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
'''멍쯔, 맹자, Mencius'''
[image]
우측 상단의 온전한 다섯 글자는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잘린 두 글자는 '''맹가'''孟軻이다.
<colbgcolor=#00001b> ''''''
가(軻)
''''''
자여(子輿), 자거(子車)
'''출생'''
기원전 372년, 추(鄒)[1]
'''사망'''
기원전 289년, (84세), 노나라
'''직업'''
정치가, 사상가
'''부모'''
아버지: 격(激)
1. 개요
2. 사상
2.1. 왕도 정치
2.1.1. 항산
2.2. 성선설
2.3. 호연지기
2.4. 역성혁명론
3. 영향
3.1. 한국
3.2. 중국
3.3. 일본
4. 맹자의 후손
6. 기타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천하의 가장 넓은 자리에 거(居)하고

천하의 가장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가장 위대한 도(道)를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도[2]

를 행한다.

그러므로

부귀도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비굴하게 할 수 없으며

어떤 폭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것을 일컬어 대장부라 한다.

《맹자》〈등문공 장구 하(下)〉[3]

하늘은 큰 일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의 몸을 수고롭게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며

그의 처지를 궁핍하게 하니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든다.

이는 인내하는 성품으로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잘할 수 없었던 일에

보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맹자》〈고자 장구 하(下)〉[4]

전국시대의 철학자, 정치사상가로 그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맹자는 의(義)[5]를 강조하여 인(仁)[6]의 위치에 같이 놓아두므로써 공자[7]의 사상을 보충하고 발전시켰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만약 권력자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해서 백성들을 크게 괴롭한다면, 백성들은 그런 윗사람을 끌어 내려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권력자는 백성들을 위해 정치해야 되고, 백성들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 저항한다'는 의로움(義)의 개념은, 사람다움(仁)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가야할 길[8]로 여겨져서 맹자를 대표하는 핵심 사상이 된다.
주자는 그를 진(秦)나라 이전 유학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했는데, 그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흔히 공자와 묶여 공맹(孔孟)으로 언급되어 유교의 대표 인사로 꼽히고 있다. 때문에 그를 표현하는 호칭 역시 공자에 준하는 '아성(亞聖)'[9]으로 불린다. 원 문종 3년(지순至順 원년, 1330년)에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10]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 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라틴어로는 '''멘치우스'''(Mencius).[11][12]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만장과 공손추 등이 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옹호하고, "왕의 권력은 백성들이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그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매우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는 사회계약론과 굉장히 닮아 있다.[13] 사실상 근대 서양에서 사회계약론이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선행해서 등장한 민(民) 본위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14]

2. 사상



2.1. 왕도 정치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왕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하필 이로움(利)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말하시면,

대부(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이 이로울까' 말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말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의 이익만을 취하게 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15]

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안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그 왕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취함이 많지 않은게 아니건만은,

진실로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어질면서 부모님을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맹자》, <양혜왕 상(上)편>-

"왕은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는 수많은 유학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말이며, 후대의 모든 유학자들이 이 말을 달고 살았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다. 만약 윗사람이 이로움만 쫓게 된다면 아랫사람도 자신의 이로움을 쫓게 될텐데, 서로 이익을 얻고자 하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서 모두가 큰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윗사람은 '친근함(仁)과 공정함(義)'[16]을 말함으므로써 아랫사람에게 모범을 보여야 되지, 이익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7]
이는 맹자가 평소에 주장한 왕도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왕도정치란, 백성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힘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에 의한 해결이어야 한다는 것.

2.1.1. 항산


맹자가 말하였다.

"꾸준한 생업(恒産)도 없이 꾸준한 마음(恒心)을 가지는 것은 오직 선비라야 가능합니다.

'''만약 백성들에게 꾸준한 생업이 없다면, 이로 인하여 꾸준한 마음도 없습니다.'''

진실로 꾸준한 마음이 없다면 방탕, 편벽, 사악, 사치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죄에 빠지고 나서야 벌을 주게 된다면 이는 백성들을 죄로 유도한 것[18]

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죄로 유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명군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어서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충분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충분하여, 풍년에는 늘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선(善)으로 몰고가니, 백성들이 따르는 것을 가벼이 여깁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만들기가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와 자식을 양육하기에 부족해서, 풍년에도 늘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는 다만 죽음에서 구제하는데에도 넉넉치 못할까봐 두려운데, 어찌 예의로 다스릴 겨를이나 있겠습니까?

