도 애초에 왕의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이 정해져 있던 판결인 사형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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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1월 30일, 영국의 왕 찰스 스튜어트 1세는 신민들 앞에 사형수로 섰다. 사형대는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연회장인 화이트홀의 뱅퀴팅 하우스 앞에 차려졌고 군인들이 그를 그 곳으로 인도했다.
거기서 그는 군중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자신 역시 그 누구보다도 인민들의 자유를 갈망했노라고 주장했다.[21] 그러면서도 그는 개인과 군주의 권리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의회가 국왕의 통치권을 넘볼 수 없음을 말했다.
연설을 마친 찰스 1세는 집행자의 지시에 따라 사형대에 엎드렸으며 성직자가 찰스 1세가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후 참수되었다. 찰스 1세의 목은 도끼질 한번에 깨끗이 잘렸고[22] 집행자는 잘린 머리를 대중들 앞에 높이 들어 보였다.
이후 당분간 영국은 왕이 없는 국가, 즉 공화정이 되었다. 다만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를 해산해버리고 독재자가 되어 거의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휘둘렀고 압제적인 정치를 펼쳐서 실제적으로 왕정과 별 차이는 없었다.
처형 당시 매우 간지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찰스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짐은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 #출처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알려진 내용[23]은 최후변론의 내용과 유사하다. 찰스 1세는 판결을 받기 전에 최후변론에서 '''"기억하시오. 짐은 당신들의 국왕, 합법적인 왕입니다. 당신들이 짐에게 어떤 죄를 덧씌웠는지 기억하시오...''' (후략)"란 말을 하였다. 처형되는 날 아침 자식들에게도 "이 아비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단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연도는 1649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의 다음해이다. 사실 이 때만해도 영국은 유럽 대륙의 비해 시골 깡촌과 같은 취급을 당했기도 했고, 30년 동안 이어져 온 전쟁(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도 있어서 유럽에선 찰스 1세의 목이 떨어진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찰스 1세의 처형에 관한 루머가 있는데 영국의 군대 중 해군이 Royal Navy, 공군이 Royal Air Force라고 쓰는 데 반해 육군은 그냥 British Army라고 하는데, 영국 육군은 왕정국가에서 왕의 목을 날린 전적이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Roy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영국 육군은 전통적으로 왕의 권한 아래에 있던 다른 군과 달리 의회가 소집을 허가할 때 움직이는 의회 소속이므로 Royal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이다. 왕의 목을 친 것과 무관하다.
한편 그의 왕비인 앙리에타 마리는 내전이 진행 중일 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자식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한 후,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때 어머니와 함께 수도원에 들어갔던 딸 앙리에타(영어명 헨리에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과 결혼했으나[24] 요절하고 만다.

8. 가족



8.1. 부모와 형제자매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왕위를 잇지 못했다.
앤 여왕이 후사[25]없이 세상을 떠나자 엘리자베스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그 이외에 누나 1명, 남동생 1명, 여동생 2명 역시 어린 시절에 요절했다.)

8.2. 아내와 자녀들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여동생. 그리고 근현대사 유럽 혁명 당시 군주 배우자[26]들 중 유일하게 사형당하지 않고 제 명에 세상을 떠난 케이스. 남편이 처형당한 후에도 20년을 더 살았으며 큰아들 찰스가 왕정복고를 이루는 것까지 생전에 지켜보았다.
같은 이름의 형(1629년생 찰스)이 있었지만 태어난 다음 날 숨졌다. 멸망한 왕조를 복구한 이후 혁명으로 목이 날아간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귀족층들의 지지를 끌어내며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으나, 굉장한 호색한이었고, 낭비벽이 심했다.
메리가 낳은 아들 오라녜 공 윌리엄은 후일 윌리엄 3세가 되었다.
찰스 2세가 후사[27]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이어받았다.
워낙에 심한 전제정치를 펼쳤고, 결국 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하기 전날인 1649년 1월 29일, 올리버 크롬웰의 허가로 남동생 헨리 왕자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할 수 있었다.[28] 그 자리에서 찰스 1세는 네 어머니(앙리에타 마리아)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전해라라고 했고, 찰스 1세, 엘리자베스 공주, 헨리 왕자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는지 1650년 9월 8일 1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여담으로 이 면회를 지켜본 올리버 크롬웰마저 이 가족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처형 전날에 찰스 1세를 면회했던 인물. 찰스 1세는 헨리에게 이 아비(찰스 1세)는 죄가 없단다. 너희 형들이 죽지 않는 한 너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단다. 그러니 저놈들(크롬웰 파)이 널 옹립하려 해도 너는 거부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크롬웰에게 교육을 받아 크롬웰을 옹호하고, 어머니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매우 혐오하게 되어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냉랭했다고 한다. 이후 1660년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어머니에게 따온 듯하다. 아버지 찰스 1세와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가 1644년 4월 청교도 혁명의 여파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헨리에타 마리아는 이때 찰스 1세와 만난 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이후 헨리에타 마리아는 1644년 6월 헨리에타 앤을 출산하였으며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헨리에타 앤은 어머니의 친정 식구(외삼촌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결혼했다.

