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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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興 閔氏
여흥 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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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관향'''
경기도 여주시 여흥동
'''시조'''
민칭도(閔稱道)
'''집성촌'''
경기도 여주시
경기도 김포시
강원도 삼척시
충청북도 충주시
충청북도 청주시
경상북도 청도군
경상남도 산청군
전라남도 해남군
황해도 벽성군
함경남도 단천시
경기도 안성시
'''인구'''
171,740명(2015년)
'''링크'''
여흥민씨대종회
1. 개요
2. 역사
2.1. 고려 이전 및 여흥 민씨 외의 민씨
2.2. 고려
2.4. 여흥 민씨 일가의 친일과 항일 운동
2.4.1. 친일
2.4.2. 항일 운동
3. 분파
4. 출신 인물
4.1. 고려시대 인물
4.2. 조선시대 인물[1]
4.3. 24세손[2]
4.4. 25세손[3]
4.5. 26세손[4]
4.6. 27세손[5]
4.7. 28세손[6]
4.8. 29세손[7]
4.9. 30세손[8]
4.10. 31세손[9]
4.11. 32세손[10]
4.12. 33세손[11]
4.13. 34세손[12]
4.14. 항렬 미상
4.15. 민씨를 예명으로 쓰거나 명예 민씨인 인물
5. 가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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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관은 여흥(驪興) 뿐이며, 여흥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의 이칭(異稱)이다.
시조는 민칭도(閔稱道)라는 중국 사람인데 공자 학파의 공문십철의 한 사람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으로 외교를 목적으로 북송에서 처음 건너왔다가 고려가 마음에 들어서 고려왕에게 황려(여흥)를 식읍으로 부여 받고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황려 민씨로 불렸다.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171,740명이다. 파들은 모두 여흥 민씨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민씨는 다 같은 집안이다.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에게는 민식과 민공규 두 아들이 있었는데 민식의 후손이 상서공파, 민공규의 후손이 정의공파이다. 과거 급제자 수는 상서공파가 압도적 다수를 배출했지만 민씨 출신 인물 중 꽃이라고 할 수 있는 4명의 왕비는 모두 정의공파에서 배출했다. 정의공파 11세이자 분파된 문도공파의 파조인 어은 민제의 집안에서 원경왕후를, 역시 정의공파 21세이자 삼방파의 파조인 지숙 민유중의 집안에서 인현왕후, 명성황후, 순명효황후를 배출했다.
실제 인구 순위는 49위 정도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가상 매체에서는 의외로 많이 보인다. 원경왕후, 인현왕후명성황후처럼 역사에 이름이 남은 여인들이 민씨이기에 등 실제 인구 빈도에 비해 비교적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우아해 보여서인지, 가상 매체에서는 여주인공의 성씨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예명으로도 여성 연예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당장 아래 예명을 쓴 연예인의 대다수가 여성 연예인이다.[13] [14]
항렬을 철저히 지키는 집안 중 하나이고 현대의 민씨 대부분은 시조 29~33세손 사이에 있다.[15]

2. 역사



2.1. 고려 이전 및 여흥 민씨 외의 민씨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 고려 전기에도 민가거 등의 민(閔)씨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몇몇 있으나 이 인물들이 여흥 민씨 인지는 알길이 없다.
다만 고려 이전에도 몇몇 민씨가 보이는데 전설로는 여주에 있는 민굴(閔窟)이라는 동굴에서 나왔기에 민씨라고 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서흥의 토(土)성으로 민씨가 있는데 민가거의 후손들로 보이고, 영주의 토성으로도 민씨가 있는데 여흥민씨 해관지후공파로 족보에 등재는 되어있는데 조금 더 고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예로 민영모의 장자 민식의 부인이 민씨인데 마찬가지로 어느 민씨인지 알수가 없지만 이런 혼인 등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민씨 가문이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토착 민씨 가문을 흡수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여흥 민씨 외에 다른 민씨는 극소수 이거나 없다고 보고있다.

2.2. 고려


이미 고려시대에 시조 민칭도의 증손 민영모(閔令謨, 1115~1194)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후손들도 높은 벼슬에 올랐을 만큼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서 명성을 누렸다. 고려말에는 민제가 한 신흥 무인가문에 셋째 딸을 시집보냈는데 이때 시집보낸 딸이 후일 원경왕후, 사위가 후일 조선의 3대 국왕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에게는 이방간(회안대군)이라는 형이 있는데 이방간의 부인 역시 여흥민씨 판도판서 민선의 딸이다.
여말선초의 과도기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농은 민안부와 같은 인물도 있었고, 민여익과 같이 조선의 개국에 기여해 개국공신 반열에 오르는 이도 있었다. (위에 잠깐 언급한 산청에 사는 정정한 치자항렬 할아버지는 민안부의 후손일 확률이 99%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족과 통혼이 가능한 재상지종(15개가문)에 선정되었고 이러한 전력탓인지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왕후를 배출해 낸다. 정작 고려왕실과 통혼한 경우는 몇차례 없다.