왕께서 그것을 행하고자 한다면, 왜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다섯 이랑[19]

의 집에서 뽕나무를 심는다면, 오십살 된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고

닭이나 개, 돼지와 같은 가축이 그 (번식하는) 때를 잃지 않는다면, 칠십살 된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며

백 이랑의 밭에서 그 (농사짓는) 시기를 뺏기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가족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의 가르침으로 삼가하고 효제의 의로움을 펼친다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길에서 짐을 이거나 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젊은 백성들이 굶지 않고 춥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했던 사람은 아직껏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맹자》, <양혜왕 상(上)>

물론 이러한 왕도정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먼저 펼쳐야 됨을 말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일단 해결되어야 도덕(仁義)으로 인한 왕도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도덕 정치 이전에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20]와 '''복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맹자는 강조했던 것이다.

2.2. 성선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다.

선왕(先王)께서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政治)도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람들 모두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갑자기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순간적으로 본다면, 모두 두려워 놀라고 안타까워(惻隱)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마음은) 어린아이의 부모를 내밀하게 사귀려는 까닭이 아니며, 고을 붕당과 친구들에게 칭찬이 필요한 까닭도 아니고, 그 소리가 나는 것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 보면,

측은해 하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 하거나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물러나서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음과 그름을 변별할 줄 아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어짊(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은 의로움(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은 예절(禮)의 실마리이며, 시비지심은 지혜(智)의 실마리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실마리(四端)가 있음은 사지(四肢)가 있음과 같다. '''이 네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도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맹자》, <공손추 상(上)>

모든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봤을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이 생기는데, 이러한 마음을 갈고 닦아야 된다는 것. 우리는 외부의 유혹에 의하여 악한 짓을 저지르는데, 이런 유혹이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차마 저렇게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키워간다면, 그 어떤 커다란 유혹이 내 앞에서 아른거려도 그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21]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22] [23]
당시 제후들은 맹자에게 '왕도정치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단호하다. 당신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착한 심성(사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입니다! 제후들의 어떤 변명도 맹자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맹자는 제후들의 핑게를 '성선설[24]과 사단'이라는 논리를 통해 분쇄시켰던 것이다.

2.3. 호연지기


"감히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말(言)'을 알며,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감히 묻건대 '호연지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말하기 어렵구나. 그 기운됨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곧게 길러서 해로움이 없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고,

그 기운됨은 '의로움(義)'과 '도(道)'에 짝이 되어, 이것이 없다면 위축된다.[25]

이는 의로움이 (안에서) 쌓여서 생기는 것이니, 의로움이 (밖에서) 스며들어와[26]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행동함이,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 위축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자[27]

가 일찍이 의로움을 그 바깥에 두었기에 아직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맹자》, <공손추 상(上)>

자신의 마음에 떳떳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의롭다고 생각되면 저절로 당당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의로움의 옳고 그름이,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해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로움은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이러한 '의로움'이 쌓이는 것을 '호연지기'라고 하는 것이다.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4. 역성혁명론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宣王)에게 말하기를 이와같이 하였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처자식을 벗에게 맡기고 초(楚)나라로 유람을 간 자가 있었다 하지요. 그자가 돌아와 보니 처자식이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절교해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사(士師)[28]

가 사(士)[29]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파면시켜야 겠지요."

맹자가 말했다. "사방 국경의 안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돌렸다.[30]

《맹자》〈양혜왕장구 하(下)〉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는, '탕(湯)걸(桀)을 몰아내고, 무왕주(紂)를 쳐내었다'고 하던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 된 자로서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해롭다'라 말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인하다'라 말하니, 잔인하고 해로운 사람은 '일개 보통사람(一夫)'에 불과합니다. 무왕께서 '일개 보통사람에 불과한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31]