9. 평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꼴통 폭군의 이미지지만, 사실 제임스 2세가 그랬듯 특별히 찰스 1세가 폭군이었다든가, 무능했다는 것은 아니다. 찰스 1세는 한마디로 당시의 '''전형적인 절대군주였다.'''[29]
개인으로서는 나름 매력이 있었고, 대내외적 사고도 크게 저지르지는 않았다. 쾌락주의적이었던 아버지에 비해서 품위 있고 청렴하였고 인품은 좋았기에 집권 초중반기에는 인기가 꽤나 좋았다. 반대로 의회는 국민을 대변하는 집단도 아니었고[30], 뒤이어 들어선 커먼웰스, 즉 크롬웰 정권도 그다지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31] 그래서 찰스 1세는 나름대로 후일에 괜찮은 평가도 받고 있고, 특히 찰스 2세 때 상당 부분 이미지가 복권되었다.
그렇기에 당대에는 (특히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는) 찰스 1세는 왕정복고의 상징이자 희생양으로서 여겨진 감도 있다. 사망 직후에 출간된 『왕의 성상(Eikon Basilike)』이 대표적인 시각이다. 이를 위해 크롬웰은 존 밀턴 등을 동원하여 왕권신수설을 부정할 이데올로기를 마련하는데 고심했다. 즉, '''어떤 확고한 이념이 있어서 왕을 죽인 게 아니라, 왕을 죽인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된 사상이 오늘날의 민권 사상이다.''' 144년 뒤의 루이 16세와 비슷하게 찰스 1세는 일종의 '시범타'로서 처형된 것이고, 왕권신수설의 패배의 상징으로서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분명 찰스 1세는 문제점이 많은 군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찰스 1세가 유난히 폭압적이어서가 아니라[32], 불통의 군주였고 왕권의 역사를 잘 몰랐다는 점에서이다. 찰스 1세는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신실하고 우직했으며, 왕권을 신앙에 의해 보장된 권리라고 생각했기에, 의회를 대화의 상대가 아닌 '''복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우직함은 나름대로 킹 제임스 성경과 같은 종교적 프로파간다나 협상과 회유에 능했던 부왕 제임스 1세만도 못했다. 재정사정에서도 제임스 1세에 비해 넉넉하지 못했다. 심지어 항목에 보면 나와있듯이 욕지거리도 잘 했고(...) 정책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소통과 의견 수렴도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와 반대로 기본적으로 우아하고[33], 무엇보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다.
제임스 1세는 동군연합이란 제도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어릴 적부터 정치적 불안정으로 악명높았던 스코틀랜드 정치판에서 험하게 구르며 자랐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왕권은 그냥 그대로 주장하면 이루어 지는 걸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부왕이 주장한 왕권신수설은 사실 그 시대 유럽 보편적인 가치관에서는 새로운 이론이라 할 것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임스 1세가 굳이 그것을 이론화하며 주장했는데, 잉글랜드 왕이 되기 이전의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본인이 "베네치아도제만도 못한 권력이다"라고 말 했을 만큼 '''왕권이 유독 약했던''' 스코틀랜드에서 자라나 왕권이 말로만 떠들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정치적 밀당과 파벌간 이해 관계 조절을 통해서 확보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법 체계가 그 시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발달했고 튜더 왕조의 영향으로 중앙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잉글랜드와 반대로 꿔다놓은 수준으로 중앙 권력이 불안정했던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의식적으로, 일부러 당연한 것을 이론화하면서''' 차분하게 왕권을 강화하는 장기적 프로젝트를 추구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나름 불평불만은 해도 제임스 1세, 그리고 그 아들 찰스 1세의 통치에 직접적인 반항은 못한 반면, 아버지 치세만 해도 계속 왕권에 반발하며 싸우려고 들었던 세력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매파 세력이었고, 본인의 시대에도 결국 모가지 날아간 청교도 혁명도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혁명으로 한 곳에 권력 누수가 생기면서 나머지 잉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권력이 아예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제임스 1세, 아니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동군연합의 불안함을 알고 있었으며[34] 스튜어트 가문이 탄생한 뿌리를 잊지 않고, 몸은 잉글랜드로 내려갔어도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하여 애정어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어린 아이 시절에 스코틀랜드를 떠난 이후 스코틀랜드에 대해 관심도, 흥미도 없었으며 자신의 선조들이 얼마나 스코틀랜드에서 고생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메리 스튜어트의 몰락부터 제임스 6세의 성년까지 스코틀랜드의 국정을 주도했던 장로회는 종교 문제로 제임스 6세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 많았지만,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로 내려가 제임스 1세가 된 후에도 그나마 같은 나라 출신이며,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고향을 잊지 않았고, 도시민과 귀족들과의 유대감을 