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망소이의 난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난의 발발
3.2. 수습되나?
3.3. 재점화
3.4. 최종 진압
4. 기타


1. 개요


고려 명종 6년(1176년)에 공주 명학소(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의 백성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이끌고 일으킨 반란.

2. 배경


망이와 망소이가 거주하던 '소(所)'는 고려의 일반 행정 구역인 주·군·현과 다른 특수 행정 구역으로, 농경 대신 특산물 제작과 공납에 특화되어 있었다. 소에서는 지역 특성에 따라 금, 은, 철, 명주, 종이, 기와, 숯, 도자기, 차 등을 생산했다. 소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다. 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난의 주동자는 소 출신이었다. 다만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중심지를 함락시키려면 소수의 소 주민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며, 여기에는 공주목의 일반 군현민들도 가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지배층의 수탈과 토지 겸병 등으로 농지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이것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 외관의 문무교차제가 실시된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무신들은 문신 대신 외관직을 독점하려고 하였으나, 벼슬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문신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문무반의 밥 그릇 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지방 행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백성에 대한 수탈도 날로 더해 갔으며, 이런 까닭으로 고려 중기 유망 농민이 난을 일으키는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추가로 당시 서북면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전투에 필요한 물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따라서 명학소의 공납 부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난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3. 경과



3.1. 난의 발발


1176년 정월, 명학소민 망이와 망소이가 무리를 이끌고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반란의 막이 올랐다. 둘은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했다. 중앙에서는 각지의 반란군을 그 방위에 따라 이름 붙였는데, 망이와 망소이의 무리는 남적(南賊)이라고 불렀다. 조정은 처음에 반란군을 달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2월에 장사 3천 명을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러 내려보냈다. 그러나 3월에 올라온 보고는 정부군의 패배를 알렸다.

남적집착병마사(南賊執捉兵馬使)가 아뢰기를, "적과의 전투가 불리하여 많은 군사가 죽었습니다. 승려를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19, 명종 6년 3월 을묘

고려사 병지(兵志)에 따르면 공주의 주현군 규모는 약 1,400명이었다. 이 가운데 개경과 양계의 경비에 차출된 인력을 제외하면 망이와 망소이의 반란 당시에는 불과 수백의 군세가 이들과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에서 내려보낸 3천 군대를 물리친 것은 상당한 위협이었다. 중앙군을 이끈 지휘관은 대장군 정황재였다. 그는 이후 병부의 책임자인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인물이니 능력이 부족해 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망이와 망소이의 반란군이 예상 외로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3.2. 수습되나?


이 결과에 놀란 조정에서는 6월에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격상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해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9월에는 다시 장군 박순과 형부낭중 박인택을 파견해 민심 수습에 나섰다.
그런데 엉뚱한 사건이 벌어졌다. 동정직[1]에 있던 노약순과 한수도가 현직 관료들을 사칭해 충주에 있던 망이에게 반란을 일으키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망이는 오히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을 붙잡아 신고해버렸다. 노약순과 한수도는 국문 과정에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 높은 관직에 있으니 지방의 적을 끌어들여 없애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역적이란 누가 봐도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 이하 무신들이었다.''' 관료들을 사칭한 것은 자신들의 이름이 미미하여 명망 높은 이들의 것으로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명종은 이를 듣고 ''''의롭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중방[2]에서 죄를 주기를 주청하자 왕은 이들을 자자형(刺字刑)[3]에 처한 뒤 먼 섬으로 유배 보냈다. 여기까지 보면 망이가 조정에 협조해 난이 잠잠해진 듯 하지만...

3.3. 재점화


남적(南賊)이 예산현(禮山縣)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감무(監務)를 죽였다.