《맹자》 <양혜왕장구 하(下)>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맹자는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 엎어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왕과 관료들은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위를 마냥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면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였다.[32]
이것은 단순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군주의 권위의 정당성이 어디까지나 백성에게 있다는 말이다. 맹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백성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天)을 백성과 동일시하여 천명(天命)의 개념을 인문주의적으로 뿌리박았고, 이 천명이 바뀌는(革) 기준을 민심으로 규정하여서 민본(民本)의 개념을 정치의 축으로 세웠다. 또한 이런 백성을 위한 정책도 말하였는데, 맹자는 정전제를 통하여 어떻게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3]
그 시대에 맹자의 민본 사상이 중요한 까닭은, 민(民)과 천(天)을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정통성에 있어서 "민심"을 중시하도록 만들어 놓은 데 있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권력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사상이다. 이후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는 동아시아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김대중은 이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아시아도 민주주의를 실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34]

3. 영향



3.1. 한국


한국에서는 특히 두드러지게 유교를 공맹의 가르침이라고 칭한다.
고려말 정치가 정도전이 《맹자》를 탐독하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웠고, 신진 무장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잇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한 사람이 절친이면서 고려 최후의 보루였던 정몽주였다는 점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지어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하였는데, 특히 언론을 개방해 임금과 신하간의 소통을 원만하게 하기위해 설치한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은 임금을 견제하는 기능을 발휘하여 신하들의 힘이 크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이 동시대의 명나라, 청나라와는 다르게 신하의 권력이 컸었던 것[35]에는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론[36]을 충실히 조선건국에 반영했기 때문이다.[37] 조선이 유독 의로움을 강조했었던 것도 정도전의 영향이자 맹자의 공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후기와 근현대에 들어서도 계속된다. 일제감정기에는 맹자가 강조했던 "의로움(義)"을 내세워 '의병(義兵)'과 '의사(義士)'[38]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과 삼일운동 역시 이러한 유교적 의로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잘못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뒤엎어 버리는 혁명들이 많은데, 2.28 학생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도 크게 보면 맹자의 뜻(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39]

3.2. 중국


기원전 2세기부터 《맹자》를 공부하는 박사 직위가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가치를 인정받은 듯하다. 《한서》고금인표에서 《맹자》는 《자사》, 《순자》, 《법언》[40] 등과 함께 2등급인 상중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후 불교가 들어오면서 한동안 그 중요성이 잊혀져 있었다가 중세(송나라)에 들어서 그런 《맹자》를 본격적으로 다시 끄집어낸 인물이 주희이다. 주자(주희)는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라는 개념을 만들어, 여기에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이 《주자집주》이다. 이후 성리학을 공부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주자의 관점으로 맹자를 바라보았기에, 책《맹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자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41]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맹자》이루장구 하편의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면 신하도 군주를 가슴과 배처럼 여기고, 군주가 신하를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원수처럼 여긴다."[42]는 구절을 보고 격노하여, 맹자를 문묘에서 들어내고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려고 했었다. 이에 신하 전당(錢唐)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두번씩이나 간하면서 말하기를, "신(臣)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도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43]라고 맹자를 두둔한다. 주원장이 그 말을 듣고는 맹자의 서적을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자신의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맹자의 역성혁명에 관련된 구절만 삭제해서 책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를 '맹자절문'이라고 한다. 주원장 사후, 정난의 변으로 즉위한 영락제가 맹자절문을 폐기함으로써 명나라에서 맹자 탄압은 약 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현대의 중국에서는 맹자를 그다지 높게 쳐주지 않는다. 아마도 역성혁명에 관련된 내용이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문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인듯 보인다. 현대 중국에서는 공자를 제일 높게 보는데, 공자는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 앞이라면 뒤로 물러서기도 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이 하고자하는 바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맹자는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또는 신분이 높은 사람 앞일지라도 바로 쓴소리 해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현명하지만 상황에 따라 뒤로 물러설 줄 아는 공자같은 사람보다는, 당당하고 떳떳해서 세상에 부끄러울께 없는 맹자같은 사람이, 독재정권의 입장에서는 더 부담스럽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3.3. 일본