2.3. 조선


어쨌거나 조선이 들어선 이후 이방원은 당대의 명문가인 처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를수 있었으나 이후 태종의 외척 정리과정에서 원경왕후는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민제의 아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태종에 의해 사사되었으나 이들의 후손들은 세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이후에도 여흥민씨들은 조선의 명문가로 자리잡아 조선 왕실과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었고, 많은 문과 과거 합격자(242명, 9위)와 대신들을 냈다. 당파로는 서인 노론에 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당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민암도 있고 북인으로서 우의정에 오른 민몽룡도 있다. 여흥 민씨 가문은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및 6조 판서를 다수 배출하며 명문가의 위세를 떨쳤다.
조선말에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명성황후 민씨, 순명효황후를 배출한 외척가문으로서 세도정치를 폈다. 애초에 흥선대원군이나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부터 여흥 민씨와 결혼을 했었다. 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순종까지 여흥민씨는 처가이자 외가이자 사돈이다. 이때의 여흥 민씨는 안동 김씨(장동 김씨)나 풍양 조씨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극심한 민폐를 끼치며 탐관오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훗날 을사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도 당대엔 탐관오리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니... 민영환은 실제로 탐관오리라고 보기엔 힘들긴 하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은 결국 왕조국가에서 최정점인 국왕으로 향하게 되는데, 정작 왕을 까지는 못하니까 대신에 주변 대신들을 돌려치는게 조선시대의 여론형성 과정이었다. 세도 정치 시기이니 자연스럽게 외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풍문들을 기록한 야담집에서는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되게 된다. 특히 황현이 서술한 매천야록에서는 작심하고 명성황후를 공격하고 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황현의 입장에서 당시에는 이미 죽었지만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온건개화파는 그 누구보다 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급진개화파들의 제1 목표는, 대놓고 개화를 반대하던 이들이 아니라 급진개화파였다가 온건개화파로 노선을 변경한 민영익 같은 사람이었다.

2.4. 여흥 민씨 일가의 친일과 항일 운동


이때 향병(鄕兵) 한 아무개(韓某)라는 사람이 장례지에서 '''민영휘[16]

를 보고''' “당신도 호상(護喪)을 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성이 민씨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살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라가 망하였지만 한 번 죽어 속죄를 하지 않고 충정공(忠正公)의 영구를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뾰족한 내 군화에 치여 죽을 테니까!”라고 하자 민영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매천야록 中 을사조약으로 국민들에게 사죄하며 자결한 애국지사 민영환의 장례식에서 친일파 민영휘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보인 반응
항일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의 후손 특집기사

2.4.1. 친일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공식 발표한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1,006명중에 민씨 반민족 행위자는 총 23명으로 성씨중에 11번째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대한제국 황실 종친인 전주 이씨와 외척인 여흥 민씨는 일본의 대표적인 회유대상이었기 때문이었고, 기득권 층이던 민씨 일족은 나라가 망한것에 책임이 있었음에도 여기에 잘도 넘어갔다.
덕분에 여흥 민씨들은 세도정치로 유명한 안동 김씨들처럼 국사를 배울 때마다 씁쓸해한다. 우봉 이씨들도. 게다가 민씨 본관에 다른 지방을 본으로 삼은 건 없다보니 더 그렇다.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은 가깝든, 멀든 모두 명성황후의 친족들이다. '''자신들의 황후이자 친족을 살해한 자들한테!''' 빌붙었던 것이다.
  • 민건식 (1879~1944)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17]의 아들이다. 1910년 이후 남작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 민대식 (1882~?)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 민영규 (1846~1922)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18]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 민영욱 (1900~1963)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 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05년에는 휘문학교를 세웠는데 이게 이미지 세탁에 한몫하고 있다.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자들도 현재 그의 후손들.#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고, 결국 환수 불가로 결정됐다.#
  • 민형식 (1875~1947)
민영휘의 양자로 한 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 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 민형식 (1859~1931)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 민종묵 (1835~1916)[19]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 민철훈 (1856~1925)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유인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철훈과는 동명이인이다.

