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문씨

 


[image]}}}'''{{{#000 南平 文氏
남평 문씨
'''
}}}
<colcolor=#ece5b6><colbgcolor=#000> '''관향'''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시조'''
문다성(文多省)
'''중시조'''
문익(文翼)
'''파조'''
문익겸(文益謙)[1]
문익점(文益漸)[2]
문구(文龜)[3]
문작(文綽)[4]
문유필(文惟弼)[5]
'''집성촌'''
전라남도 담양군, 화순군, 장흥군, 영암군, 보성군
대구광역시 달성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함경남도 함흥시
'''인구'''
445,946명(2015년) |국내 21위
'''링크'''
남평문씨대종회
1. 개요
2. 설화
3. 역사
4. 종파
5. 특이사항
6. 집성촌
6.1. 서울·경기
6.2. 대구·경북
6.3. 부산·울산·경남
6.4. 광주·전남·전북
6.5. 충남
6.6. 제주
6.7. 북한 지역
6.7.1. 황해
6.7.2. 평안
6.7.3. 그 외
7. 항렬표
8. 인물
8.1. 대수 미상
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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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한국 문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감천 문씨와 정선 문씨를 제외한 대다수의 다른 문씨들은 남평 문씨의 세거지명[6]에 불과하다고 한다. 감천 문씨의 일부도 남평 문씨의 분파이고, 정선 문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상 19명에 불과한 소수성이므로 사실상 한국의 거의 모든 문씨는 남평 문씨이다.[7]

2. 설화


전설에 따르면 남평 문씨의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이다.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무진군(武珍郡)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8] 동쪽에 장자못(長者池)이라는 큰 못이 있고, 그 못가에는 큰 바위가 솟아 있었다.[9]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노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군주가 신기하게 여겨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玉雪)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있었다. 군주가 기이하게 여겨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나이 불과 5세에 문사(文思)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문(文)을 성(姓)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10] 벽상공신(壁上功臣)[11]으로 남평백(南平伯)의 작위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시조 문다성은 삼국시대백제 개로왕 때 사람이라 하지만 고려의 개국공신이라는 족보 기록과 연대가 맞지 않아 대종회에서는 후삼국시대 사람인 것으로 정정하였다고 한다.[12]
문다성은 태조 왕건의 밑에서 무신으로 봉직하였으며 고려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룬 후 삼중대광(三重大匡)[13] 품계와 벽상공신(壁上功臣)[14] 공신호와 남평백으로 봉작을 받고, 식읍 3천호를 하사받았다. 본관인 남평읍이 위치해 있던 나주시 일대는 태봉의 장군이던 시절 왕건이 나주 공방전을 통해 직접 장악하고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인데 문다성은 그때 왕건에게 호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시조 문다성은 역사적 인물이라기 보단 설화적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시조단을 만들어 종중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시조 밑으로는 자료가 없으므로 대수를 정할 때는 중시조 문익(文翼)을 1대로 쳐 계산한다.
문익은 숙종 대의 인물로 고려시대 문공원의 금석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실존인물이다. 문다성부터 문익까진 꽤 족보가 먼 편이다. 문익의 아버지는 2군 6위 소속의 무관이었고 문익은 중서문하성의 관직을 거쳐 문관이 되었다.
문익의 세 아들 문공유, 문공인, 문공원 삼형제의 등장으로 가세가 매우 크게 성장했다. 문공유는 남평현 개국자로, 문공인은 평장사로, 문공원은 배향공신이 되었다.
이 기세로 무신정권 대에는 매우 잘 나가 문벌귀족 가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고려 때의 대표적 인물로는 무신정권 때의 네임드급 문신 및 무신인 충숙공 문극겸[15], 고려 말의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 정도가 유명하다.[16]
제주도에 있었던 탐라국의 최고 권력자인 성주(星主)를 세습하던 고씨와 연합해 2등 권력자인 왕자(王子)를 세습하던 양씨를 밀어내고 왕자를 세습하기도 했다.
다만 조선조 때에는 별로 가세가 흥한 편이 아니어서 조선조 때의 유명한 인물을 찾아보려면 대충 의병장이니 그저 그런 관료가 나올 정도다. 아마도 현 족보상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문익점이 여말선초에 고려 라인을 타다가 배제당했던 듯[17], 오히려 현대에 들어 문재인 대통령을 배출하고,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문희상 의원이 당선됨에 따라 국가의전서열 1, 2위를 모두 남평 문씨에서 차지하는 등 더 잘나가는 양상이다.