일본에서는 학자들이나 알 뿐 민간에서는 아예 묻혔다. 군주 앞에서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바로 갈린다.'고 말한 맹자의 철학이 당대의 군주들에게 위험해보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에도 시대의 소설가 우에다 아키나리가 쓴 <우게쓰 이야기>에는 헤이안 시대의 승려 사이교(西行, 1118~1190)의 입을 빌어, 경전을 취급하는 일본 상인들이 중국에 방문했을 때 다른 경전은 사 가더라도 도통 《맹자》만은 사지 않아서 중국 공급상이 그 이유를 물으니, "《맹자》를 싣고 돌아가려 했던 배는 모두 가라앉았다는 소문이 팽배합니다."라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누가 퍼뜨렸는지는 알 만한데 사이교 본인도 작중 이를 인정하면서 "후세에 무식한 아랫것들이 감히 맹자를 팔아 상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능멸하고 끌어내리기까지 하는 무엄한 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언급한다. 사이교가 당시 대화하던 상대가 스토쿠 덴노의 원령이었으므로 하필 내란으로 강제로 폐위되다시피 해서 쫓겨나고 죽어 원령이 된 덴노 앞에서 맹자(=역성혁명론)를 대놓고 좋게만 이야기하기란 사이교로서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저서 《강맹차기(講孟箚記)》는 맹자를 실천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려졌다. 1859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쇼인은 '초망굴기(草莽崛起, 민초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썼는데, 이는 맹자에서 영향을 받아 일반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막부를 타도하자는 혁명 사상이다. 이것을 실행에 옮긴 수제자가 타카스기 신사쿠로, 일반 민중으로 구성한 민병대인 기병대를 창설한다.

4. 맹자의 후손


공자의 후손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관직을 배출한 인물들이 있다. 맹자의 직계 후손 중에는 후한에서 태위를 지낸 14대손 맹욱, 삼국시대 때 촉나라에서 문관을 지낸 16대손 맹광#s-2과 오나라 사람인 18대손 맹종이 있으며[44], 55대손 맹희문(孟希文)이 명나라 경태 3년(1452) 한림원 오경박사(翰林院五經博士)의 직위를 받은 이래 후손들이 직위를 세습했다. 청나라에서도 이어진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는 73대손 맹경환(孟慶桓)까지 직계로 세습되었으며, 그가 광서 20년(1894)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맹경당(孟慶棠)이 뒤를 이었다.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직위명이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으로 개칭되어 세습이 이어졌고, 2009년 대만 정부가 아성봉사관 직위를 무급제로 바꾸었다. 2014년 3대 아성봉사관이었던 75대손 맹상협(孟祥協)이 세상을 떠난 후 맹상협의 조카인 76대손 맹영계(孟令繼)가 4대 아성봉사관으로 뒤를 잇고 있다.

