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라 왕국

 



'''나바라 왕국'''
'''Nafarroako Erresuma'''
(바스크어)
'''Royaume de Navarre'''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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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824년 ~ 1620년
위치
나바라(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수도
팜플로나[1]
정치체제
봉건군주제
국가원수
[2]
주요 국왕
안초 3세(1004~1035)
알폰초 1세(1104~1134)
헨리케 3세(1572~1610)
언어
바스크어, 오크어, 프랑스어, 나바라 아라곤어
종족
바스크인, 오시타니아인(남프랑스인)
종교
가톨릭
성립 이전
프랑크 왕국
멸망 이후
프랑스 왕국
에스파냐 왕국
바스크어
Nafarroako Erresuma / Nafarroa
오크어
Reiaume de Navarra
아라곤어
Reino de Navarra
라틴어
Regnum Navarrae
프랑스어
Royaume de Navarre
1. 개요
2. 역사
2.1. 건국
2.2. 전성기와 몰락
2.3. 프랑스와 아라곤의 반속국
2.4. 하 나바라
2.5.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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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까지 나바라 지역에 존재했던 왕국. '나바라'는 스페인어(카스티야어) 명칭이며, 나바라 지역을 프랑스어로 나바르(Navarre)라고 했기 때문에 나바르 왕국이라고도 한다. 원주민인 바스크족의 로 나파로아(Nafarroa),
현재의 바스크 지역 대부분을 다스렸다

2. 역사



2.1. 건국


나바라 왕국이 등장한 것은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기독교 세력은 서북부의 산악 지역으로 위축되었을 무렵이다. 나바라 왕국은 원래 과거 바스크 지방에서 등장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로 수도는 팜플로나였고 지금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걸쳐 있었다. 원래는 프랑크 왕국의 통치 하에 있는 바스크 공작령이었지만 824년 초대 국왕인 에네코 아리차(Eneko Aritza / Íñigo Arista)에 의해 독립을 쟁취해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은 905년 레온 왕국의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평민 반란군 출신에 의한 근본도 없는 국가로 취급당해 무시받았지만 점차 성장하면서 11세기 중엽 무렵 국가 이름을 다시 나바라 왕국으로 바꾸고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905년 아리차(이니게스) 왕조의 에네코의 손자 오르티(Orti / Fortún)가 죽자 후사가 없어 형제 안초 1세(Antzo I/ Sancho I)가 뒤를 이어 세메로(히메네스) 왕조를 창건했다.

2.2. 전성기와 몰락


조금씩 영토를 확장하던 나바라는 1004년 즉위한 산초 3세의 통치 아래 최전성기에 이르렀다. 원래 나바라와 아라곤 지방만 통치하고 이었지만 안초 3세(산초 3세)가 무슬림들을 격파하고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 전체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 때의 위세는 대단한 수준으로 안초 3세는 안초 가르체스 대왕(Antso Gartzez Nagusia)이라고 불리며 스스로를 이베리아 반도의 황제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성기는 단 1대로 그쳤다. 1035년 안초 대왕 사후 그의 왕국이 나바라, 아라곤, 카스티야, 레온으로 분할 상속되어 갈갈이 쪼개졌기 때문이다.국가의 분할 이후에도 나바라 왕국은 계속 존재했지만 1076년 안초 대왕의 손자인 안초 4세가 동생들에게 암살당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나바라의 왕위가 공석이 된 틈을 타 사촌이었던 아라곤레온-카스티야의 국왕들이 개입해 영토를 분할했다. 결국 이후로 나바라는 한 때 이베리아 반도의 최강국이었다는 명성도 무색하게 피레네 산맥 깊숙히 박혀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프랑스의 반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2.3. 프랑스와 아라곤의 반속국


