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흥

 


성명
민영흥(閔泳興)
이명
민영흥(閔永興)
본관
여흥 민씨
생몰
1911년 5월 12일 ~ 1983년 4월 20일
출생지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평리[1]
사망지
전라남도 화순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민영흥은 1911년 5월 12일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사평리에서 태어났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광주고보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 20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약간 명과 함께 광주고보 대기실에 회합하여 10월 30일의 충돌사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오를 정렬하여 번화가를 누비며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이후 11월 3일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광주 읍내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이후 화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3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민영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송주면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