5. 맹자가 지은 책, 《맹자》




6. 기타


  • 맹자는 묵적[45]의 겸애설과 양주의 위아설을 극렬히 비판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편에서 "성왕이 나오지 아니하여 제후들이 빙자하고, 초야에 있는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에 가득해서,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갔네, 양씨는 자신의 지조만 위하는 위아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요, 묵씨는 똑같이 사랑하는 겸애설을 주장하였으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일세,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금수이다."라고 하였다.
  • 맹자가 연나라를 쳤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맹자는 연나라를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의 권력승계가 불합리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 연나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해서 전쟁을 해야 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연나라를 쳤다. 이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제나라에 권해서 연나라를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아니요. 심동이 연나라를 쳐도 좋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좋겠지요’하고 대답하였는데, 그가 옳다고 생각하고서 친 것입니다.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칠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하늘이 보낸 일꾼이라면 칠 수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살인자가 여기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 놈을 죽여도 괜찮겠지요?’한다면, ‘좋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만일 말하기를, ‘누가 죽일 수 있을까요?’하고 묻는다면, ‘옥관(獄官)이라면 죽일 수 있겠지요’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연나라로써 연나라를 친 것이니[46], 무엇 때문에 치라고 권하겠습니까?"」[47] 연나라의 문제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아니고 권력상의 문제가 잘못되었던 것인데 (물론 백성들이 고통받긴 했다.), 이를 핑게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친 것이니, 맹자가 볼 때 이것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연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연나라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하여금 연나라를 엎으라고 하는 민심이 아니였던 것이며,[48] 권력문제를 핑계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억지 공격한 것임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제나라의 통치에 만족했으면 연나라 사람들이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나라왕은 자신의 신하에게 '맹자한테 부끄럽구나'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 다음 편에서 맹자는 제나라를 떠난다.
  • 수능 모의고사 문제로 자주 출제된다. 아래 참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계가 양주(楊朱)[49]묵적(墨翟)[50]의 사상에 경도되어 유학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맹자는 유학의 수호자를 자임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다른 학파의 사상적 도전에 맞서 유학 사상의 이론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공자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비해 사회 혼란[51]이 가중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사회 안정을 위해 특히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맹자가 강조한 '의'는 공자가 제시한 '의'에 대한 견해를 강화한 것이었다. 공자는 사회 혼란을 치유하는 방법을 '인(仁)'의 실천에서 찾고, 인의 실현에 필요한 규범으로서의 '의'를 제시하였다.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혈연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도덕 감정인 '인'의 확산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도, '의'의 의미를 확장하여 '의'를 '인'과 대등한 지위로 격상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인'이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의'라고 하여 '의'를 가족 구성원간에도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나의 형을 공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남의 어른을 공경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유비적 확장을 통해 '의'를 사회 일반의 행위 규범으로 정립하였다. 나아가 그는 '의'를 개인의 완성 및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위해 필수적인 규범으로 설정하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은 '의'를 실천하여 사회 질서 수립과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또한 맹자는 '의'가 이익[52]의 추구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이익의 추구는 개인적으로는 '의'의 실천을 가로막고, 사회적으로는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특히 작은 이익이건 천하의 큰 이익이건 '의'에 앞서 이익을 내세우면 천하에는[53] 필연적으로 상하 질서의 문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회 안정을 위해 사적인 욕망과 결부된 이익 추구는 '의'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맹자는 '의'의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이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 행위를 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선천적으로 내면에 갖춰져 있다는 일종의 도덕 내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기의 행동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이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본래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마음이 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기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모든 인간의 마음에 갖춰져 있다고 하여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역량이 내재화되어 있음을 제시하였다.맹자는 '의'의 실천을 위한 근거와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제시한 바탕 위에서, 이 도덕적 마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래 갖추고 있는 선한 마음의 확충과 더불어 욕망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특히 생활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일에서도 '의'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목숨과 '의'를 함께 얻을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라고 주장하여 '의'를 목숨을 버리더라도 실천해야 할 가치로 부각하였다.
''- 2014년 9월 대수능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17번 ~ 21번)''

