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치무는 1877년 8월 11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마령리에서 문우양(文寓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마령동 구장이었는데, 1919년 3월 15일 유연성, 유동수, 이강욱(李康郁), 홍명성(洪明聖), 박재식, 유교희, 박진선(朴晋先), 유곡란(柳谷蘭) 등이 기획한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듣고 이를 적극 찬성해 중평리 편항마을 장날인 3월 21일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 동원을 준비했다. 이윽고 3월 21일 오후 2시, 그는 편항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이때 편항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이후 군중은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했는데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했다. 그러자 군중은 분노해 주재소의 유리창, 책상, 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했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 칼, 탄환, 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 속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 방향으로 도망하자, 그는 군중과 함께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 붙잡아 구타했다. 이후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했고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했으며 자정부터는 파괴해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우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자진 해산했다.
이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군에서 조용히 살다 1942년 4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치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