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융

 


馬融
(79 ~ 166)
후한의 인물. 훈고학의 시조로 유명한 유학자로 정현, 노식, 연독 등을 가르쳤다.
우부풍 무릉 사람으로 경조의 지순에게 유학을 배우고 남산에 은거해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지순의 딸을 처로 맞이했고 108년에 등즐의 사인으로 부름을 받자 량주의 무도, 한양으로 피했다. 강족이 일어나 함곡관 서쪽의 길이 차단되자 마융은 왼손으로는 천하의 지도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베는 것은 어리석은 자도 하지 않는 짓이라고 탄식했으며,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속세에 뜻을 꿉혀 말직에 나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존귀한 몸을 망칠 수 있겠다는 옛 사람의 말을 떠올려 벼슬에 나가기로 한다.
110년에 등즐의 부름에 응해 교서랑이 되었다가 동관의 전교비서가 되었으며, 한서가 처음 나왔을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마융은 장서각 아래에 엎드려 반소를 따라 한서를 익혔다. 115년에 교서낭중을 지냈고 방참 등이 강족을 토벌하는 일에 실패해서 처벌받게 되자 마융은 방참, 양근을 능력있다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전공을 세워 보답하게 해야 한다고 해서 방참 등은 사면받았다.
광성송이라는 표문을 올려 간언했다가 등태후의 미움을 샀으며, 116년에 조카의 죽음으로 귀향했다가 등태후의 분노를 사 면직되었다가 121년에 안제가 즉위하면서 벼슬을 할 수 있게 되어 부풍의 공조를 지냈다. 133년 5월 1일에 조정에서 인사들을 천거하게 하자 이에 조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마융은 경전에 정통하고 문장이 아름다웠고 상주문을 통해 의랑이 되었다.
이어서 양상의 종사중랑, 무도의 현령 등을 지냈고 140년에 마현이 강족을 토벌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마현이 쓸 수 없는 군사를 자신이 이끌고 30일 이내에 토벌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현은 강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마융은 권신 양기가 집권하자 서제송이라는 글을 지어 바치거나 그의 종사중랑을 지내면서 그를 위해 글을 지어 올리는 일을 했는데, 이고가 양기의 모함으로 죽게 되었다.
이때 대장군부의 장사인 오우가 이공(이고)의 죄는 경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이공이 만약 주살되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람들을 보겠냐고 물었고 결국 이고는 주살되었으며, 남군태수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기가 마융이 군에서 탐욕스럽고 혼탁한 일을 했다가 무고당해 삭방으로 유배가게 되자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복귀해 의랑을 지냈고 166년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가 88세였으니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대단히 장수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