7. 둘러보기



[1] 현 산둥성 추현[2] 의로움(義)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답지 못한 행동들을 볼 때, 나는 차마 그렇게 까지는 못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데... 이렇게 사람답지 못한 행동들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것이, 맹자가 주장하는 의로움이 된다.[3] 원문: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4] 원문: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5] 의(義)는 원래 善과 我가 합쳐진 단어로 '좋은 우리 (사회)'를 뜻한다. 義는 羊과 我로 이루어져 있다. 羊은 갑골문에 '좋다'는 뜻이 있었는데, 이후 의미가 나뉘어지면서 "羊+口=좋은 말: 善(착하다), 羊+人=좋은 사람: 美(아름답다), 羊+我=좋은 우리: 義(의롭다)" 가 되었다. 따라서 공정함을 의로움이라 볼 수 있는데, 공자는 이러한 공정함은 그 윗사람이 잘 나눠주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기에, 어진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어진 사람은 주변을 잘 챙겨서(仁) 사람들에게 믿음(신뢰)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6] 仁=人+人으로 '사람 인' 두개가 모여서 만들어진 회의자 이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 君君臣臣父父子子를 해석할 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仁=人+人은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라고 해석한다. 사람다움을 뜻한다.[7] 공자는 주변과 친하게 지내서 서로를 아끼고 챙기자는 인(仁)을 중요시 여겼다. 이렇게 사람을 잘 챙기는 어진이를 높혀서 상하관계가 만들어지면, 높은이는 모범이 되고 낮은이는 그것을 본받게 되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또한 너무 가까이 지내면 함부로 대하는데 이를 삼가하게 하고, 상하관계에서 높고 낮음의 순서를 매긴 것을 예(禮)라고 하였다.[8] 《맹자》 이루상(離婁上)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9] 성인(聖人)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으로 주자(朱子)가 칭하였다. 본래 이 칭호는 안회(顔回)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한 말의 조기(趙岐)가 제자서(諸子書)의 하나로 취급되던 《맹자》의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맹자를 "직이불거 곡이불굴 명세아성지대재자야(直而不倨, 曲而不屈, 命世亞聖之大才者也.): 곧으면서도 거만하지 아니했고, 굽으면서도 비굴하지 아니했던, 일세의 걸물로서 성인에 버금가는 큰 재목이었다."라 평하여 최초로 맹자를 아성의 느낌으로 표현하였고, 후대의 주자가 이를 수용한 것이다. 아성의 칭호는 조기와 주자에게서는 다만 '성인에 견줄 만한 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나, 성리학적 도통론(道統論)에 근거해 맹자를 성인의 반열로 공인한 원조(元朝)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제2의 성인', 즉 '공자(孔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는 의미가 정착되었다.[10] 추(鄒)라 함은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존재했던 맹자의 고향 나라의 이름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 추나라를 노(魯)나라의 종속국으로 비슷하게 여기고 있지만, 당장 《맹자》 본편만 참고하더라도 '추나라와 노나라의 교전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나라는 다만 소국이었을 뿐 분명한 자주권을 확보하고 있던 노나라의 접경 국가였다고 여기는 것이 타당하다. 국(國)이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뜻. 아(亞)라고 함은 '버금가다'는 의미로, '공자께 버금가시는 분'이라는 극존숭(極尊崇)의 표현이다. 성(聖)이라 함은 앞의 '아'를 받아 '~ 성인(聖人)'의 의미로 연결되어 '공자 다음가시는, 제2의 성인', 즉 '아성(亞聖)'을 맹자의 고유 칭호로 만든 것이다. 공(公)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추나라(鄒國)를 언급한 것은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맹자는 자기 고향 나라의 영주로 봉해진 셈.[11] 이 표현은 대략 16세기 예수회의 문서에서부터 비롯되므로 고전 라틴어 독법이 아니라 교회 라틴어 독법을 따라 'ci'를 '키'가 아닌 '치'로 읽는 게 옳을 듯하다. 영어 발음으로는 물론 'mɛnʃiəs(멘시어스)'라 한다.[12] 공자(Confucius)와 함께 라틴어화된 이름으로 널리 불리는 둘 뿐인 중국 학자다. 묵자(墨子) 역시 'Micius'로 칭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진 않는다.[13] 루소는 맹자의 성선설과 비슷하고, 홉스는 순자의 성악설과 비슷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서 맹자와 순자는, 홉스나 루소랑도 전혀 비슷하지 않다.[14] 다만 맹자의 주장을 민주주의라고 하기는 힘들고 민본주의民本主義라고 해야 옳다. 다만 김대중대통령은 이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동양도 민주주의를 성공할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될것이라 주장했으며 실제로 한국에선 맹자와 민주주의를 연관시키는 경향이 강하다.[15] 만 개의 수레. 여기서 '승'은 수레를 말한다. 만승의 나라는 천자국을 뜻한다. 천승은 제후국. 백승은 제후국의 신하인 경이나 대부를 말한다.[16] 여기서 어짐(仁)은 '가까운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 '화목한 공동체'를 뜻하며, 의로움(義)는 '利(이로움)의 사익과 반대'되는 공익의 공정함을 말한다.[17] 맹자는 이렇게 공자의 인(仁) 사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인 덕목의 위치에 있었던 의(義)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인(仁)과 나란히 두어 인의(仁義)라 명명하였다.[18] 원문에는 '罔'으로 되어 있다. 즉, '그물질하는 것'을 뜻한다. '죄를 짓게 함정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의역하여 '죄로 유도한 것'이라고 번역하였다.[19] 畝: 백 평을 뜻하는 땅의 면적단위. 오묘는 오백평을 말한다.