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강

 

孟康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공휴(公休). 맹자의 17대 손이다.
안평 사람으로 황초 연간[1]문덕황후의 외속[2] 관계에 해당해 9족으로 관직을 받았으며, 옮겨서 산기시랑이 되었다. 이 때 산기시랑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만 선발되었기에 맹강은 후궁의 연줄로 임명된 것이라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경시해 아구(阿九)라 불렀으며, 맹강은 재능과 영민함이 없어서 두루 서전을 읽었다.
맹강에 대해 비판하고 탄핵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의 문장이 뛰어나고 요점을 잘 짚어서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정시 연간[3]에 홍농태수 겸 전농교위가 되었다. 맹강은 관직에 오르면 자신을 깨끗이 하고 직무에 임해 선행을 평가했으며, 선행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소송 사건을 줄이고 백성들의 이익을 주도록 했다.
외출하고 순찰할 때 항상 독우를 시켜 치수를 하도록 했으며, 또한 속관들이 사자를 보내 안부를 전하도록 하는 것 등의 무리하게 경의를 표하지 않게 했다. 백성들이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관리들에게 사전에 명령해 순행할 때 낫을 챙기면서 길을 가는 도중에 말의 풀을 깎도록 했으며, 역사에서 숙박하지 않고 나무 아래에서 노숙했다.
종자는 항상 10여명을 넘지 않았고 군이 길가에 접해있었지만 그 곳을 통과하는 빈객들 중에 구면이 아닌 사람도 찾아오자 자신의 가계를 통해 여행비를 지출했다. 사람들은 그가 처음 태수에 취임했을 때 그의 뜻과 기량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재상, 주목 등을 경험한 적이 없어 능력을 보증하지 못했지만 맹강이 통치를 잘해 관리, 백성들이 그를 칭찬했다.
252년에 사마사가 집권하면서 조정의 회의에 참여했고 가평 연간[4] 말에 발해태수가 되었다가 중앙으로 가 중서령을 지내다가 중서감이 되었다.
280년에 오나라를 평정하면서 통일되었고 맹강은 당시에 태자선마를 역임했으며, 당시 사람들이 왕준의 공로는 무거운데 보답이 가볍다고 여겼고 맹강은 진수, 이밀과 함께 표를 올려 왕준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1] 220 ~ 226년이다.[2] 어머니 또는 아내의 일가붙이.[3] 240 ~ 249년이다.[4] 249 ~ 254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