2.4.2. 항일 운동


민씨들이 친일한 사람도 많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도 많았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한 민영환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의병대장 민종식, 의병대장 민긍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사실 교과서에 소개되지만 않았을 뿐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소소하게 많다. 사실 같은 민씨라고 해도 성향과 상황은 제각각이라서(...).[20][21][22] 위에 설명되어 있듯 민씨 일가는 지배계층으로 회유의 대상이었지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3] 이 때문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을 한 민영환이라든지 상해로 망명간 민영익이라든지 회유되지 않은 민씨 일가들은 중국으로 망명을 가거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젔다.
그러나 민씨 일가가 친일 아니면 항일 가문 같은 흑백논리 집단은 아니다. 왜냐면 명성황후와 민씨 일가가 권력을 얻고 떵떵거리던 시절에도 가난하게 살아가던 비 지배계층 민씨 일가도 있었기 때문이다.[24] 다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씨 척족(戚族)의 부정적인 영향이 너무 강해서[25] 묻히는 감이 있다.
아래는 민씨 독립유공자 주요 명단이다.
  • 민영환 (1861-1905):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을사조약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했다. 건국훈장 중 대한민국장 수훈자이다.[26] 항목 참조.
  • 민종식 (1861-1917): 의병 (일본헌병이 주둔하고 있는 홍주를 습격 점령하였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사형언도)
  • 민긍호[27] (1865-1908): 의병활동 (원주 주재 일본경찰분관소를 습격하는등 활약하다. 원주에서 전투 중 순국)
  • 민강(1883-1931): 아버지 민병호와 같이 서울에서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만들어 경영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최초 신약 활명수를 출시해 1910년에 국내 최초로 상표등록했다. 일제강점기 치하이던 1919년에 경성 연통부 행정책임자로서 활명수 판매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으며 그 이유로 일제의 갖은 탄압을 받으며 1931년 주식회사로 전환했으나, 민강 초대 사장은 독립운동에 힘쓰다 두 차례 걸친 옥고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으로 사세가 기울어지자 1937년에 독립운동 동지 보당 윤창식(1890~1963)에게 인수되어 지금까지 이어져가고 있다.
  • 민양기 (1899-1922): 독립운동 (은율경찰서를 습격 친일군수 최병혁을 죽였고 체포 되어 사형 당함)
  • 민영구 (1909-1976): 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운동요원으로 항일 선전 광복군)
  • 민용호 (1869-1922): 경상남도 산청군 출생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장으로써 활동(강릉 관동동구군도창의소 의병 대장)
  • 민필호 (1901-1963): 임시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부단장, 무장경비대 창설 등 업무를 맡아 했으며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을 했다.
  • 민효식 (1854-1910): 의병 (황해도 지역 의병장)
  • 민가현 (?-1908): 의병 (황해도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다가 일본제국 경찰과 교전 끝에 전사순국)
  • 민동식 (?-1896): 의병 (강원도 의병으로 삼보전투 인제전투 등에서 활약 했으며 교전 중 순국)
  • 민동식 (동명이인): 여주군 가서면(加西面) 신문동(新文洞)에 거주하던 양반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민동식은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는 등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짐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여주·지평·양근·음죽의 4군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8]
  • 민백형 (?-1907): 의병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다 평산군에서 토벌대와 교전 중 순국)
  • 민병길 (1884-1942): 임시정부 활동
  • 민병숙 (1873-1919): 3.1 운동 (강원도 홍천군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지던 중 일본 헌병 총에 순국)
  • 민병태 (1870-1919): 3.1 운동 (홍천에서 일본제국 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
  • 민병찬 (1885-1926): 3.1 운동 (홍천에서 만세운동 주도 춘천형무소에 투옥후 만주로 망명 군자금 모집)
  • 민수현 (?-1910): 의병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
  • 민영수 (1921-2011):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 후 광복군 대위로 항일운동)
  • 민영완 (1911-1976): 임시정부 활동
  • 민영학 (1916-1945): 독립 운동 (일본군인 5명 일본군속 등 12명 사살)
  • 민용운 (1876-1929): 3.1운동 당시 홍면이 계획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홍면이 총에 사살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동료들과 함께 투석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는 일본 순사를 사살하였다. (징역 7년 받음)
  • 민제호 (1890-1932): 임시정부 활동
  • 민찬호 (1877-1954): 독립 운동
  • 민찬호 (1903-1950): 독립 운동 (투옥)
  • 민태규 (1882-1968):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철훈 (?-1896): 유인석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 일제에게 사살당하였다. (순국) 일제에 남작 작위를 받은 민종묵의 아들 민철훈과는 동명이인이다.
  • 민충기 (1888-1932): 임시정부 요인으로 대한독립신문에 쓸 자금과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받았다. (징역 5년 받음)
  • 민창식 (1899-1938):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치도 (1868-1921): 합방 후에도 독립 운동 의병장에게 개인적으로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전달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후 출옥 다음날 일제에 항거하라는 유서를 국민에게 남기고 자결.
  • 민치영 (1892-미상):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였다. (징역 10년 받음) 이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받았다.
  • 민한식 (1876-1915): 의병 (징역 10년 받음)
  • 민기수 (1884-미상):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순철 (1895-1954): 독립 운동 (징역 3년형 받음)
  • 민창식 (1888-1948): 독립 운동 (징역 6월 받음)
  • 민순호 (1880-1966): 문경에서 의병활동. 의병 (1896년 이강년을 따라 의병 활동하였고, 1905 1907년 의병활동. 특히 1907년에는 적 500여명을 도륙)
  • 민시식 (1878-1947): 의병
  • 민주호 (1887-1942):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갑 (1888-1965):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달 (1859-1924): 독립 운동
  • 민영면 (1886-미상):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후 또 징역 2년 받음)
  • 민영팔 (1874-1926): 의병
  • 민영흥 (1911-1983): 독립 운동 (금고 6월형 받음)
  • 민옥금 (1905-1988):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원명 (1876-?): 독립 운동 (징역 2년 받음)
  • 민재봉 (1890-1940):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주혁 (1870-?):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춘기 (1922-2018): 일본 오사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만주의 독립군과 연락을 꾀했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당하였고, 징역 3년 받았으나 곧 45년이 되어 일제가 패망하여 풀려났다.
  • 민치방 (1873-1925): 독립 운동 (일본군인이 총검으로 찔러 평생 팔을 쓰지 못하고 여생을 보냄)
  • 민홍식 (1881-1951):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동호 (1874-1938): 의병
  • 민병두 (1885-1960): 독립 운동
  • 민영식 (1899-1980): 독립 운동
  • 민성호 (1836-1908): 의병
  • 민영명 (1909-1960): 독립 운동
  • 민인호 (1854-1925): 의병
  • 민영로 (1919-1950): 독립 운동
  • 민록식 (1897-1962): 독립 운동
  • 민영숙 (1920-1989): 광복군
  • 민재학 (1896-1922): 독립 운동
  • 민충식 (1890-1978): 임시정부 활동
  • 민제식 (1868-1924): 독립 운동
  • 민형식 (1875-1947): 아버지가 일제에게서 받은 조선귀족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올라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인영 등의 을사오적 암살 시도 당시 군자금으로 1400환(1만 4천냥)을 지원했으며, 이것이 발각되어 유배 10년형에 처해졌다.[29]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각종 신문과 학교, 학회에 자금을 대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였다.
  • 민태곤: 남작. 일본 유학중인 1940년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1944년 일본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래서 유일한 조선귀족출신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 민영익: 의견이 갈리지만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 비용을 대주거나 하였다.
그 외 다수가 있다.