[20]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 꾸준한 생업(재산)이 없이는 도덕정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21] 사단(四端)을 말한다. 사단은 타고난 감정이다. 후대의 주자는 이성은 타고난 것(性)이고 감정은 그 이성이 흔들리는 것(氣)이라고 하였지만, 자사와 맹자 시대에 적혀진 《성자명출》에 따르면, 타고난 것(性)은 기(氣)인 것으로 바로 감정을 말한다. 즉, 주자는 성리(性理, 性=理)학인데 비해, 자사와 맹자는 성기(性氣, 性=氣)학인 셈. 이점에 유의해서 맹자의 성선(性善)설을 파악해야한다.[22] 이에 비해, 후대의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였고, 본성으로부터의 선(善)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善)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에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던 맹자가, 수많은 배신과 전쟁이 벌어졌던 전국 시대에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다는 걸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알면서도 맹자가 성선설 주장한 것은, '사람은 가만히 놔 두면 착해진다~' 이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은 선해야 된다'는 당위를 부여한 거라고 봐야된다. 맹자는 순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단순히 '선함'을 배운다고 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해야 됨을 맹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또한 전국 시대는 전쟁과 기아로 교육을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못 배운 무지랭이 백성들도 그 본성을 살피면 스스로 착해질 수 있다는 데서 맹자의 위대함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배운 놈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한다. 못 배운 백성도 자신의 본성 만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성선과 그렇게 "못 배운" 백성을 살피지 않으면 아무리 배운 군주라도 뒤집어 엎을 수 있다는 것이 역성혁명인 셈.[23] 또한 맹자는 "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네 가지 실마리가 있는데도 스스로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변명을 원천 차단하는데 비해서, 순자의 성악설은 환경이나 교육을 받지 못해서 나빠진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 시대 군주들이 얼마나 '그 왕도정치라는 것은 못하겠다'고 말했으면, 맹자가 저런 말까지 하는가 싶을 정도.[24] 맹자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것은 배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인의(仁義)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아는 것이라고 맹자는 주장한다. 이를 '양지', '양능'이라고 하며, 성선설의 기초가 된다. 《맹자》, <진심 상(上)>에 「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잘하는 것은 '''양능'''(良能)이고, 생각해보지 않고서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다. (손에) 이끌려가는 어린아이라도 그 가까운 이를 사랑할 줄 모르지 않고, 자라나서는 그 형 공경할 줄 모르지 않는다. 가까운 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짐(仁)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의로움(義)이니, 다른 것 없이도 천하에 달성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25] 원문에 '餒' 로 표현되어 있다. 餒는 굶주림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에 떳떳하지 못하면 후달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쪼들린다. 후달린다.'는 표현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비슷한 정제된 말로 '위축된다.'를 사용했다.[26] 원문에 '襲' 이라고 하였다. 뜻은 '엄습할 (습)' 이다. 즉, 외부에서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27] 告子: 성무선악설을 주장했던 전국시대 사상가. 맹자는 '고자'의 사상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성선설을 드러내었다.[28]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裁判官).[29] 이 경우에는 하위 사법관(司法官).[30] 맹자는 "왕을 잘라야겠지요."라는 대답을 왕에게 강요한 셈이다. 제선왕이 쫄아서 대답을 회피한 것(...).[31] 아무리 왕의 자리에 있어도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는 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셈. 그러한 왕은 일개 보통사람일 따름이므로, 신하들이 '나쁜 짓을 하는 일개 필부'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왕의 입장에서는 매우 무서운 말이다.[32] 사실 제선왕 입장에서는 맹자의 혁명 이론은 불쾌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선왕이 속한 제나라의 전씨 왕조는 이미 여씨 왕조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벌인 '찬탈자'이기 때문이다. 제선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조상들이 벌인 찬탈을 긍정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근데 이와는 별개로 나중에 맹자가 아예 직접적으로 "왕이 못나면 혈족의 경卿들이 갈아치울 수 있지요." 하자 제선왕은 얼굴이 씨벌개져서 씩씩댔다(...)고 한다. 과거의 혁명을 합리화하는 것은 자기 권력을 강화시켜주지만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면 자기 권력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 이런 것은 현재에도 볼 수 있다.[33] 애초에 맹자는 당대 패권자들에게 정책 파트너로서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냥 바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초청한 군주들도 그 말을 실제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백성과 함께하기 위한(여민동락) 군주의 도덕적 근본을 요구하는 것이다.