유지했기 때문에 장로교회는 고립되어 잠잠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예 지 뿌리도 잊어 먹고 머나먼 외국에서 폭군처럼 행세하는 찰스 1세 치세에 들어서는 스코틀랜드 현지 정치적 전통 그대로 대귀족, 성직자[35], 도시민들이 연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키니 한 곳에서 터진 권력 누수가 잉글랜드를 비롯한 다른 곳까지 모조리 해일처럼 집어삼킨 것이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찰스는 목이 날아갈 만큼 유독 무능하거나 폭압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찰스는 '''잉글랜드 뿐만의 왕이 아니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반골기질이 막강했고, 국왕의 권력이 약했던 스코틀랜드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에 벌어진 실패의 영향이 동군연합이란 체제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타고 다스리던 삼왕국 전체로 파급돼 찰스의 왕좌가 와르르 무너져내린 것이다. 찰스가 근세의 다른 군주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폭압적이고 무능했던 건 아니지만, 영민하기 그지 없었던 자기 아버지에 비해서 정치력이 부족했고, 이에 따라 자기가 직면한 문제의 규모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쏟아져내린 산사태에 휩쓸렸다고 할 수 있다.

10.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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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오비완 케노비를 연기한 알렉 기네스가 찰스 1세를 연기하고 알버스 덤블도어를 연기했던 리처드 해리스가 올리버 크롬웰을 연기한 영화 풍운아 크롬웰(Cromwell, 1970)에서는 크롬웰과 같이 비중도 많고 꽤 좋게 나온다. 영국과 미국 합작에 감독인 켄 휴즈, 주연 배우인 리처드 해리스,알렉 기네스, 티모시 달튼 등 배우진들도 싸그리 영국인들이다. 크롬웰도 나쁘게 나오지 않고 둘이 같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이렇게 나오며 처형당할때 왕자인 찰스 2세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그냥 무난한 군주 정도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평은 그냥저냥 범작 수준 평가이며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1] 부르봉 왕조의 개창자인 앙리 4세의 막내딸이자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3세의 여동생.[2] 1629년 3월 13일 출생한 날 요절[3] 1639년 1월 29일 출생한 날 요절[4]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차녀[5] 제임스 1세의 장남인 헨리는 1612년 사망했다.[6] 일설에 의하면 찰스 1세는 반 다이크가 초상화를 그려다 줬는데 '''내라는 돈은 안 내고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7] 이걸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측근인 버킹검 공작이다.[8] 차남이긴 하나 형이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9] 사실 영국의 귀족제도 특성상 극소수의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사회 지도층은 모두 젠트리들이다. 단순 상공인 대륙의 부르주아로 불리기엔 무리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귀족 가문의 차남 이하의 후손이나 지주계층이었다. 해당항목 참조[10] 애당초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잉글랜드보다 개판인 데다가 스튜어트 왕조 자체가 동군연합 전 제명에 죽은 왕도 얼마 안 된다.[11] 게다가 스코틀랜드는 이때까지도 잉글랜드에겐 외국이었고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와 합치기를 거부했기에 통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12] 헨리 8세는 말년에 사치가 심해서 왕실 재정이 많이 거덜난 상황이었다.[13] 사실 제임스 1세의 구상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통합하여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14] 영국 최악의 간신배로 뽑히는 인물인데 무능하지만 귀족이라는 가문 배경과 찰스 1세의 기분을 잘 맞춰주는 아부로 크게 성공했다. 찰스 1세와 얼마나 친했는지 찰스 1세의 동성애 상대여서 재상이 되었다는 루머가 퍼질 정도였다. 하도 무능하다 보니 이 인간이 저지른 실책이 장난이 아닌데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외교를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책임질 생각도 안 하고 전쟁 수행도 개판으로 해서 영국이 패배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의회로부터 탄핵을 받았는데, 문제는 찰스 1세가 그런 잘못을 오히려 감싸돌면서 의회를 해산시키는 짓을 하고 만다. 나중엔 예비역 장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가 분노한 해군 장교 존 펠턴의 칼에 찔려 피살되었다. 존 펠턴은 조지 빌리어즈를 죽인 것을 당당하게 자랑하다가 장교들에게 붙잡혔고 나중에는 처형된다. 삼총사에 나오는 그 멋진 신사 버킹엄 공작과 동일인물이라서 암살의 배후에 리슐리외가 있다고 각색되었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또한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멋들어진 신사도 아니었고 리슐리외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능했다.