3. 분파


큰 분류로는 4세인 민영모의 장남 민식을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와 차남 민공규[30]를 파조로 하는 정의공파가 있다. 이후 상서공파에서 26개[31], 정의공파에서 20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4. 출신 인물



4.1. 고려시대 인물


  • 민칭도: 북송 출신 여흥 민씨 시조, 고려조 상의봉어
  • 민영모: 인종·명종조 평장사, 태자태사[4세]
  • 민공규: 명종조 평장사, 태자소보[5세]
  • 민식: 신종조 형부상서[5세]
  • 민희: 고려말 대장군[8세]
  • 민지: 고려말 첨의정승[8세]
  • 민훤: 고려말 찬성사[7세]
  • 민적: 충혜조 대제학[9세]
  • 민사평: 충혜조 대사성[10세]
  • 민세형: 고려조 태자소보[세조]
  • 민의: 고려조 좌복야
  • 민명신: 고려조 태복야[6세]
  • 민휘: 고려조 문하시중[7세]
  • 민뇨: 고려조 대장군[7세]
  • 민각: 고려조 대장군[7세]
  • 민기: 고려조 평장사[7세]
  • 민방: 고려조 좌복야[7세]
  • 민상정: 공민조 찬성사[9세]
  • 민종유: 충숙조 평장사[8세]
  • 민순: 고려조 상서
  • 민선: 고려조 찬성사
  • 민유: 고려조 대제학[10세]
  • 민서: 고려조 도평의사[10세]
  • 민개: 공양조 대사헌
  • 민안부: 고려조 예의판서[10세]

4.2. 조선시대 인물[32]


  • 원경왕후: 조선 3대 왕 태종의 왕후이자, 세종대왕의 모후.[12세] 문도공파이다.
  • 민무구:원경왕후의 동생이자 민무질의 형 문도공파[12세]
  • 민무질:민무구의 동생 형과 같이 태종에게 숙청당했다.[12세] 문도공파
  • 민제: 조선 태조조 문하우정승 (우의정), 태종조 좌정승 (좌의정). 원경왕후와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아버지. 문도공파의 파조이다.
  • 민신: 조선 단종조 이조.병조판서 계유정난때 수양대군에게 일파에게 살해당하였다. 여흥민씨 충정공파의 파조
  • 인현왕후: 조선 19대 왕 숙종의 계비.[33][22세]
  • 민여익: 조선조 호조판서
  • 민효중: 중종조 좌찬성
  • 민몽룡: 조선조 우의정
  • 민기: 선조조 우의정
  • 민순: 조선조 중추부사
  • 민응협: 조선조 참판[20세]
  • 민진원: 숙종조 우의정, 영조조 좌의정[22세]
  • 민광원: 조선조 강원도 감찰사[20세]
  • 민유중: 조선조 병조판서[21세]
  • 민시중: 조선조 대사헌[21세]
  • 민식: 조선조 돈령부사
  • 민인생: 조선조 사관 태종을 스토커 처럼 따라다니며 시시콜콜한 일 까지 태종실록에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12세]
  • 민의생: 조선조 예조판서
  • 민수생: 조선조 이조판서[11세]
  • 민무희: 조선조 제학
  • 민유경: 조선조 중추부사
  • 민진주: 숙종조 영의정[22세]
  • 민영우: 고종조 공조판서
  • 민겸호: 고종조 형조·병조·이조·예조판서
  • 민진장: 숙종조 중추부사, 우의정[22세]
  • 민태호: 고종조 대제학
  • 민영환: 광무조 군부대신
  • 민영환: 조선조 호조·병조·형조판서
  • 민영휘: 철종조 육영인사
  • 민취도: 숙종조 형조판서
  • 민영소: 조선조 이조·호조·예조·병조판서
  • 민승세: 조선조 대제학
  • 민종묵: 조선조 형조·병조판서
  • 민희: 숙종조 좌의정
  • 민정중: 조선조 좌의정[21세]
  • 민암: 조선조 우의정[21세]
  • 민응수: 영조조 우의정
  • 민규호: 고종조 우의정
  • 민영규: 고종조 영의정