4. 종파


종파는 총 10개이다.
중시조 문익의 손자인 문극겸의 두 아들 대에서 갈라진다. 장남 문후식의 후손들로 구성된 파는 '''충혜공파'''ㆍ'''감천군파'''ㆍ'''남제공파'''ㆍ(충선공파)'''헌납공파'''ㆍ(충선공파)'''순질공파'''ㆍ(충선공파)'''의안공파'''ㆍ(충선공파)'''시중공파'''ㆍ(충선공파)'''성숙공파'''이다.
저 중 충선공파가 붙은 파들은 전부 10세손 문익점의 자손들이다. 충혜공파는 문익점의 형인 10세손 문익겸이 파조이고, 감천군파는 9세손 문구에서 갈라졌다. 남제공파는 문극겸의 손자인 5세손 문착을 파조로 한다.
문극겸의 차남 문유필의 후손들은 '''충익공파'''ㆍ'''판도판서공파'''이다. 원래는 저 둘을 통틀어 순평부원군파로 분류하였으나 1995년 대동보에서는 파주와 전주가 집성촌인 9세손 문달한의 후손을 충익공파로 하고 합천지역이 집성촌인 8세 문근의 후손들은 판도판서공파로 분리하였다.

5. 특이사항


지금은 많이 잊힌 이야기이긴 하지만, '''순흥 안씨랑 혼인을 꺼린다.''' 옛날 문씨 청년이 중국에 유학을 하러 가는 길에 순흥 안씨를 만나서 길동무 삼아 같이 가게 되었는데, 두 청년이 너무나 죽이 잘 맞았던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형제니 한 집안과 같다!''' 라고 하여 후손들의 배우자 후보 가문을 하나 지워버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도 각각의 가문 어르신들에게 자주 전해듣는 전설이기도 하다.

6. 집성촌



6.1. 서울·경기


  •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마을
  •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18][19]
  • 경기도 양주시
  • 경기도 의정부시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노진리

6.2. 대구·경북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20]
  •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대성리
  • 경상북독 김천시 지례면 상부리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거창리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매수리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21]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구미리·월곡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6.3. 부산·울산·경남


  •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22]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문죽리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서상리
  •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송지리
  •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반지리
  •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감리
  •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등지리·장기리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선소리[23]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갈전리·우암리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용지동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24]
  •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25]·역평리·회양리
  •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26]
  •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묵촌리
  •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6.4. 광주·전남·전북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청풍동[27]
  • 전라남도 광양시 옥곡면 원월리
  •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서리
  •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구산리
  •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풍수리·황금리
  •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용정리[28]
  •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서당리·영천리·천포리·회령리
  •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29]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남강리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자라리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이천리
  •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30]·풍덕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송평리
  •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31]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늑용리·단산리·덕산리·대리·송정리·신풍리·오복리·조양리
  •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봉림리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대사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천암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마산리·무포리
  •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봉암리·신리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방축리
  •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남내리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고사리
  •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공덕리·제말리·회룡리

6.5. 충남


  • 충청남도 보령시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몽산리[32]

6.6. 제주


  • 제주특별자치도[33] 제주시 도두동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34]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조수리·청수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한림리

6.7. 북한 지역



6.7.1. 황해


  •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정촌리
  • 황해도 신계군 고면 직동리
  •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 신안리·장척리
  • 황해도 옹진군 북면 초일리
  • 황해도 서흥군 매양면 백화리
  • 황해도 서흥군 용평면 서곡리
  • 황해도 서흥군 목감면 수곡리
  • 황해북도 사리원시 신창동[35]
  • 황해북도 봉산군 토성리[36]
  • 황해남도 장연군 낙연로동자구[37]

