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1세(후우마이야 왕조)

 


1. 개요
2. 치세
2.1. 톨레도의 반란
2.2. 사라고사, 팜플로나 원정
2.3. 1차 아스투리아스 원정
2.4. 바누 카시 연맹의 반란
2.5. 압둘 라흐만 이븐 마르완의 반란
2.6. 2차 아스투리아스 원정
2.7. 사라고사 수복
2.8. 우마르 이븐 하프순의 반란


1. 개요


محمد بن عبد الرحمن الأوسط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라흐만 알 아우사트

재위 852년 9월 ~ 886년
생몰 823년 ~ 886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5번째 아미르. 9세기 내내 안달루스에 만발했던 반란이 그의 치세에 하위 계층인 물라디 (이슬람 개종한 서고트인)와 모사라베 (아랍화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터져나오며 위기를 맞았다. 무사 이븐 무사는 전자, 톨레도의 반란은 후자에 속하였고 압둘 라흐만 이븐 마르완과 우마르 이븐 하프순의 반란은 복합적인 성격을 띠었다. 무사 이븐 무사와 톨레도의 반란은 겨우 진압했지만 서부의 이븐 마르완과 남부의 우마르 이븐 하프순이 일으킨 반란은 그의 치세를 넘어 증손자 압둘 라흐만 3세에 이르러서야 진압된다. 이러한 반란에 무함마드 1세는 전쟁 혹은 회유의 전략적으로만 접근하였고, 근본적 원인인 불평등 완화나 차별 철폐 등의 체제 개혁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후대에도 반란이 지속되었다. 다만 후에 나바라 왕국이 되는 팜플로나를 복속시킨 것은 업적으로 평가되고, 왕실 내부의 음모가 없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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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1세 대에 주조된 디르함 은화
무함마드는 코르도바 궁정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20대 초반에 그는 북쪽의 군벌 바누 쿠시의 무사 이븐 무사에 대해 원정하여 투델라를 함락시키고 그를 복속시켰다. 하지만 이후로도 무사는 3차례 더 반란을 일으키며 결국 사라고사를 얻어낸다. 그러한 상태에서 제위에 오른 무함마드 1세는 더 많은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라고사, 톨레도, 메리다의 삼진이 그의 치세에 모두 반란을 일으켰으니 말 다한셈. 그외에 치세 초반부에는 선대부터 지속되던 기독교도들의 순교가 이어졌다. 859년까지 24명의 시성된 순교자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성직자였지만 베르베르계인 경우나 무슬림인 동생에게 배신당해 처형되는 등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856년에는 아미르의 감찰관 아르기미르가 배교를 선언하고 죽기도 하였다. 아우레아와 루크레티아처럼 무슬림 집안의 딸들이 배교 후 순교한 경우도 있었는데 후자의 어린 나이는 여론의 공분을 샀다.[1]