4.3. 24세손[34]


  • 민백상: 영조조 우의정[37]

4.4. 25세손[38]


  • 민가현 (?-1908): 의병 (황해도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다가 일본제국 경찰과 교전 끝에 전사순국)
  • 민수현 (?-1910): 의병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
  • 민주혁 (1870-?):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4.5. 26세손[39]


  • 민치도: 고종조 애국지사
  • 민치록: 고종조 영의정
  • 민치방 (1873-1925): 독립 운동 (일본군인이 총검으로 찔러 평생 팔을 쓰지 못하고 여생을 보냄)
  • 민치영 (1892-미상):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였다. (징역 10년 받음) 이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받았다.
  • 민병호: 궁중 선전관, 독립운동가, 발명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약인 활명수를 개발했고 동화약품을 설립했다.

4.6. 27세손[40]


  • 명성태황후: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정후(正后).
  • 여흥부대부인: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친어머니.[41]
  • 민승호: 조선의 관료. 명성황후의 양오빠이자 여흥부대부인의 친동생.
  • 민긍호: 의병활동 (원주 주재 일본경찰분관소를 습격하는등 활약하다. 원주에서 전투 중 순국)
  • 민겸호: 조선의 관료. 여흥부대부인의 친동생.
  • 민태호(조선)(閔台鎬): 조선의 관료. 순명효황후와 민영익의 친아버지.
  • 민필호 : 임시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부단장, 무장경비대 창설 등 업무를 맡아 했으며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을 역임
  • 민강: 독립운동가, 기업가. 아버지 민병호는 활명수를 개발했고 아들인 민강은 동화약품의 초대 사장이다. 족보상 이름은 민기호

4.7. 28세손[42]


  • 순명효황후: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정후(正后).
  • 민영기(閔泳綺): 조선 - 대한제국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 민영남: 정치인. 前 전라남도지사.
  • 민영삼: 정치평론가. 前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 민영익: 조선 - 대한제국의 관료.
  • 민영환: 조선 - 대한제국의 관료.[43]
  • 민영휘(민영준): 조선 - 대한제국의 관료.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의 설립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매국노
  • 민영주: 독립운동가 민필호의 딸
  • 민영훈: 前 제일은행장, 前 은행감독원장

4.8. 29세손[44]


  • 민관식: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 민기식: 육군참모총장, 국회의원
  • 민응식: 조선 - 대한제국 관료 [45]
  • 민응식: 성우.
  • 민종식: 구한말 의병장
  • 민희식: 초대 교통부장관
  • 민준식: 前 전남대학교 총장
  • 민충식: 국회의원
  • 민후식: 해태유업(주) 회장
  • 민홍식: 서울대학교 교수
  • 민규식: 前 대한해운공사장
  • 민찬식: 일양신용금고 회장
  • 민용식: 일우해운(주) 대표
  • 민태식: 충남대학교 총장

4.9. 30세손[46]


  • 민병권: 육군중장,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 민병기(1901): 의사, 국회의원, 전남도지사, 충남도지사, 내무부 장관
  • 민병기(1927): 고려대학교 교수, 국회의원
  • 민병돈: 군인. 육군중장[47]
  • 민병두: 국회의원
  • 민병렬: 정치인
  • 민병석: 조선 - 대한제국의 관료.[48]
  • 민병석: 전두환 전 대통령 주치의였고 우리나라 내과학 관련 전문분야의 정립과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공로자였지만 안타깝게 그 사건에 휩쓸려 순국하셨다.
  • 민병주: 과학자, 국회의원
  • 민병철: 교육인, 민병철어학원 원장
  • 민병초: 국회의원
  • 민병헌: 롯데 자이언츠 야구 선수
  • 민병희: 강원도 3선 교육감
  • 민병덕: 21대 국회의원,변호사
  • 민승우: 성우.[49]
  • 민지환(閔智煥): 탤런트. 개명 전 이름은 민승원(閔承源).
  • 민규동: 영화인.[50]
  • 민병권: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 민병철 (동명이인): 서울대학교 교수
  • 민병구: 서울의과대학 교수
  • 민병수: 서울대학교 교수
  • 민병근: 중앙대학교 부총장
  • 민병덕: 해태유업(주) 대표
  • 민병도 : 한국은행 총재

