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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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Tol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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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중부 톨레도 주의 도시. 카스티야라만차 자치 구역에 해당된다. 인구는 83,000명이고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67km 거리에 있다.
세르반테스 언덕을 타호 강이 둘러싸고 있어 로마 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발전해 왔고 스페인 역사에서 오랫동안 수도 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적이 공존하고 스페인 문화를 잘 대변하는 곳이어서 도시 전역이 국립 기념지로 선포되었다.
크레타 섬에서 나고 자라, 이탈리아에서 경력 쌓으며 스페인에 정착했던 화가, 엘 그레코가 사랑하며 종국엔 제2의 고향으로 아꼈던 도시이기도 하다.
2. 역사
처음에는 '톨레툼(Toletum)'이라는 이름의 로마 제국의 도시였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주역인 서고트족이 451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동해 457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507년 서고트 왕국은 남프랑스의 아키텐을 상실한 후 톨레도를 수도로 삼았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사라센 제국이 기독교 왕국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다. 10세기에 무어인이 세운 후우마이야 왕조(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북부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이슬람 왕국으로부터 톨레도를 탈환해 스페인 통일 왕국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김으로써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3. 특징
고대 시대부터 품질 좋은 강철의 생산과 도검 제작으로 유명했고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 때까지도 톨레도산 검은 최고의 명품으로 호평받았다. 그 이유는 우선 톨레도에서 채광되는 철광석의 품위가 좋았고 저탄소강과 고탄소강을 반복 접쇠하는 기술이 일찍부터 개발되어[5] 우위를 점했고 강철의 최종적 품질을 결정짓는 열처리(담금질/뜨임) 기술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그 공정들이 '''표준화'''되었기 때문. 몇몇 소수 장인들의 감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보다[6] 기술을 표준화하는 것이 품질의 상향 평준화에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단적인 예로 시계가 없던 시절에 담금질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담금질 시간에 박자가 맞춰진 표준화된 기도문이 있었다고 한다.'''[7]
그러다 보니 자연히 톨레도산 강철은 명품이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제강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잘 알려진 로마군의 글라디우스도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어졌고[8] , 서고트인들과 무어인들이 오랫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유들 중 하나도 톨레도 점령 이후부터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기 시작한 무기와 갑옷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훗날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신대륙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헤쳐 나가거나 오히려 정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수급이 불안정한 화약 무기보다는 언제나 믿음직한 톨레도산 무구의 위력 덕이 더 컸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부분 흑요석 무기를 사용했고 전금속제 무기는 사실상 본 적도 없어 강철검의 대응법도 몰라서 검을 막을 만한 갑옷도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조차도 톨레도산 강철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다. 애당초 다마스쿠스 강이 개발된 이유가 톨레도 강철에 비견할 만한 강철을 만들자는 것이었기도 하고. 톨레도 강에 비해 다마스쿠스 강은 유연성이 떨어지며 경도가 너무 높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도 시 중심부에서 검과 철제 가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실전용이 아닌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용 검을 만들어 낸다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유적지가 모두 남아 있다. 또한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중세 가톨릭 성당, 이슬람 왕궁 등 여러 문화의 유적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고딕 양식 대성당들 가운데 가장 스페인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도시의 대성당에는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고야, 반 다이크 등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된 미술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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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99년 이슬람 모스크(메스키타)로 지어진 이후 12세기에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바브 알 마르둠 모스크 (Mezquita Bab al-Mardum)/크리스토 데라루즈 (Cristo de la Luz, 빛의 예수) 성당. 성당으로 개조됬다 해도 내부에 카톨릭 예배당 하나 추가한거 빼곤 내외적으로 바꾼게 거의 없어서 안달루시아 이북 카스티야 지방에서 가장 잘 보존된 무슬림 통치기 유적으로 꼽힌다. 입장료는 3유로이나 만 25세 이하 대학생 (학생증만 있으면 국적불문), 미성년자, 노인은 무료입장할수 있다.