6.7.2. 평안


  • 평안남도 순천시 동암동[38]
  • 평안남도 순천시 평리[39]
  •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사리
  • 평안남도 덕천군 잠상면 서학리
  • 평양직할시 강남군 문암리[40]
  • 남포특별시 항구구역 동전리[41]
  • 평안북도 피현군 정산리[42]
  • 평안북도 구성시 용풍리[43]
  • 평안북도 태천군 송태리[44]
  • 평안북도 녕변군 남등리[45]
  • 평안북도 정주시 오성리[46]·오산동[47]
  • 평안북도 곽산군 관상리[48]
  • 평안북도 운전군 원서리[49]
  • 평안북도 철산군 금산리[50]
  • 평안북도 룡천군 인흥리[51]
  • 자강도 송원군 회목리[52]
  •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중평리[53]
  • 자강도 중강군 중상동[54]

6.7.3. 그 외


  • 강원도 통천군 학일면 패천리
  •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55]
  • 함경남도 영흥군 고령면 무학리
  • 함경남도 안변군 안도면 상덕리·중평리
  •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연호리

7. 항렬표


'''30세'''
○호鎬, ○현鉉, ○흠欽
'''31세'''
제濟○, 승承○, 홍鴻○
'''32세'''
○식植, ○모模, ○상相
'''33세'''
희熙○, 형炯○, 병炳○
'''34세'''
○주周, ○기基, ○균均
'''35세'''
종鍾○, 용鎔○, 련鍊○
'''36세'''
○영泳, ○수洙, ○흡洽
'''37세'''
동東○, 학學○, 환桓○
'''38세'''
○노魯, ○섭燮, ○훈勳
'''39세'''
재在○, 시時○, 규圭○
'''40세'''
○선銑, ○일鎰, ○석錫
'''41세'''
택澤○, 태泰○, 해海○
'''42세'''
○표杓, ○근根, ○목穆
'''43세'''
석錫○, 선銑○, 시諡○
'''순평군파'''와 '''판도판서공파'''는 항렬이 조금 다르다.[56]
'''28세'''
○주柱, ○동東,
○식植, ○환桓
'''29세'''
병炳○
'''30세'''
○곤坤, ○균均
'''31세'''
종鍾○
'''32세'''
○연淵
'''33세'''
상相○
'''34세'''
○환煥
'''35세'''
규奎○
'''36세'''
○호鎬
'''37세'''
위渭○

8. 인물


이름
생몰년도

비고
'''근대 이전'''
문다성(文多省)


남평 문씨의 설화적 시조
문익(文翼)


남평 문씨의 역사적 시조, 남평 문씨 1세
문공원(文公元)


문익의 차남, 고려의 배향공신
문공유(文公裕)


문익의 삼남, 남평의 자작
문극겸(文克謙)


문공유의 아들, 고려의 배향공심
문익점(文益漸)


