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수

 

성명
문승수(文升洙)
생몰
1905년 1월 23일 ~ 1950년 7월 20일
출생지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 대지리
사망지
전라남도 완도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승수는 1905년 1월 23일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 대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6년 11월 광준농업학교에 재학하던 중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16명과 함께 모여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삼은 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했다. 하지만 회원 중 이탈자가 생겨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자, 1927년 3월에 성진회가 해체되었고 각 학교 별로 조직을 하도록 했다.
이후 문승수는 지용수(池龍洙), 강해석(姜海錫) 등의 지도를 받고 광주농고생인 김만복(金萬福), 김재룡(金在龍), 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1928년 4월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지원하다가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직후 경찰로부터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27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했고,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으로 감형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완도에서 황동윤(黃東允), 최창규(崔昌圭)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을 맡으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지만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 사건을 계기로 전남운동협의회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1934년 2월 조직이 와해되고 조직원들이 체포될 때 그 역시 체포되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고문과 옥중 투쟁 끝에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완도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50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문승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