2.1. 톨레도의 반란


즉위 직후부터 무함마드 1세는 북쪽 변경의 혼란에 직면하였다. 압둘 라흐만 2세가 사망한 직후 그간 차별과 부패한 당국에 시달리던 톨레도 시민들이 군대를 편성해 반란을 일으켰다. 우마이야측 총독은 코르도바의 톨레도측 인질들과의 교환을 위해 억류되었다. 비슷한 시기 북쪽의 무사 이븐 무사는 알베다에서 2일간의 전투 끝에 바스크인들을 격파하며 에브로 강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무리하게 양면 전선을 추진하기 보다 무사를 상부 절도사에 해당하는 사라고사의 왈리 (총독)으로 봉하며 회유하였다. 자칫하면 3진 중 2개를 잃을 수 있었기에 한때나마 코르도바에 충성했고 무슬림인 무사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톨레도는 인근의 경쟁 도시 칼라트라바와의 전쟁에 나섰다. 853년, 톨레도 군은 칼라트라바를 공격해 그 성벽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추방하였다.
이에 코르도바의 중앙군이 파견되어 칼라트라바의 성벽을 복구하고 도시의 방어를 위해 주둔하였다. 무함마드는 토벌군을 편성해 파병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톨레도는 아스투리아스의 오르도뇨 1세 및 팜플로나의 가르시아 이니게스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854년) 무함마드 역시 사라고사의 무사와 함께 정예병을 편성해 친히 이끌고 북상했는데, 두 군대는 톨레도 동남쪽 15km의 과잘레테 강[2]에서 만났다. (현 비야미나야 일대) 이븐 칼둔에 의하면 아미르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본 톨레도-기독교 연합군은 강을 건너 우마이야 군을 공격하였다. 짧은 전투 끝에 무함마드는 남쪽으로 후퇴하였고, 연합군은 그를 추격하였으나 아랍 군대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다. 이 매복이 계획된 것인지 사령관들의 기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톨레도-기독교 연합군은 약 8천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었다고 한다. 그들의 수급은 코르도바에 보내져 안달루스 전역에 조리돌림 되었다.
패전 후에도 톨레도는 항복하지 않았다. 톨레도 수복에 있어 우마이야 군은 직접적인 공성전 대신 인근 요새들에 기병들을 배치해 도시를 외부로부터 봉쇄하는 지구전에 나섰다. 3년간 버티던 톨레도 인들은 857년 서쪽의 우마이야 거점 탈라베라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듬해 무함마드는 재차 친정에 나서 톨레도로 향하였고 도시로 이어지는 다리를 파괴하였으나 함락은 실패하였다. 결국 859년, 무함마드는 톨레도와 휴전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톨레도는 비록 적대적인 이웃 도시들에 둘러쌓이긴 했지만 20년간 사실상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다만 반란을 주도한 주교 에우제니오는 감금된 후 처형되었다. 한편 바누 카시의 무사는 과달라세테 전투를 도운 후 855년 우마이야 군을 이끌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라바 공격을 지휘하였다. 이듬해에는 단독으로 바르살로나와 테라사를 습격하였다.그리고 무함마드는 톨레도와의 강화를 체결한 후 무사의 아들 룹을 그 왈리로 임명하였다.

2.2. 사라고사, 팜플로나 원정


형식적이긴 하지만 이로써 바누 카시는 삼진 중 2개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칼라타유드, 그리고 (명목상) 톨레도까지 안달루스의 1/4를 다스리게 된 무사는 후우마이야조와 아스투리아스에 이어 스페인 제3의 군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859년, 무사는 바이킹 군대가 자신의 영토를 지나 팜플로나를 공격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로 인해 팜플로나 국왕 가르시아 이니게즈가 사로잡혔고, 그는 7만 혹은 9만 디나르의 몸값을 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써 팜플로나와 바누 카시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해 4월 가르시아는 아스투리아스의 오르도뇨 1세와 연합하여 2차 알베다 전투[3]에서 무사와 맞섰다. 연합군이 승리하였고, 무사는 바스크인 사위마저 잃고 패주하였다. 이를 기회로 삼은 무함마드는 860년에 무사를 왈리에서 해임하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북상, 바누 카시의 영토를 통과해 팜플로나를 침공하였다.
