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창

 


성명
최규창(崔圭昌)
본관
낭주 최씨#
생몰
1908년 2월 9일 ~ 1949년 7월 8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1]
사망지
광주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규창은 1908년 2월 9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 11월 당시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자신의 하숙방에서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 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지용수(池龍洙)와 강해석(姜海錫) 등의 지도로 광주 시내 각급 학교에는 광주고보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의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동하다가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8년 10월 5일에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성진회와 연관되어 다시 체포되었고,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항소한 결과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미결기간 중에도 치열한 옥내투쟁을 벌여 민족 의식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출옥 후 영암에 돌아온 그는 일본의 통치 기반에서 이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암농민운동협의회”를 조직하고 농민계몽과 문맹퇴치를 위하여 야학을 설치, 농촌지도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일본인과 친일파 악덕지주에 대해 소작쟁의를 일으켜 농민의 이익옹호와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시 체포된 그는 1933년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최규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인근의 서구림리와 함께 낭주 최씨 집성촌이다. 낭주 최씨 시조 최지몽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