4.10. 31세손[51]


  • 민갑룡: 경찰청장[52]
  • 민강복: (주)버라이어티몰 대표이사. 미식축구 선수(국가대표).[53]
  • 민봉기:전 16대 국회의원,남구청장출신
  • 민복기: 변호사, 前 법무부 장관, 前 대법원장.
  • 민상기: 수원삼성블루윙즈 소속 축구선수.
  • 민영기(閔永基): 뮤지컬 배우.[54]
  • 민욱: 탤런트. 본명은 민우기(閔宇基)이며, 예명 민욱은 족보에 호라고 기재되어 있다.
  • 민은기: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 민우기: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화학&생물과학 연구자
  • 민윤기: '기'자 돌림이 맞고, 아는 형님에서도 32세손 민경훈보다 한 항렬 위라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친형의 이름도 원래 '기' 돌림이었으나 개명을 했다.
  • 이그니토(본명: 민재기): 힙합 래퍼.
  • 민종기: 정치인(前 당진군수).[55]
  • 민찬기: 前 프로게이머, 방송인.
  • 민필규: KBS 기자.
  • 민태호(閔泰淏): 야구 선수. 개명 전 이름은 민성기(閔成基)다.
  • 민항기: 천안(호두과자) 대신제과 前회장
  • 민형배: 정치인.
  • 민만기: 고려대학교 교수
  • 민문기: 前 대법관
  • 민영기: 국립천문대장
  • 민일영[56]: 前 대법관
  • 민중기: 대한제당(주) 대표이사
  • 민양기: 서울대학교 교수
  • 민두기: 서울대학교 교수,현대 역사학자‧교육자
  • 민창기: 전 아나운서 [57]
  • 민철기: 신흥학원 이사장
  • 민홍기: 이화여대 교수
  • 민덕기: 크라운맥주 사장
  • 민명기: 여성작가, 민영환의 증손녀
  • 민홍기(저스틴 H. 민): 한국계 미국인 배우
  • 민훈기: 야구 기자, 해설위원

4.11. 32세손[58]


  • 민경배: 군인. 육군대장
  • 민경삼: 야구선수,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 현 SK 와이번스 사장
  • 민경아: 뮤지컬 배우
  • 민경중: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전 CBS 보도국장
  • 민경욱: KBS 보도국 기자/앵커 출신, 청와대 대변인, 제20대 국회의원.[59]
  • 민경의: MBC 보도국 기자.
  • 민경호: SBS 보도국 기자.
  • 민경중: 군인. 육군중장[60]
  • 민경철: 변호사.
  • 민경훈: 버즈 보컬
  • 민가린: 걸그룹 ELRIS의 멤버. 아버지 이름이 민충기(閔忠基)로 '기(基)' 항렬이라서 민가린은 '경(庚)' 항렬.
  • 민성준: 개그맨[61]
  • 민형준: 프로듀서. 전 YTN PD
  • 민경천: 홍익대학교 총장
  • 민경중: 기아산업(주) 대표
  • 민경희: (주)선진운수 창업주[62]
  • 민선예: 前 원더걸스 멤버.[63]

4.12. 33세손[64]


  • 민좌홍: 기획재정부 민생경제정책관.
  • 민석홍: 서양사학자,서울대명예교수
  • 민진홍: 아이돌, 모델.
  • 민홍철: 제19, 20, 21대 국회의원.[66]
  • 한그루: 본명 민한그루. 전 배우.

4.13. 34세손[67]



4.14. 항렬 미상



4.15. 민씨를 예명으로 쓰거나 명예 민씨인 인물


원래는 민씨가 아닌 사람들 기준.
  • 민지아: 배우, 본명은 김민주.
  • 민지영: 배우, 본명은 김민정.
  • 민영원: 배우, 본명은 조효경.
  • 민해경: 배우, 본명은 백미경.
  • 민효린: 배우, 본명은 정은란.
  • 민시아: 치어리더, 본명은 이혜인
  • 민채윤 : 레이싱모델, 본명은 정은정
  • 민수아: 가수, 본명 김나현
  • 민병갈(1921~2002):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했으며 천리포수목원을 만들었다. 민영휘의 손자인 민병도의 영향을 받아 민병갈이라 이름지었다. 본명은 Carl Ferris Miller

