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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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의 대신 자는 중달(仲達), 하남윤 구씨현 출신
2. 생애
하남윤(河南尹) 방분(龐奮)은 방참을 특이하게 여겨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곧 좌교령(左校令)으로 임명되지만 죄를 짓고 투옥되었다.
107년 양주(凉州)에서 선령 강족(先零 羌族)이 반란을 일으켜 조정에서는 거기장군(車騎將軍) 등즐을 보내 토벌하라고 하였지만 방참은 아들을 통해 상소를 올리고 등태후는 방참의 말을 옳다 여겨 등즐을 철수하게하고 방참에게 사람을 보내 등용시킨다.
110년 강족이 다시 침범해오자 방참은 서역을 포기하자는 상주를 하지만 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에 방참은 한양태수(漢陽太守)로 임명되는데 한양군에는 임당(任棠)이란 은사(隱士)가 있다는 소식에 부임하자마자 그를 찾아갔다. 임당은 찾아온 방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단지 해(薤) 하나와 물 한그릇을 내놓고서 임당은 자신의 손자를 앉고서 집으로 숨어버렸다. 주부(主簿)[1] 는 이에 임당은 거만한 자로 여겼다. 방참은 임당의 의도를 한참을 생각하고 탄식을 하면서 돌아갔다.
그 후 방참은 강한자를 억제하고 약한자를 도우면서 어진 정치로 민심을 얻었다. 이것이 발해(拔薤)라는 고사이다.[2]
114년 호강교위(護羌校尉)가 되어 은덕과 신의로 강족을 교화시켰다.
115년 금성군(金城郡) 탈환 이후 7천명의 병사로 사마균(司馬鈞) 등과 함께 강족 토벌을 나갔다. 그러나 실패하고 사마균은 자결하고 방참등은 투옥되지만 교서낭중 마융(馬融)의 변호로 다시 풀려난다.
후에 유주자사(幽州刺史)가 되어 121년 9월 선비족 기지건이 마성을 포위하지만 도요장군(度遼將軍) 경기와 함께 광양, 어양, 탁군의 군사를 모아 구원한다.
126년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진급한다. 129년 입조하여 대홍려(大鴻臚)로 임명된다.
129년 9월 12일 태위(太尉) 겸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된다.
133년 7월 20일 전처의 자식들을 우물에 던져 죽이는 짓을 해버려 태위에서 해임된다.
135년 4월 5일 시연(施延)이 태위에서 해임되자 4월 19일 다시 태위가 된다.
136년 11월 27일 지병으로 인해 태위에서 물러나고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