1986년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4. 주요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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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알카사르 (Alcázar de Toledo)'''
알카사르(Alcazar)는 스페인어로 '성'이라는 뜻으로 레콩키스타 시기에 이슬람과 싸우기 위한 요새로 지어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스페인 전국에 있는 여러 알카사르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힌다.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세르반테스 언덕 위에 해발 548m에 세워졌다. 로마 시대인 3세기에 처음 지어져 관아로 사용되었고 이후 이슬람 지배를 거쳐 카스티야가 수복한 후 이슬람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가[9] 낡고 오래된 요새를 개축할 것을 명해 1538년부터 1551년에 걸쳐 당시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그러나 장본인은 애초에 주 관심사가 유럽 대륙이라 평생 스페인 밖에서 전쟁이나 하러 돌아 다니고, 아들 펠리페 2세가 완공된 지 10년 만에 천도하면서 왕궁으로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카를로스 시절만 하더라도 스페인은 중앙집권화된 단일 국가가 아니라 덩치랑 위상은 가장 크다해도 실질적으론 유럽 전역에 걸쳐져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편 제국중 구성국에 가까웠는데[10] , 펠리페 시절엔 합스부르크 제국 자체가 각각 스페인, 오스트리아 기반으로 한 동서로 분리되고 스페인만의 단독 열강으로서 패권과 행정 체계를 쌓아가는 쪽으로 국정 운영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전까진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영구적인 수도를 지정하게되었다.
이 와중 톨레도는 아버지 시절 1520년엔 아예 합스부르크 가문이 카스티야 왕국을 상속하자마자 다시 상실하게 될뻔했던 코뮤네로 반란의 중심지로서 혁명 진압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도시 자치민과 지역 봉건 영주 세력이 있으니 오히려 그 전통과 역사가 새 왕조의 수도로선 부적합했다. 따라서 지리적으론 톨레도, 바야돌리드 같은 기존 카스티야의 대도시들과 가깝지만 동네 자체는 한적한 촌이라 토착 유지 세력이 약했던 마드리드가 신생 스페인 제국의 수도로 정해지고, 톨레도는 한동안 여전히 역사적 대도시로서 그 위상을 한순간에 잃지는 않았지만 나머지 카스티야 중부고원 일대의 역사도시 전반과 마찬가지로 수백년간 이어질 인구 감소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화재, 나폴레옹 전쟁, 스페인 내란 등으로 파괴되었지만 1939년부터 1957년에 걸쳐 복구되었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 겸 인근 대학의 연구실/도서관 겸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 초기 나머지 톨레도 지방과 시 전체는 공화파가 사수하고 당시 군구장 호세 모스카르도 장군 휘하 프랑코파 쿠데타 반군은 이 알카사르만 점령한 상태로 포위, 두달간의 치열한 농성 끝에 나머지 국가군에게 포위망이 풀려 톨레도를 정복한 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알카사르는 공화파의 포격으로 거의 가루가 될만큼 완파되었다가 전후 프랑코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대대적으로 복구 되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의 건축학적 가치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단순한 전근대 역사 뿐만 아니라 이런 스페인 근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이기도 했고 군사박물관 내부 구성물과 영어 번역도 충실하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은 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소코도베르 광장 (Plaza Zocodover)'''
무슬림 통치기 천년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톨레도 시의 중심 광장 (plaza mayor). 16세기 초반 르네상스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재건축한 이후 지금도 스페인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양식 중심광장 중 하나이다.