무함마드는 팜플로나를 약탈하고 왕자 포르툰 가르세스를 사로잡아 코르도바로 개선하였다. 이후 팜플로나는 코르도바에 조공하였고, 포르툰 가르세스는 20년간 인질로 지낸 끝에 880년에야 팜플로나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편 861년 무함마드는 무사에게 바르셀로나 원정을 돕게 하는 등 제후로 대하였다. 이듬해 무사는 베르베르인 사위 아즈라크 이븐 만틸과 대립하였는데, 그의 거점인 과달라하라를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거적에 뉘어 투틸라로 후퇴하였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862년 9월 26일) 무사의 사후 톨레도 총독이던 아들 룹은 아스투리아스의 오르도뇨 1세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바누 카시의 세력은 급속히 축소되어 871년 다시 기록에 등장할 때에는 투델라 서북쪽 아르네도 일대만 통치하는 군소 왕조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란은 잠시 수그러들었을 뿐, 무사의 아들들은 기독교 세력과 연대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3. 1차 아스투리아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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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엽 이베리아 반도 서부의 국경
861년까지 톨레도와 동북면이 주된 전장이었다면 이후부터는 서북면으로 전환되었다. 854년 톨레도의 반란을 도왔던 아스투리아스의 오르도뇨 1세는 이후 후우마이야 조를 자극하지 않으며 내치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안달루스의 내란이 지속되는 틈에 한세기 이상 버려져 있던 도우로 무인지대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국토 확대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856년, 이전까지 우마이야 군의 방해로 이민에 실패했던 레온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점점 강해지는 아스투리아스를 경계한 무함마드는 865년 장남 알 문디르를 사령관으로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알 문디르는 도우로 협곡을 원정했지만 오르도뇨 1세가 전투를 회피하며 별 소득을 보지 못하였다. 다만 코르도바로 귀환하던 중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백작 로드리고를 격파하고 국경을 북쪽으로 확대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알 문디르는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자주 출병하였다.
866년, 오르도뇨 1세가 사망하자 아들 알폰소 3세가 아스투리아스 국왕이 되었다. 후에 엘 마그노 (대왕)으로 추증된 그는 868년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점령하며 레콩키스타에 나섰다. 이듬해엔 팜플로나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었고, 871년에는 더욱 남하하여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점령하였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4] (후우마이야 조는 내전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987년에야 도시를 수복하였다) 다만 이때는 완전한 점령은 아니었고 포르투의 경우 후우마이야 조에 적대적인 무슬림 제후인 사둔 알 수룬바키가 복속한 정도였다. 후우마이야 조에 있어 코임브라의 상실은 서부 국경에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북부와 서부 지방에 더욱 시급한 반란들이 발생하며 코르도바 정부는 5년이 넘도록 반격을 나서지 못하였다. 안달루스의 비아랍인들이 일으킨 내분은 레콩키스타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2.4. 바누 카시 연맹의 반란


