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
亡伊
생몰년도 미상
고려 시기 망이·망소이의 난의 주도자.
1. 개요
1176년 1월 23일에 공주 명학소에서 망소이와 함께 사람을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칭하고 공주를 공격해 함락했으며, 고려 조정에서 진압군을 보냈다가 패배하자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보내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1177년 1월 8일에 망소이와 함께 조정에 투항해 국고의 곡식을 하사받고 김덕강을 통해 고향으로 압송되었다.
노약순, 한수도가 함유일, 이공승, 독고효 등의 거짓 편지를 만들어서 망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려 시도하자 망이는 심부름꾼을 붙잡아 노약충에게 보냈는데, 조정에서 주동자들을 잡아가두려고 하는 한편 세금을 과도하게 걷자 2월 10일에 다시 봉기해 가야사로 가서 노략질을 벌였다. 3월 11일에는 홍경원에 불을 질러 승려 10여 인을 죽이고 주지승을 위협해 개경의 고려 조정에 항전할 뜻을 밝히는 글을 보냈다.
조정에서 진압군을 보내 불리하자 6월 23일에 사람을 보내 고려 조정에 항복을 청했으며, 7월 20일에 망소이와 함께 정세유에게 체포되어 청주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고문으로 인해 옥사했거나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 창작물에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사극 전문 배우 박진성이 연기했다.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 백성임에도 나름대로의 대의와 식견을 갖춰, 수 천의 백성을 이끌만한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58회에 망소이와 함께 봉기해 공주를 점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봉기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반란이 장기화된다면 수 천 명의 백성들을 살릴 비전이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고, 마침 조정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느라 자신들을 진압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고려 조정과의 화친을 도모하기로 한다. 조정에서 선유사를 파견하자 백성들을 핍박하지 않는 관리들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무조건 힘으로 꺾으려 든다면 조정에 맞설 것이라고 협박한다.
조정에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을 보내기로 하자 이 협상안을 받아들였고, 이 과정에서 조정과 계속 항전하기로 한 예산현의 지도자 손청과는 갈라서게 된다. 결국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고 조정에서 진압군을 계속 보낼 것이라 여겨 진압군과 맞설 군현은 손청을 따르라고 명한 뒤 망소이와 함께 조정에 항복한다.
한동안 감옥에 갇혀있다가 조정으로부터 양곡을 받아 명학소로 돌아가지만, 그 사이에 진압군이 명학소를 몰살하고 자신의 가족마저 죽는 등 조정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한다. 살아남은 봉기군의 잔당을 규합해 망소이와 함께 다시 봉기하며, 조정의 진압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싸우다가 붙잡혀 저잣거리에서 참수된다. 죽기 직전, 경대승을 만나 대화하여 그가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를 가슴에 품게하는 영향을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64회에서 처형되며 퇴장하였으나, 98회에 경대승이 죽은 뒤 사후세계에서 백성들의 대표로 그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재등장한다.경대승: 시운을 잘못 만나 나라의 큰 동량이 되었을 사람이 대역죄인이 되었구려..
망이: 시운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 비록 반역죄로 죽을지언정 봉기한 일을 후회하진 않소! 조정과 황실에서 계속해서 백성들을 핍박하고 기망한다면 백성들 속에서 또 다른 망이가 나와 봉기를 할 것이오!
경대승: 정녕 황실과 조정에 맞선 백성들의 봉기가 성사될 것이라 믿소이까?
망이: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땅에 백성들이 세운 조정과 황실이 서게 될 것이오! 내 저승에 가서라도 두 눈 크게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오!
경대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