5. 가상 인물


지금의 서브컬처에선 드라마나 웹툰과 애니의 캐릭터로 나오지만 주로 악역과 악역이 아닌 반동인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싸이코패스이자 악역인 민준국처럼 뭔가 악역이자 악당이 아닌 반동인물 (예를 들면, 클로저스민수호뷰티풀군바리민지선 자이언트민홍기)같은 '''악역이자 악역이 아닌 반동인물들의 캐릭터'''들의 성씨로 많이 쓰인다.
예전에는 애니메이션의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으로 많이 나왔고 선역으로 많이 나왔었는데..[69]
마법소녀만화이나 아이돌애니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성씨이다.
- 민씨 캐릭터(악역악당이 아닌 반동인물 들인 경우는 '''볼드체''')



[1] 대동항렬 제정 이후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인물은 해당 항렬 항목에 기재.[2] '백(百)O' 항렬.[3] 'O현(顯)', 'O혁(爀)' 항렬.[4] '치(致)O' 항렬.[5] 'O호(鎬)' 항렬. 원래 용을 썼는데, 민진용의 옥사 이후 호로 바꾸었다.[6] '영(泳)O' 항렬.[7] 'O식(植)' 항렬.[8] '병(丙)O' 항렬.[9] 'O기(基)', 'O규(圭)', 'O배(培)' 항렬.[10] '경(庚)O' 항렬.[11] 'O홍(泓)', 'O원(源)' 항렬.[12] '동(東)O' 항렬.[13] 2000년에 민경훈, 선예가 등장하기 전에 민씨는 주로 법조계,정치계,교육계,종교계,아나운서,언론인이 주로 많았고 연예인은 드물었다. 민해경이나 일부도 있지만 예명을 쓰는 가수다. [14] 여성 연예인들의 예명으로는 한씨가 더 많이 쓰인다.[15] 산청의 집성촌에 가면 26세손(致자 돌림, 명성황후의 '''친척 아저씨 뻘'''이다.)인 할아버지께서도 정정히 살아계신다. 순조때에 승지를 지낸 민치재(1758~1813)의 생몰년을 감안하면 약 200년 차이가 난다.[16] 1906년 휘문 의숙(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이자 대표적인 친일파로 활동한 인물이다.[17] 아래 항목에 있는 민영기[18]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작 자리도 거절했다. 1930년 죽을 때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19] 항렬로는 명성황후의 할아버지 뻘인데, 이 항목에 적힌 민씨 척족들 중 명성황후와 관계가 가장 먼 민씨일 것이다. 왜냐하면 명성황후와는 여흥 민씨 4세손(시조 민칭도의 증손자 민영모까지 공통 조상), 그러니까 민종묵 기준으로는 21대조, 명성황후 기준으로는 23대조까지 같고 그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 촌수로는 무려 44촌이다.(...) 얼마나 먼지, 항렬 체계도 다르다. 25세손으로, 같은 세대에서 명성황후 일가는 현(顯)자 항렬이지만 민종묵 일가는 종(種)자 항렬이다.[20] 얼마나 성향이 제각각이냐면 근왕주의를 기치로 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한 민씨가 있는가 하면 친일파 민씨가 있고 사회주의하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씨도 있다.[21] 사실 조선말기가 아니라 수백년전인 여말선초 시기만 봐도 고려에 충절을 지켜 두문동 72현 전설에 꼭 등장하는 예의판서 민안부가 있는가 하면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된 민여익이 있었을 만큼 국가가 흔들릴 때 같은 여흥 민씨 사이에서도 편이 갈렸었다.[22] 현재 제20대 국회, 제21대 국회 등 여러 국회에서 야당측과 여당측에 각각 여흥 민씨가 있을 정도로 정치색이 가문 내에서도 갈린다.[23] 물론 대한제국시기에도 친일을 한 민씨 인물도 있었다.[24] 현재도 21세기 민씨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가문과 종친에 대한 소속감이 거의 없다. 종친회, 집성촌 정도가 되면 다르겠지만...[25] 명성황후 시절에는 전주 이씨보다 여흥 민씨 밑으로 들어가자라는 비꼬는 시가 있었을 정도다.[26] 순국 자체도 귀감이 될만 하지만 그의 자결은 3.1만세운동 이전까지 한민족 독립의지에 가장 강렬한 트리거 중 하나였다.[27] 가족들은 대부분 카자흐스탄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후손 중 한 명이 데니스 텐이다.[28]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84, 『독립운동사자료집』3[29] 특사로 곧 풀려남.[30] 개명 전 이름은 민자충.[31] 후술할 소윤공파를 이정공파와 같다고 볼 때 25개.[4세] 시조 4세[5세] A B 시조 5세[8세] A B C 시조 8세[7세] A B C D E F 시조 7세[9세] A B 시조 9세[10세] A B C D 시조 10세[세조] 2세[6세] 시조 6세[32] 대동항렬 제정 이후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인물은 해당 항렬 항목에 기재.[12세] A B C D 시조 12세[33] 원경왕후의 6촌인 입암공파의 파조 민심언의 직계 자손이다. 