1234년 안초 7세가 후사가 없이 사망해 세메로 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의 상파뉴 백작 티보 3세(Thibaut III)와 안초 7세의 여동생 수리아(Zuria)의 아들이자 안초 7세의 외조카 티보 4세가 티발트 1세(Tibalt I)로 즉위해 블루아 왕조를 창건했다. 이 때부터 샹파뉴 영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나바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바스크계라기보다 프랑스 궁정의 일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후 1274년 티발트 1세의 아들 헨리케 1세(Henrike I)가 딸 호아나(Joana)만 남기고 사망하자 호아나가 호아나 1세로 즉위했다. 호아나 1세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필리프 4세와 결혼했는데 필리프 4세는 호아나 1세와의 혼인 동맹을 통해 나바라의 왕위를 획득하게 되어 필리페 1세(Filipe I)가 되었고 나바라는 프랑스의 일부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284년 사실상 블루아 왕조는 끝나고 나바라에 카페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1305년 호아나 1세가 사망하자 필리페 1세(프랑스의 필리프 4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루이스 1세(Luis I, 프랑스의 루이 10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루이스 1세는 1314년 필리프 4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왕으로도 즉위했지만 1316년 사망해 그의 유복자 호아네스 1세(Joanes I, 프랑스의 장 1세)가 나바라,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5일 만에 사망하자 그의 삼촌 필리페 2세(프랑스의 필리프 5세)가 즉위했다. 1322년 필리페 2세가 아들 없이 죽고 그의 동생 카를로스 1세(Karlos I,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즉위했지만 역시 아들 없이 1328년 사망했다. 프랑스는 필리프 5세 때 찾아내어 억지로 해석한 살리카법 때문에 모계 계승이 불가능했지만 나바라는 이것이 없어서 모계 계승이 가능했다.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는 직계가 끊겼는데 왕위 계승 요구자들의 대립 끝에 그해 필리프 4세의 조카 필리프 6세가 즉위하고 발루아 왕조가 세워졌다. 다만 필리프 6세는 나바라와는 아무 혈연도 없어서 프랑스-나바라 간 동군연합은 해체되고 나바라의 왕위는 루이스 1세의 유일한 딸 호아나 2세에게 돌아갔다.
호아나 2세는 1328년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아들이자 할아버지뻘인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 필리프와 결혼했는데 이렇게 에브뢰 왕조가 들어서고 필리프는 필리페 3세로 즉위했다. 1425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자 딸 수리아가 수리아 1세로 즉위했는데 그녀는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 후안 2세와 결혼했고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세워졌다. 1464년 후안 2세의 딸 레오노르(Leonor)가 즉위했는데 오빠 카를로스 4세, 언니 수리아 2세 모두 후사가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1479년 레오노르가 사망하자 푸아(Foix) 왕조가 들어섰다. 레오노르는 푸아 공작 가스통 4세와 결혼했는데 푸아 왕조의 창건자 프란치스코 페부스(Frantzisko Febus)는 레오노르의 손자이자 비아나 공작 가스통의 아들이었다. 프란치스코는 1483년 사망했지만 결혼하지 않아 후사가 없어 그의 여동생 카탈리나(Katalina)가 즉위했다.

2.4. 하 나바라


그런데 1512년 프랑스가 신성 동맹 전쟁으로 바쁜 틈을 타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3]가 상(上) 나바라를 점령하고 합병하면서[4] 피레네 산맥 이북의 약간의 영토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나바라 왕위와 피레네 이북에 남은 영토 일부인 하(下) 나바라[5]를 가진 작은 독립 군주국으로 얼마간 존속하였다. 1517년 카탈리나가 사망하자 그의 남편이자 알브레 공작이었던 장 달브레가 호안 3세(Joan III)로 즉위하고 알브레 왕조를 세웠다. 1555년 헨리케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 호아나(프랑스의 잔 달브레)가 뒤를 이어 호아나 3세로 즉위했다. 호아나 3세는 프랑스의 방돔 공작 앙투안과 결혼했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안토니오(Antonio, 프랑스의 방돔 공작 앙투안)는 1562년 사망하고 호아나 3세도 1572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헨리케 3세가 즉위했다. 헨리케 3세는 그해 발루아 왕조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그런데 1589년 프랑스의 앙리 3세위그노 전쟁에 휘말려 암살당하고 발루아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그가 프랑스의 앙리 4세로 즉위했다. 그래서 샤를 4세가 사망한지 261년 후에 다시 한 번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이 결성되었다.

2.5.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헨리케 3세가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 되면서 부르봉 가문은 나바라의 헨리케 3세이자 프랑스의 앙리 4세에 의해 단 1대 만에 왕위 두 개를 차지하는 벼락 출세를 달성했다. 헨리케 3세가 1610년 암살당하고 그의 장남 루이스 2세(프랑스의 루이 13세)가 나바라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사실 나바라는 영토가 극히 작았기에 크게 의미가 없었고 루이스 2세이자 루이 13세 때인 1620년 나바라 왕국은 폐지되고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래서 나바라 왕국은 사라지고 대신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으로 프랑스 왕위에 따라붙는 부가적인 칭호로만 남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시기 루이 16세의 칭호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에서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흔적조차 없어져 루이 16세를 끝으로 소멸했다. 그 후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복고 왕정 시기에 잠시 부활했지만 루이 필리프 1세가 다시 '프랑스 국민의 왕'을 칭호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3. 역대 국왕






[1] 바스크어로 이루냐(Iruña)[2] 프랑스의 왕이 나바라 왕을 겸하는 경우도 많았고 앙리 4세 이후 프랑스 왕이 독점[3] 나바라의 여왕 레오노르와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는 모두 후안 2세의 자식들이지만 둘은 이복 남매다. 레오노르는 나바라의 여왕 수리아 1세의 소생이고 페르난도 2세는 수리아 1세가 죽은 후 후안 2세가 새로 맞이한 후아나 엔리케스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안 2세 사망 후 나바라는 레오노르, 아라곤은 페르난도 2세에게 돌아갔다.[4] 이 때 나바라 왕의 헨리케 2세의 매제이던 체사레 보르자가 나바라의 장수로 참전했다 허무하게 전사했다.[5] 베스 나바르(Basse - Navar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