무사의 죽음 이후 잠잠하던 동북면에서 870년 이전 사라고사 총독의 손자인 아므루스 이븐 우마르가 우에스카 태수 무사 이븐 갈린드를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물라디였던 아므루스는 팜플로나 왕국과 동맹하였고, 이에 압둘 가피르 이븐 압둘 아지즈 휘하의 토벌군이 파견되었지만 그는 사라고사 성문 앞의 일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숨죽이고 있던 무사의 장남 룹 역시 팜플로나와 동맹하고 봉기하여 부친의 왕국 재건에 나섰다. 무사에게는 룹 외에도 이스마일, 무타리프, 푸르툰의 아들들이 있었다. 그중 우선 무타리프가 우에스카 시민들의 초청으로 도시를 접수하였고, 872년 1월 이스마일은 사라고사에 입성하였다. 룹은 이스마일과 합류한 후 함께 우에스카와 레리다 사이의 몬존을 점령하였다. 그후 이스마일은 근교인 바르바스트로 (바르비타니야)의 바누 발라프와 결혼동맹[5]을 맺었고 룹은 서쪽 비게라 요새를 장악, 방어 시설을 복구하였다.
마지막으로 막내 푸르툰은 투델라를 점령, 그 총독을 아르네도에 감금했다가 도주를 시도하자 처형하였다. 이렇게 무사의 왕국은 네 아들들에 의해 부활하였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개입에 앞서 무함마드는 아랍 계인 바누 투지브에게 (무사의 옛 영토 중 점령되지 않은) 칼라타유드를 하사하며 바누 카시와 맞서게 하였다. 그리고 873년, 무함마드는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우선 휴전이 유효함에도 톨레도를 포위한 후 지도자에게 총독위를 제안해 매수하였고, 톨레도를 복속시켜 후방이 안정되자 바누 카시의 급성장으로 주역에서 밀려났던 아르무스에게 충성을 요구하였다. 정군의 위세를 실감한 그는 우에스카를 공격해 무타리프와 그 일족을 사로잡아 바쳤다. 그 공로로 아르무스는 우에스카의 태수로 봉해졌고, 후에 톨레도 총독까지 역임한다. 이후 무함마드는 무타리프 등의 포로와 회군하였는데, 구출을 위한 다른 형제들의 공격에도 그는 코르도바에서 세 아들들과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2.5. 압둘 라흐만 이븐 마르완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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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호스의 이븐 마르완 동상
829년 이후 잠잠했던 서부의 메리다에서 868년 총독 마르완 이븐 유누스의 아들 압둘 라흐만 알 잘리키 (갈리시아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젊은 시절 코르도바에서 인질로 있었는데, 그의 용기와 지모를 높히 평가한 무함마드의 신임을 얻어 근위대 장교까지 오른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궁정의 하지브 (재상)인 하심 이븐 압둘 아지즈는 그를 불신하여 대립하였고, 어느날 조정에서 하신은 너는 개보다 못한 존재라며 압둘 라흐만의 뺨을 때리는 수모를 주었다. 분노한 압둘 라흐만은 일단의 추종자들과 코르도바를 빠져나와 메리다로 향하였다. 물라디에 수피이던 그는 아랍인들로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굴욕을 갚아주자며 동료 물라디와 모자라브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무함마드는 토벌군을 파견하였고, 메리다가 항복하자 압둘 라흐만은 코르도바로 압송되어 7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875년, 메리다에 귀환한 압둘 라흐만은 가문과 그 일원의 지원을 받아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메리다 동남쪽 20km의 알랑게 성채에 근거지를 정했는데, 우마이야 군이 당도하여 3개월간의 포위 끝에 압둘 라흐만은 항복하였다. 다만 옛 친구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무함마드는 그에게 다시는 자신에 대해 거병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메리다의 서쪽 바다호스를 영지로 주었다. 바다호스 (바탈요스)는 비옥하지만 개발되지 않은 곳이었고, 압둘 라흐만은 그곳에 세우고 요새화하였다. 이후 세력을 확보한 그는 후우마이야 조의 지속된 혼란을 틈타 알 가르브 (안달루스 서부)에 대한 약탈전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도발에 대해 무함마드는 압둘 라흐만의 원수인 재상 하심을 대장으로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정보전에 능했던 압둘 라흐만은 하신이 아직 요새화가 완료되지 않은 바다호스를 기습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군대를 통솔하여 남쪽 몬살라우드 산지로 향하였다.
이후 압둘 라흐만은 알폰소 3세에 도움을 청하였고, 그는 봉신인 포르투의 사둔과 함께 남하하였다. 875년 말엽 벌어진 전투[6]에서 사둔의 기만술에 당한 우마이야 군은 흩어져버렸고, 사령관 하심은 포로가 되었다. 상처에 뒤덮힌 하심은 압둘 라흐만에게로 끌려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옛 원수에 대해 보복하는 대신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알폰소 3세에게 보내주었다. 알폰소 3세는 재상에 대해 10만 두카트의 몸값을 요구했고, 코르도바 당국은 절반을 납부하였다. 남은 절반을 떠안은 하심은 지금은 무일푼이니 코르도바에 가서 마련하겠다 하였고 동생과 아들, 조카를 인질로 남겨둔 후 돌아가 약속대로 납부하였다. 하심은 압둘 라흐만에게 더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겠다 약속했으나 자유를 찾은 후 재차 원정을 계획하였다. 그러자 압둘 라흐만은 코르도바에 사절을 보내 원정군이 오면 바다호스를 불사르고 산지에서 결사 저항하겠다 하였고, 이에 무함마드는 원정을 취소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코르도바에선 바다호스 원정이 추진되었다. 이를 경계한 압둘 라흐만은 876 ~ 877년에 그는 부친의 이름을 딴 마라벙 성채를 지었는데,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바다호스를 떠나 국경 지대인 도우로 강변의 카라카르 성채로 피신하였다. 그후 압둘 라흐만은 아스투리아스를 도와 코임브라의 바누 문디스 축출을 도왔다. 알폰소 3세에 있어 압둘 라흐만의 공국은 아스투리아스와 후우마이야 조 간의 완충지이자 동맹으로써, 적극적인 영토 확장과 사민 정책에 나섰다. 이에 압둘 라흐만보다 알폰소 3세가 더 위협적임을 깨달은 무함마드는 아스투리아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듬해 우마이야 군이 다가오자 압둘 라흐만은 알폰소 3세의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884년에야 바다호스로 귀환한 그는 무함마드와 협상을 통해 알 가르브에 대한 지배권을 얻어내었다. 890년경 압둘 라흐만은 사망하였고 아들 마르완이 계승하였다.