[34] 비록 맹자의 시대에 그의 학설이 제도적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고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맹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전국시대는 까마득한 옛날이었고, 맹자의 주장을 당시의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유학자들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자의 근본적인 메세지는 조선 시대에 유효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다.[35] 청나라의 강희제는 조선을 두고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고 말하였을 정도.[36] 제대로 정치하지 않으면 윗사람을 갈아엎어야 된다는 것.[37] 정도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던 간에,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맹자의 사상을 조선건국에 오롯이 반영하려고 했었던 점은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는가와는 무관하게, 그의 저술과 영향으로 조선에서 맹자를 공자만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하다.[38]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을 가르키는 '의로운 선비'를 뜻한다.[39]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혁명을 했든, 그것이 실제로 살기위해서이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이든 간에 그 이론적 바탕의 뿌리는 맹자의 '의로움'. '나쁜 것을 볼 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는 것. 민중은 자신의 이익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민중들을 이해하며 의로움을 외치는 일부에서부터 서로서로가 모여 커다란 전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에서, 그 맹자의 의로움이 주는 이론적 함의가 결코 적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40] 양웅이 쓴 책인데 논어의 형식을 모방했다. 그래서 양웅을 존경한 이들에 의해 '한나라의 논어'라고 불리기도 했다.[41] 다만, 주자가 맹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했다고는 볼 수 없는데,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와는 달리, 주자의 이기론은 기(氣)에 깨끗함과 혼탁함이 있어서 천하고 귀함의 신분질서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 주자가 맹자를 중히 여긴 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유학의 적통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맹자의 논리는 오히려 반체제적인 면을 보였다. 반면, 주자의 논리는 "학문이 높아 과거제에서 성공한 자는 인격에 있어서도 자신의 혼탁함을 극복한 것이다"고 하여, 귀함과 천함이 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기존 체제에 매우 친화적인 주장이었다. 주자의 이기론이 다만 후대에 악용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주자는 이기론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천하고 귀함의 차이를 설명하였음이 분명하기에, '귀천의 분류'가 상관없다는 유학자들은 주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한다.[42] 君之視臣如手足 臣視君如腹心 君之視臣如土芥 臣視君如寇讐.[43] 臣爲孟子死 死有餘榮[44] 참고로 이들은 활동년대가 비슷하다.[45] 묵가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사람.[46] 연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말한 것이다.[47] 齊人伐燕 或問曰 勸齊伐燕 有諸 曰未也 沈同問燕可伐與 吾應之曰可 彼然而伐之也 彼如曰 孰可以伐之 則將應之曰爲天吏則可以伐之 今有殺人者 或問之曰人可殺與 則將應之曰可 彼如曰 孰可以殺之 則將應之曰爲士師則可以殺之 今以燕伐燕 何爲勸之哉. 《맹자》 공손추 下8.[48] 옛날 주나라 무왕과 문왕이 폭군 주왕을 정벌할 때, 은나라 백성들은 기꺼이 폭군 주(紂)를 처벌하기 원했으며, 은나라가 주나라에 의해서 빨리 정벌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 연나라는 제나라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아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옛 성군들이 폭군을 정벌한 것이랑 다른 경우라고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쳐들어가 전쟁을 벌인 것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였지, 폭군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만약 그럴 셈이 었다면 연나라 백성의 마음을 먼저 얻으려고 노력했어야 됐을 것이다.[49] 도가 계열의 사상가로, '정강이 털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리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맹자는 이러한 '위아주의(爲我主義)'를 '무군(無君)의 도(道)(임금을 업신여김: 무정부주의)'로 평가했다.[50] 묵가의 창시자로, '근친원소(近親遠疎)의 차이를 두지 말고 만인을 평등히 애호할 것(겸애(兼愛))'을 주장했다. 맹자는 이러한 '겸애주의兼愛主義'를 '무부無父의 도(아버지를 업신여김: 가족 해체주의)'로 평가했다.[51] 춘추시대에 난립하던 제후국들이 크게 일곱 개로 정리되고 경제적으로도 일약 발전을 한 전국시대였지만 천자국인 주나라의 의미가 아예 없어진 시기이기도 하기에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를 이상적으로 본 유가 입장에선 춘추시대보다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52] 단순히 이익 전반을 모두 말한 것이 아니다. 맹자는 인의(仁義)로부터 파생된 이익(利)을 당연히 긍정했다. [53] 원문에는 「천하는」이라고 되어 있다. 문법적 실수로 간주하고 이같이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