여말선초의 유학자
'''28세손'''
문양목(文讓穆)
1869 ~ 1945
성숙공파
독립운동가
문호주(文虎柱)
1967 ~
판도판서공파
만화, 웹툰작가
'''29세손'''
문달환(文達煥)
1851 ~ 1938
순질공파
독립운동가
문공학(文孔學)
1897 ~ 1946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경섭(文瓊燮)
1883 ~ 1941
순질공파
독립운동가
문태준(文太俊)
1928 ~ 2020
순질공파
정치인
문정복(文貞福)
1967 ~
순질공파
정치인
'''30세손'''
문위동(文渭東)
1903 ~ 1976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치무(文致武)
1877 ~ 1942
순질공파
독립운동가
문희상(文喜相)
1945 ~
의안공파
정치인, 족보명 상호(相鎬)
문정인(文正仁)
1951 ~
헌납공파
정치학자, 교수
문태곤(文泰坤)
1957 ~
판도판서공파
공무원, 공기업인
문지훈(文志勳)
1986 ~
의안공파
래퍼
'''31세손'''
문영박(文永樸)
1880 ~ 1930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도석(文道錫)
1882 ~ 1968
순질공파
독립운동가
문창학(文昌學)
1882 ~ 1923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우석(文禹錫)
1893 ~ 1953
순질공파
독립운동가
문석균(文晳均)
1971 ~
의안공파
숭문당 대표
문선민(文宣民)
1992 ~
충익공파
축구선수
'''32세손'''
문광채(文光彩)
1861 ~ 1919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태수(文泰洙)
1880 ~ 1913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문성혁(文成赫)
1958 ~
순질공파
교수, 해기사, 공무원
문진석(文振碩)
1962 ~
순질공파
국회의원, 족보명 광석(光錫)
문승훈(文昇勳)
1966 ~
순질공파
야구선수, 감독
'''33세손'''
문도배(文道培)
1908 ~ 1953
남제공파
독립운동가
문선명(文鮮明)
1920 ~ 2012
의안공파
종교인, 통일교 창시자
문태갑(文胎甲)
1930 ~
의안공파
정치인, 족보명 희응(熙膺)
문희갑(文熹甲)
1937 ~
의안공파
정치인, 족보명 희좌(熙佐)
'''문재인(文在寅)'''
1953 ~
의안공파
정치인, 법조인, '''제19대 대통령'''
문병호(文炳浩)
1959 ~
순질공파
정치인
문미옥(文美玉)
1968 ~
순질공파
교수, 정치인
문희준(文熙晙)
1978 ~
순질공파
가수
문정원(文貞媛)
1980 ~
판도판서공파
플로리스트
문선재(文善載)
1990 ~
순질공파
야구선수
문진제(文珍堤)
1991 ~
순질공파
야구선수, 족보명 선제(善提)
문경찬(文京贊)
1992 ~
순질공파
야구선수
'''34세손'''
문무일(文武一)
1961 ~
순질공파
법조인, 족보명 창주(昌周)
문장규(文章圭)
1963 ~
남제공파
가라데 선수, 재일, 통명 마쓰이 쇼케이(松井章奎)
문대림(文大林)
1965 ~
순질공파
정치인
문대성(文大星)
1976 ~
순질공파
태권도 국가대표, 정치인
문준용(文畯鏞)
1982 ~
의안공파
게임 개발자
문근영(文瑾瑩)
1987 ~
순질공파
배우
문성곤(文星坤)
1993 ~
순질공파
농구선수
'''35세손'''
문상흡(文相翕)
1876 ~ 1944
의안공파
독립운동가
'''36세손'''
문창기(文昌基)
1962 ~
순질공파
사업가
'''37세손'''
문송면(文松勉)
1971 ~ 1988
순질공파
이슈인