2.6. 2차 아스투리아스 원정


앞서 살펴보았듯, 870년을 전후로 아스투리아스의 남진이 계속되었음에도 무함마드는 연이은 반란으로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878년에야 왕자 알 문디르가 원정에 나섰다. 이번 목표는 빼앗긴 코임브라와 오비에도를 대체할 기세로 아스투리아스의 중심 도시로 급부상하던 레온이었다. 우마이야 군대는 살리드 이븐 가님과 알 문디르에게 양분되어 각각 오르비고와 레온 방면으로 진군했데, 알폰소 3세는 두 군대의 합류를 막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더 약한 살리드의 톨레도 병력을 폴보라리아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알 문디르가 철수하였는데, 알폰소 3세는 그를 발데모라 협곡에서 기습하여 격파하였다. 코임브라와 포르투에 대한 서부 방면의 공격 역시 코임브라 백작 구티에레즈에 의해 격퇴되었다. 충격적인 결과에 무함마드는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3년의 휴전을 제안하였고, 알폰소 3세도 이를 수용하였다. 코르도바에서 휴전 제의가 나온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휴전 후 알폰소 3세와 구티에레즈는 압둘 라흐만과 사둔의 도움으로 코임브라 일대의 아랍 정주민인 바누 다니스를 축출하고 갈리시아 인들로 대체하였다. (879년) 그외에 브라가, 비세우, 라메고 등지에도 재건과 이주가 이루어졌다. 한편 무함마드는 갈리시아에 대한 수륙 양면의 공격을 위해 함대를 준비했는데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알폰소 3세는 압둘 라흐만과 함께 타호 강을 따라 남하하여 과디아나 강가의 옥시퍼 산에서 우마이야 군을 격파하였다. 883년 알 문디르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은 알폰소 3세와 동맹한 바누 카시[7]의 영토를 침공하였다. 다만 짧은 전투 후 포로 교환이 제안되자 수용하고 철수하였다. 그리고 884년 상호 내란을 겪던 무함마드와 알폰소 3세는 공식적으로 휴전에 합의, 후자의 코임브라 ~ 포르투 영유가 인정되었다. 같은해 알 문디르는 외부의 개입 없이 바다호스를 점령, 협상 끝에 압둘 라흐만에게 돌려주었다.

2.7. 사라고사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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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말엽 바누 카시의 영토. 파란 선 두 개는 884년 이후의 영토
873년의 우에스카 원정 이후 바누 카시 연맹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874년에는 투델라의 푸르툰이 사망하였고, 이듬해엔 큰 형이자 지도자였던 룹이 비게라 성채에서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후 남은 무사의 아들 이스마일과 조카 무함마드 이븐 룹이 바누 카시 연맹을 이끌었다. 무함마드 이븐 룹은 879년과 882년 우마이야 군의 사라고사 공격을 격퇴하였다. 특히 후자는 차기 아미르인 알 문디르가 지휘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코르도바의 재상 하심에게 아스투리아스에 대한 동맹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하심은 875년 이후 아들이 알폰소 3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상황이었기에 거절하였다.[8] 이에 무함마드 이븐 룹은 역으로 아스투리아스 및 팜플로나와 동맹하였고, 알폰소 3세의 장남 오르도뇨를 사라고사에서 교육시켜 주었다. 이후 그는 가문의 주도권을 놓고 숙부 이스마일과 대립했는데, 882년 칼라호라에서 7천 대군을 이끌고 도전한 후자를 격파하고 감금하며 우위를 확정하였다.[9]
이후 이스마일은 레리다와 몬존의 영토에 만족하였고[10] 884년 바르셀로나 백작 윌프레드의 공격을 격파, 추격 섬멸하였다. 같은해 무함마드는 사라고사 수복을 위해 대군을 둘로 나눠 파견하였다. 중과부적일 것이라 판단한 무함마드 이븐 룹은 프랑크의 마르크 중 하나인 파야르스-리바고르사 백작 레몽 1세에게 도시를 매각하였다. 이로써 사라고사는 일시적으로 기독교도 왕공의 수중에 놓였지만, 곧 무함마드 이븐 룹의 예상대로 우마이야 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로써 바누 카시 연맹의 영토는 사라고사를 사이에 두고 무함마드 이븐 룹이 다스리는 서부 (아르네도, 칼라호라, 비게라)와 이스마일이 다스리는 동부 (레리다, 몬존)로 분리되었다. 이후 무함마드 이븐 룹은 885년 카스티야를 침공해 백작 디에고 로드리게즈를 전사시키고 이듬해 알라바를 공격, 많은 기독교도들을 죽였다. 동시에 그는 최소한 무함마드 1세 생전에는 후우마이야 조와 우호를 유지하였다.