'''톨레도 대성당 (Catedral de Toledo)'''
연혁은 바로 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벨리사리우스 장군아래, 서로마 멸망 이후 서고트 왕국 설립 이전 100년도 안되는 비교적 짦은 시간 동로마 제국이 히스파니아를 수복했던 6세기까지 올라가는 이베리아 전체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성당중 하나이다. 톨레도 대주교좌는 현대 카톨릭 교회에서 실권은 딱히 다른 주교에 비해 특출나진 않지만 어쨋든 의전, 명목상으론 해당 국가 주교단의 최상석인 히스파니아 (중세 초기에 만들어진 교구인만큼 포르투갈도 포함) 수석주교 (primate) 자리이기도 하다. 13세기에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 16세기 르네상스의 전성기때 대대적 확충을 하며 고딕, 초기 르네상스, 후기 르네상스, 무데하르, 바로크, 로코코 양식 모두 보여주며, 당장 그 유명한 엘 그레코를 시작으로 루카스 호르단, 클라우디오 코에요, 후안 데 보르고냐, 호세 데 추리게라, 나르시사 토메 등 각 시대별 양식을 대표하는 스페인 예술사 올스타진급 예술가들이 한번쯤 걸쳐간 스페인 최고의 대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서고트 왕국 시절 도입되어 이슬람 지배시기 계속 보존, 발전되어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옛 히스파노-모사라베 예법 미사가 매일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크리스토 테라루즈, 토르네리아 메스키타 (Mezquita Cristo de la Luz, de las Tornerías)'''
각각 10세기, 11세기에 건설된 이슬람 모스크로, 무어인들 본진이었던 안달루시아 지방 이북에선 아라곤 일대의 이슬람 유적과 더불어 가장 잘 보존된 편이다.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델 트란시토 시나고그 (Sinagoga de Santa María la Blanca, del Tránsito)'''
상술한 모스크들과 비슷한 시기 건설되어 중세 후기에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된 유대교 예배당으로 중세 이베리아 세파르딤 유대인 문화의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 현대에는 세파르딤 유대인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근처에선 전통 톨레도식 금은세공으로 만든 하누카용 촛대 같은 유대교 관련 기념품들을 많이 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가 오래된 이베리아 반도 대도시들은 왠만한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톨레도의 경우 스페인 기준으로도 이런 중세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세 종교가 같이 번영했던 도시'라 불리곤 한다.
'''엘 그레코 생가 (Casa-museo del Greco)'''
성벽 안 구시가지 동서쪽 구석에 있는 박물관 겸 미술관인데, 사실 진짜 엘 그레코 생가는 아니고 두세집 좀 떨어져 있는 다른 귀족의 집이었지만 16세기 당시 주거 양식과 비종교적, 비정치적 일상 건축을 잘 보존한 건축학적 가치도 겸해 얼떨결에 생가 아닌 생가가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12사도 초상화, 톨레도 풍경화 등 엘 그레코의 걸작 다수와 동시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 아버지를 열심히 따라하려고 한 흔적은 보이지만 퀄리티는 영 좀 못미치는(...) 엘 그레코 아들의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산토 토메 (성 토마스) 성당 (Iglesia de Santo Tomé)'''
엘 그레코 최대, 최고의 걸작인 오르가스 공작의 매장 벽화가 그려진 성당이다. 벽화는 확실히 걸작이긴 하지만 딱히 미술사에 큰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거대 단일 예술품들이 그렇듯이 벽화 하나 본다고 10유로에 육박하는 입장료를 내는게 창렬하다고 느낄수도 있으니 유의. 물론 성당 자체로도 훌륭한 중세 카스티야 성당 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적지이긴 하지만 이렇게 역사 오래된 성당 자체야 스페인 내에서도 꼽아주는 역사도시인 톨레도에선 널렸고, 다른 엘 그레코의 작품들을 보려면 상술한 생가 박물관과 골목 몇개만 돌아 걸어서 5분거리인 산토 도밍고 엘 안티고 수도원에 가도 된다.