이후 왕후가 되는/추존되는 명성황후, 순명효황후도 마찬가지.[22세] A B C D 시조 22세[20세] A B 시조 20세[21세] A B C D 시조 21세[11세] [34] '백(百)O' 항렬.[35] 본관은 연안으로 대제학을 지내 조선 첫 3대 대제학이라는 유래 없는 일을 탄생시킨 이일상의 증손이다.[36] 이후 또한 당시 영의정 이천보와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이후는 조선 작자 미상의 소설 박씨전의 주인공인 박씨의 남편으로 나왔으며 인조 반정 1등공신 이귀의 아들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연평부원군 이시백의 5대손이다.[37] 항렬이 늦은편인데 민백상은 노론으로서 사도세자가 평양원유사건으로 인해 정치적탄핵이 되려 하자 영의정 이천보[35], 좌의정 이후[36]와 함께 한 달 간격으로 음독 자살을 하여 사도세자를 끝까지 지키려한 충신이었다. 이러한 영조대 인물이 1900년대 초반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아버지뻘이라는 이야기다.(...)[38] 'O현(顯)', 'O혁(爀)' 항렬.[39] '치(致)O' 항렬.[40] 'O호(鎬)' 항렬. 원래 용을 썼는데, 민진용의 옥사 이후 호로 바꾸었다.[41] 그러니까 고종의 어머니와 아내는 민씨 집안 기준 자매 뻘이다.(...) .[42] '영(泳)O' 항렬.[43]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애국지사로 알려져 있으나 살아생전에는 명성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부정부패를 저질렀던 탐관오리였기에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44] 'O식(植)' 항렬.[45] 바로 아래 인물과는 같은 항렬의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나이 차이가 무려 118세(...).[46] '병(丙)O' 항렬.[47] 윗 단락에 기재 된 민희식의 조카.[48] 흑역사 2이다.(...) 경술국적. 이 한마디면 끝.[49] 역암공파 30세손 승(承)O자 항렬.[50] 공목공파 30세손 O동(東)자 항렬.[51] 'O기(基)', 'O규(圭)', 'O배(培)' 항렬.[52] 형제가 2명 더 있는데, 모두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이름이 민자순(閔子焞), 민명일(閔明一)이나 할아버지 이름이 민기식(閔琪植)이며, 아버지 이름이 민병욱(閔丙旭)이라 31세손이 맞다.[53]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할아버지 이름이 민중식(閔重植)이며, 아버지 이름이 민병기(閔丙琦)이라 청백리공파 31세손이 맞다.[54] 동명이인 조선의 관료는 증조부 뻘 된다.[55] 흑역사 3(...). 항목 참조.[56] 역암공파 31세손 O영(榮)자 항렬.[57] 동양방송(TBC)에서 방송 생활을 시작해 KBS, MBC, SBS, CBS 아나운서와 해설위원 등을 거쳤으며 97년에 SBS에서 일요특집 모닝와이드를 강석과 진행을 했었다. 2014년 5월 6일에 별세[58] '경(庚)O' 항렬.[59] 민경삼의 사촌동생. 단, 나이는 동갑으로 민경욱이 4달 늦게 태어났다.[60] 민경배의 형.[61] 공목공파 32세손 O준(準)자 항렬.[62] 1999년 10월 26일 작고. 집성촌이 있는 경기 김포 출신이다. 선진운수가 한때 인항여객을 인수해 계열사로 두고 있었던 이유도 김포 출신인 민경희 창업주의 유지 때문이었다.#[63] 아버지 항렬이 '기'자 돌림이라 32세손이다. 민선예의 큰아버지의 이름은 민원기로 언론에 공개되었다.#[64] 'O홍(泓)', 'O원(源)' 항렬.[65] 출처: 여흥민씨족보.[66]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은 각각 이름이 민진홍(閔珍泓), 민삼홍(閔三泓)으로 돌림자를 썼으나(다만 셋째 동생은 본인처럼 이름이 민상원(閔相元)으로 돌림자를 쓰지 않았다.[65]) 본인은 쓰지 않았고, 그나마 가운데 '홍'자도 '泓'이 아닌 '洪'자를 써서 이름을 한자로 쓰면 閔洪喆이다.[67] '동(東)O' 항렬.[68] 특이하게도 성이 '민'씨고 이름이 외자인 '기'이다.[69] 그나마 주연급인 민씨 캐릭터를 꼽으면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민수아다!다!다!민우주 체포하겠어민호영쥬얼펫민호림대장금민정호 등을 들 수 있다.[70]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71] 비디오 더빙판 한정. KBS판과 대원방송판에서는 유리로 나온다.[72] 민수정의 아버지이다.[73] 시즌2에 어영대장으로 등장한다.[74] 추정이긴 하지만, 성씨가 나오지 않았고, 영어 자막에선 Min이라고 나왔기 때문에 성이 민이고 이름이 혁일 가능성이 있다.[75] 이 책은 90년대 틴틴문고의 소설중 하나이며 신세대x문고와 더불어서 주로 일본소설을 번역해서 현지화를 한 소설이며 일본문화가 개방되기전엔 현지화를 주로 많이했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은 민현규이고 여자주인공은 이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