2.8. 우마르 이븐 하프순의 반란


아스투리아스가 남진을 지속하던 879년, 안달루스 남부 말라가 부근에서 도적단에 속해 있던 30살 무렵의 우마르라는 자가 당국에 사로잡혔다. 사우다 (흑인 계열) 혹은 서고트 계로도 추정되는, 모호한 혈통을 지닌 그는 살인까지 저지른 중범죄자였다. 하지만 살인 여부를 보고받지 못한 말라가 총독은 단순히 벌금형만을 내렸다. 이후 그 총독은 해임된다. 풀려난 우마르는 모로코로 건너가 기술을 배우다가 다시 안달루스로 돌아와 후우마이야 조에 반란을 일으킨 비적단에 들어갔다. 곧 그는 조직의 지도자 자리로 부상하였고, 무리를 이끌고 남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보바스트로 (بُبَشْتَر, 부바스타르) 고성에 근거지를 차렸다. 우마르는 그곳에 성을 세우고 인근 도시 아르달레스를 요새화 하였다. 근거지를 마련한 그는 다른 반란들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높은 세금에 불만을 품은 물라디와 모자랍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후 우마르는 점진적으로 말라가와 하엔, 그라나다, 세비야, 카디스 등지에 여러 성채와 땅을 매입 혹은 점령하였다. 이를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무함마드는 882년 친정에 나섰으나 패하였고, 동맹으로 참전한 팜플로나 국왕 가르시아 이니게즈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우마르의 위세는 더욱 상승하여 883년까지 안달루스 남부와 서부의 모든 군소 반란 조직들이 그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세력이 강성해지자 우마르는 요새화된 보바스트로 대신 평지의 도시인 폴레이 (불라이, 현 아귈라르 델라 프론테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은 코르도바에서 불과 30km 떨어진 곳이었다. 이러한 위협 때문에 코르도바 정부는 서부의 반란자 압둘 라흐만과도 휴전을 맺어야 했던 것이다. 886년, 우마르가 새 거점에 거대한 성채 건설에 매진할 무렵 63세의 아미르 무함마드는 근심을 품은 채로 사망하였다. 장남 알 문디르가 아미르 직과 반란 진압의 과제를 함께 계승하였다.

[1] 이러한 연이은 순교는 모자랍들의 사회 저항이자 후우마이야 당국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상징한다[2] Arroyo de Guazalete[3] 기독교도들에게 이 전투는 전설적인 클라비호 전투로 전승되었다[4] 당시에는 이정도만 해도 나름 지역 거점 도시 정도였다. 이슬람 지배 하의 포르투갈에서 코임브라 (아랍어로 قُلُمْرِيَة‎, 쿨루므리야)는 리스본, 베자, 에보라, 산타렝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서부 국경의 방어 거점이었다.[5] 그 부족장인 압둘라 이븐 잘라프의 딸 사이다와 결혼함[6] 지형의 이름을 따 시에라 델라 에스트렐라 ( Sierra de la Estrella) 전투라고도 불림[7] 당시 알폰소 3세의 아들 오르도뇨가 그 궁정에서 수학 중이기도 했다[8] 다만 하심은 자신이 인질로 데리고 있던 이스마일 이븐 무사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과 교환할 수 있었다.[9] 이때 이스마일 측에 가담했던 푸르툰의 4형제 모두가 살해되었다.[10] 몬존으로 철수해 레리다를 재건했다고도 하고 사로잡혔다가 석방되어 레리다를 돌려받은 것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