'''톨레도 성벽 (Las murallas de Toledo)'''
유럽 전체에서도 꼽아주는 중세 성벽 도시인 이웃 카스티야-레온 주의 아빌라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톨레도도 중세 구시가지 성벽 구간 다수가 큰 훼손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구시가지 외곽 걸어서 30분 가량, 차타고 5분 거리쯤 되는 언덕 위에 있는 인근 전망대(parador)에서 보면 일부 구간은 멘 아랫부분의 큼지막한 벽돌로 구성된 로마 시대 구조물, 그 위 작고 촘촘한 벽돌로 이루어진 이슬람 시대 구조물, 그리고 멘 위에 재정복 후 카스티야 왕국 시절 지은 부분 등 각 층마다 톨레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서고트족 역사 문화 박물관 (Museo de los Concilios y de la Cultura Visigoda)'''
서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 정복 이전 톨레도를 수도 삼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서고트 왕국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는데, 기록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수공예 기술을 가졌던 문명인 만큼 전시품의 퀄리티도 상당히 높다. 박물관이 소재한 산 로만 성당 건물 자체도 12세기까지 올라가고 르네상스 시기 대대적으로 재건축하며 조각가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 작 중앙 제대 부조물을 비롯해 유명 예술가들이 참여한 가치 높은 건축 문화재이다.
5. 여담
미국의 이리 호 서부, 디트로이트 남쪽에 동명의 도시가 위치한다. 지명의 유래는 스페인의 톨레도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다. 인구가 280,000명에 달하고 유리 공업으로 명성이 있는 중규모 공업 도시다.
자연 그늘 같은게 없고,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그대로 맞는 이베리아 메세타 중부 고원에서도 위도가 높은 편에 속한지라 스페인 전체에서도 꼽아주게 덥고 건조한 도시중 하나이다. 특히 문화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구시가지는 산성 위에 지어진 도시 전체가 언덕길이라 햇빛 쨍쨍한 여름날 땀삐질삐질 흘리면서 관광하다보면 열사병 먹고 훅 쓰러지게 딱 좋다. 얼음물과 햇빛 가려줄 선스크린 같은 자외선 차단 도구, 부채나 손선풍기 같은걸 꼭 챙기고 중간중간에 휴식하면서 관광하자.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접쇠 하면 흔히 일본도의 타마하가네나 패턴-웰디드 다마스쿠스 강이 유명하지만 기록상으로 접쇠 공법을 최초로 도입한 것은 톨레도산 강철이다. (고대 로마군의 글라디우스도 접쇠 공법이 쓰였다.) 그나마 일본도는 사철의 조악한 품질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고육지책으로 택한 것.[6] 장인 정신으로 유명한 전통 일본도는 겉으로 보이는 예술성은 뛰어날지언정 실제 성능은 명성에 못 미쳤다. 통일 이후부터 소수의 명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도입했으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 쇠퇴하였다. 차라리 근대 기술을 사용해 공장에서 찍어낸 95식 부사관도 같은 것이 실제 성능은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7] 그럼에도 워낙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고급품은 전문 장인도 일 년에 두세 자루 정도씩밖에 만들지 못했다고.[8] 원래 이름이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로 '스페인 검'을 의미했다.[9] 엄밀하게 따지면 아버지인 미남공 펠리페 1세가 최초의 합스부르크 출신 스페인 왕이지만 워낙 단명한 관계로 실질적으론 카를로스 1세로 본다[10]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페인 그 자체도 마치 냉전 시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편의상 계속 '러시아'라 부른것처럼 포괄적인 국방, 외교만 빼곤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다른 나라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합쳐서 편의상 부르는 이름에 가까웠다. 실제로 '에스파냐 군주정 (monarquía hispánica)' 소속 개별 왕국들이 법적으로 '스페인'이란 하나의 단일 국가로 묶인건 18세기 부르봉 왕조 시절 일이고, 이 시기 공문서들이나 서적들을 보면 주로 비정치적인 문맥에선 포르투갈도 '스페인'의 범주에 종종 묶였다가 빠졌다가 한다. 동시대인들도 정치적인 의미로서 포르투갈은 엄연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이라고 당연히 인식했지만 지리학적 의미, 특히 카톨릭 교구상으론 여전히 '히스파니아'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의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