- 고려사 권19, 명종 6년 9월 신해

이때의 남적은 예산을 거점으로 일어난 손청(孫淸)의 세력으로 보인다. 지리적 근접성으로 보아 손청은 망이, 망소이와도 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손청은 이윽고 스스로를 병마사로 칭했다. 이것은 망이와 망소이의 초기 행보와 닮았다. 망이와 망소이도 이 무렵에 세를 확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망이가 옛 명학소인 충순현으로 돌아가지 않고 충주에 가 있었던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조정에서는 다시 토벌군을 파견했다. 이번에는 망이와 망소이가 금세 항복했다.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한 것이 12월 29일, 항복을 받은 것이 이듬해 1월 8일이었다. 조정의 조치는 관대한 편이었다. 망이와 망소이는 국고의 곡식을 하사받고 고향으로 압송되었다.

3.4. 최종 진압


2월 10일, 망이가 재차 반란을 일으켜 덕산(德山)에 있는 가야사를 약탈했다. 19일에는 남적이 황려(黃驪)와 진주(鎭州)를 노략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에서는 이번에야말로 반란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29일, 가야산에 웅거하던 손청이 붙잡혀 처형당했다.

망이(亡伊) 등이 홍경원(弘慶院)[4]

에 불을 지르고 절에 있던 승려 10여 인을 죽였으며, 주지승(住持僧)을 위협하여 서울로 글을 가져가게 하였다. <그 글의 내용은> 대략 말하기를, "이미 우리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安撫)하더니, 돌이켜 다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와서 우리 어머니와 아내를 옥에 가두었으니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王京]까지 가고야 말겠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19, 명종 7년 3월 신해

망이의 글에서 몇몇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무신들은 노약순과 한수도 사건에서 불만을 가진 기성 세력과 망이, 망소이 세력이 연대할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남적과 일단 강화를 맺은 다음 그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망이와 망소이 세력은 아주(牙州)를 함락한 뒤 청주 관할 군현까지 휩쓸었지만 정작 청주목은 어쩌지 못했다.
조정은 5월에 관리를 파견하여 남적 토벌에 관한 전공의 다소를 심사하고 조서를 내려 충순현의 이름을 삭제했다. 이것은 이 즈음 토벌이 완료되었다는 의미이다. 6월에는 마침내 망이가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7월에는 병마사 정세유가 망이와 망소이를 체포해 청주의 옥에 가두고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로써 망이와 망소이의 난은 종식되었다. 이후 망이와 망소이의 처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난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서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망이 형제가 주동한 명학소 봉기가 질풍노도처럼 지금의 충청•경기 지역을 휩쓸면서 황실과 조정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관과 토착 세력들의 가혹한 수탈로 극에 달한 백성들의 원성이 일거에 폭발한 탓이었다. 망이의 봉기가 김보당이나 조위총 등 기존의 거병과 달랐던 점은 특정한 정치적 대의명분을 내건 정치 지도자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뿌리 백성들 스스로가 생존을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 봉기였다는 것이다. 망이의 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이후 무신 정권기 동안 펼쳐졌던 수없이 많은 민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역사의 무대로 진출하는 백성들의 자각의 태동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 무인시대 64화의 해설


4. 기타


망이와 망소이가 살던 명학소의 위치는 오늘날의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일대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명학소의 위치가 유성 동쪽 10리 되는 곳이라고 기록했다. 탄방동의 남선공원에는 2006년 명학소 민중봉기 기념탑이 세워졌다. 탄방네거리에는 명학소우편취급국도 있었다.
명학소의 특산물에 대해서는 이곳이 철소(鐵所) 또는 탄소(炭所)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철소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방에서 철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주요한 근거로 든다. 탄소설 쪽에서는 앞의 기록과 더불어 탄방동이라는 지명을 통해 명학소에서 철 생산에 필요한 숯을 생산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탄방(炭坊)이라는 지명이 18세기에서야 등장한 점, 철이나 숯을 생산하는 가마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이곳이 원래 늪지대였던 점을 들어 철소설과 탄소설 모두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도 한다.

[1] 동정직은 벼슬에 오르기 전 임시로 받는 관직으로, 실제 국가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산직이었다.[2] 이 때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무신들의 최고 합의 기구.[3]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4] 직산(稷山)에 있던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