8.1. 대수 미상



9. 관련 항목



[1] 충혜공파[2] 충선공파(헌납·순질·의안·시중·성숙)[3] 감천군파[4] 남제공파[5] 순평부원군파(충익·판도판서)[6] 여러 대 동안 산 고장의 이름.[7] 문재인 대통령도 남평 문씨고, 문희준도 남평 문씨이다. 사실상 문씨는 남평 문씨인셈. 이러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문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항렬을 확인한다.[8]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9] 현재에도 문암(文巖)이라는 이름으로 바위가 남아있다고 한다.[10] 1품 1등위 품계.[11]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개국공신.[12] 472년이면 백제도 한성백제 시대라 본관인 나주시 남평읍에 위치해 있던 남부의 마한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에 동질의식이 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지역에는 마한의 불미국(不彌國)이 있었는데 대형 고분군이 여러 개 발견된 걸로 비추어 마한 소국들 중에서도 강한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본관인 나주시 남평읍은 백제 때에는 무진군(武珍郡)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 되었다가 여러 번의 명칭 변경을 거쳐 고려시대에 나주목(羅州牧) 남평현(南平縣)이 된다. 다만 백제가 마한을 남만이라 했다는 주장은 일본서기에 남만 침미다례(忱彌多禮)라는 기록의 남만을 가지고 주장하는데, 백제가 직접 언급한 것도 아니고, 침미다례가 마한 전체도 아니고, 남만이 백제 남쪽이라는 의미로는 마한의 한 국가 또는 가야의 한 국가로 보기도 하고, 침미다례 위치를 탐라(제주), 전남 해남, 강진, 경남 남해로 추측하기도 하고, 고려시대 이규보는 경상도를 남만으로 지칭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런 주장은 억지스럽다. [13] 1품 1등위 품계.[14]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개국공신.[15] 딸이 이의방의 제수다.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아내.(즉 문극겸이 장인, 이린은 사위이다.) 이린과 문극겸의 딸의 6대손이 이성계이다.[16] 초명은 익첨(益瞻).[17] 그나마 목화 버프로 사후 공신은 됐지만 중앙 정계에선 멀어져서 당장 그 아들만 해도 빈곤해져 문익점의 동문인 권근이 태종에게 문익점 아들에게 벼슬 하나 주라고 했을 정도[18] 문정동에 문(文)자가 붙은 이유가, 이 성씨의 집성촌인데서 비롯되었다.[19] 여기서부터 남부터미널까지 문씨들이 을 많이 갖고 있었다. [20] 독립유공자 문영박·문희갑 前 대구시장·문태갑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으로, 마을 전체남평 문씨 본리세거지라는 이름으로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 지역 방송에서 취재도 하였다. [21] 독립유공자 문치무·문도석·문우석이 이 마을 출신이다.[22] 독립유공자 문위동이 이 마을 출신이다.[23] 독립유공자 문덕길이 이 마을 출신이다.[24] 독립유공자 문공학이 이 마을 출신이다.[25] 독립유공자 문용이 이 마을 출신이다.[26] 독립유공자 문홍의가 이 마을 출신이다.[27] 독립유공자 문동길이 이 마을 출신이다.[28] 독립유공자 문장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29] 독립유공자 문재교가 이 마을 출신이다.[30] 독립유공자 문사훈·문성선이 이 마을 출신이다.[31] 문병호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32] 독립유공자 문양목이 이 마을 출신이다.[33] 잠깐이긴 하지만 문씨가 제주 고씨 집안의 사위로서 탐라 왕자가 된 적이 있다. 이 때문인지 양씨, 고씨, 부씨가 다수였던 제주도에 문씨도 나타났다. 물론 당시에는 실질적 권력자이자 일종의 제사장인 성주(星主)는 고씨가 했다.[34] 독립유공자 문도배가 이 마을 출신이다.[35]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하덕동[36] 구 토성면 토성리[37] 구 낙도면 송죽리[38] 구 순천군 선소면 간동리[39] 구 순천군 순천읍 중리[40] 구 평안남도 중화군 양정면 문정리[41] 구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동전리[42] 구 의주군 피현면 정산동[43] 구 구성군 동산면 용풍동[44] 구 태천군 서성면 송귀동[45] 구 영변군 소림면 원등동. 독립유공자 문성각이 이 마을 출신이다.[46] 구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47] 구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48] 구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49] 구 정주군 마산면 원서동[50] 구 철산군 정혜면 어산동[51] 구 용천군 북중면 용주동[52] 구 평안북도 초산군 도원면 회목동[53] 구 평안북도 자성군 여연면 중평동[54] 구 평안북도 자성군 여연면 중상동[55] 구 함주군 흥남읍 운성리. 문재인의 부모가 이 곳 솔안마을 출신이다.[56] 이 때문에 과연 남평 문씨의 모든 파가 한 뿌리에서 갈라졌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저 두 파는 다른 파들과는 다르게 대부분 경상도에 본적을 둔다. 그렇지만 호적이 근대적인 모습을 하게 된 시기는 갑오개혁 입법 일환으로 1896년 호구조사 규칙과 호구조사 세칙이 공포되면서이다. 또한 이때도 호주의 직계존속, 직계비속이라도 함께 살지 않으면 호적을 달리 했다. 그런 근대적인 호적조사마저도 일제에 의해서 폐지되고, 일제가 1909년에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본적(本籍)'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다. 즉 '본관'과는 달리 '본적'이 어느 지역이라고 자기 조상들이 옛날에도 그 지역에서 살았다고 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