[15]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16] 성공회를 인정하되, 가톨릭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던 기독교 종파.[17] 이 사람의 딸의 증손자가 조지 3세 때의 휘그당(...) 수상 로킹엄 후작(1730~1782)이다.[18] 스트래퍼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총독이었다. 그가 처형되자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교도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반란이 일어났고, 다시 잉글랜드에서 "왕과 왕비가 프랑스와 짜고 개신교도들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으로 번졌다.[19] New Model Army. 간혹 '신형군'이라고도 부름. 흔히 철기병으로 알려졌지만...[20] Rump parliament. 문자 뜻 그대로, 크롬웰 파의 '''찌꺼기'''의회.[21] 절대군주가 인민의 자유를 갈망했다는 것이 조금 의아스러울 수 있는 게 찰스 1세가 말한 자유는 지배자의 호의에 의한 자유를 말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의회파들은 이에 대해 진정한 자유란 자신들을 지배할 법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 반론했다.[22] 당시 집행자의 도끼질이 능숙하지 못했거나 도끼날이 날카롭지 못했을 경우 수번을 내려쳐 사형수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저 세상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볼 때 찰스 1세는 운이 좋았다. 실제로 찰스 1세의 할머니인 메리 스튜어트는 4번의 도끼질 만에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았다.(처음 도끼질은 목이 아닌 뒤통수를 찍었다고...)[23] "짐이 법을 어겼다고 치자. 그러나 신하가 왕을 처벌해도 된다는 내용이 법에 없으니, 이는 신하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만일 왕과 신하가 모두 법을 어겼을 때,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과 신하가 왕을 처벌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의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짐은 후세에도 왕으로 남을 것이지만 그대들은 역사에 영원히 반역자로 기록될 것이다!'''''[24] 이 둘은 사촌관계이다.[25] 무려 17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16명은 사산되거나 유산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1689년 ~ 1700년)마저 요절했다.[26] 프랑스 혁명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러시아 혁명 당시 황후였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27] 자식들이 있긴 있었지만 전부 서자들이었고, 적자가 없어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28] 찰스 2세제임스 2세가 면회하지 않고 해외에 꽁꽁 숨었던 이유는 크롬웰 일당에게 잡히면 무조건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와 헨리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해해도 왕당파가 큰 타격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29]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나오는 창작대사로, 찰스 1세가 의회의 의원들에게 "그대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짐인데, 어찌하여 짐의 목을 칠 궁리는 하지 않는지 참으로 신기하도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 이에 의원들은 "폐하! 임금 없이 어찌 나라가 있겠습니까?", "폐하를 배반하자는게 아닙니다!", "폐하가 펴신 독재정치나 실수는 폐하를 모신 신하들이 나쁜 탓이니 그 역적 간신들을 처치하자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왕권신수설 신봉자인 찰스 1세와 의회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눈에 의회가 어떻게 보였는지를 한 컷에 담아내는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30] 귀족들의 모임인 상원은 물론이고 하원조차도 최소 지역유지 급은 되어야 투표에 참여할수 있었던 상류층들의 집합소였다. 영국 하원이 국민들을 대변하는 기구가 된 것은 19세기 중후반이나 되어서로 생각보다 오래 된 일은 아니다.[31] 이런 점은 프랑스 혁명 직후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집권기나 나폴레옹의 제1제국과도 비슷한 맥락이다.[32] 오히려 집권 초에는 정치적, 종교적 사안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찰스 1세 시절 로드 대주교가 사람들 코와 귀를 자르는 폭정을 벌인다고 청교도들의 불만이 대단했지만 사실 찰스 1세 전에는 '''그냥 죽였다.'''[33] 왕이 우아한 건 기본적으로 문제는 아니지만, 당시는 종교개혁 이후 엄숙주의와 회화, 조각 같은 시각적 미술을 우상숭배라고 배격하던 청교도적 분위기가 왕성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다.[34] 장점은 한순간에 영토가 늘어나는거 단점은 외국인 군주,서로 다른 문화와 정치 등으로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는거[35] 첨언하자면 여긴 개혁교회이므로 성직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가톨릭, 정교회식의 주교단으로 대표되는 사도 전승에 따른 직위 체계가 아니라, 워리스턴의 아치볼드 존스턴, 에든버러 대학 신학교수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베일 등 영향력 있었던 개신교 목사, 신학자들을 일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