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비록 나중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한때 바루스는 충성과 명예의 귀감이었다. 고대 슈리마 제국의 뛰어난 궁수였던 그는 동부 지역의 신전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의무를 신성하게 여겼다. 이케시아와의 전쟁 초반에는 그 저주받은 곳과 멀리 떨어져 있던 바루스의 고향조차도 공격을 받았다. 다른 관리자들이 외진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임무를 버리고 돌아갈 때도 홀로 남은 바루스는 화살을 날릴 때마다 괴로움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대신 남아서 맹세를 지키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초월체들의 사절단이 쓰러진 적들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묵상하는 바루스를 발견했다. 신성전사들조차도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불안함을 느꼈지만, 고귀한 희생을 인정받아 바루스는 신성전사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한 명의 초월체가 된 바루스는 이케시아인에 대한 복수심과 그들이 불러낸 공허에 대한 공포심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바루스는 그 전쟁에서 슈리마가 승리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그의 마음이 뒤틀리는 결과를 낳았다. 수 세기 후 제국의 몰락도 마찬가지였다. 반복된 잔혹 행위에 점차 무뎌졌고 마음을 닫아건 바루스는 냉혹한 살인자가 되어 타락한 종족의 의지에 따라 수없이 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의 이름은 전 세계에 두려움을 떨쳤다. 바로, 다르킨이었다. 그들은 같은 종족끼리 전투를 벌이면서도 저항하는 자는 누구도 살려 두지 않았다. 바루스는 수정 활로 적 영웅과 사령관들을 암살하여 다르킨이 필멸의 군대를 손쉽게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바루스는 결국 바스타야의 달 추적자들과, 발로란의 황금빛 갑옷을 입은 전사 여왕을 따르는 인간 마법사들에 의해 수세에 몰렸고 결국 자신의 수정 활 안에 갇혀 버렸다. 그는 분노에 차서 울부짖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르킨이 전장에 원초적이고 극악무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에, 여왕은 최후의 전투에서 이 위험한 무기를 사용하여 더 큰 승리를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그리고 수개월 후, 여왕은 나중에 아이오니아라고 알려지는 최초의 땅으로 바루스를 옮겼다. 이제 활의 힘 때문에 괴물이 된 여왕의 마지막 행동은 팔라스라는 마을을 굽어보는 산의 신전 아래 깊디깊은, 빛 한 점 없는 우물 안에 자신을 산 채로 묻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아이오니아의 자연에 존재하는 마법과 신전 수호자들이 치르는 의식의 힘으로 그곳은 바루스의 무덤이 되었다. 그렇게 활은 수백 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채 땅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녹서스 침공군이 최초의 땅을 공격했다. 야수 사냥꾼 발마와 그의 연인이자 “심장빛”인 카이[1]는 팔라스 신전에서 맨 먼저 들이닥친 녹서스 군과 싸우고 있었다. 둘은 용맹하게 싸워 적을 후퇴시켰지만, 카이가 그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슬픔에 사로잡힌 발마는 금단의 마법이 카이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믿으며 우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팔라스 신전이 품은 것은 지옥이었다. 두 사냥꾼은 다르킨이 내뿜는 힘에 휩싸여 버렸다. 둘의 육신은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날실과 씨실처럼 다시 엉겨 새로운 육신으로, 바루스의 영혼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몸으로 재탄생했다. 그리하여 신전에서 걸어나온 것은 눈부시게 창백하고 무정할 정도로 아름다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다르킨인 바루스였다. 그 영혼 속에서 두 세력이 서로 끊임없이 우위를 다투는 존재로 재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육신 속에서는 인간의 요소와 다르킨의 요소가 끊임없이 요동쳤고, 한쪽이 잠시 육신을 지배했다가 곧 다른 쪽에게 빼앗기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바루스는 자신의 종족 다르킨을 파멸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이 두 필멸자의 저항을 잠재우려고 분투했다. 하지만 발마와 카이 역시 바루스의 악독한 영향력을 물리치려 고투했고, 자신들의 사랑이 다르킨의 증오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발마와 카이가 언제까지 바루스의 의지와 싸울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이 가학적이고 자만심 가득한 살인자 바루스가 발마와 카이의 방해 없이 새로운 육신을 온전히 차지하게 된다면, 그날로 다르킨 종족의 생존자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룬테라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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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둠의 일족
바루스는 사막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수면에는 모래먼지가 앉았으나 강물은 마실 만했다. 바루스가 활을 지고 다니게 하려고 만들어낸 새로운 육신은 아름답고 민첩하고 강인했지만,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진다는 인간 육체의 약점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며칠 전에 마주친 등이 굽고 한쪽 팔은 시들시들하고 마치 새처럼 생긴 생명체가 이곳이 슈리마라고 알려주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바루스의 기억 속 슈리마는 적막한 황무지였다. “내가 그렇게 오래 갇혀 있었단 말인가.” 바루스는 새로이 얻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인간의 목소리를 경멸했다. 마치 원시적인 짐승이 내는 잡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디인가. 갇혀 있던 그 오랜 세월 동안에는…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필멸의 존재들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 새 같이 생긴 생명체는 바루스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생명체는 다르킨 전쟁이 얼마나 오래전에 벌어진 일인지 전혀 몰랐다. “우리 종족이 이 세계를 거의 말살할 뻔했는데, 이렇게 철저히 잊혀졌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세월이 지나면 가장 끔찍했던 공포조차도 사라질 수 있다.'' 머리 속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무시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구의 목소리지? 카이인가, 발마인가? 발마인 것 같기는 했지만, 필멸의 존재의 정신이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데다 흙탕물처럼 탁해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멸망이라는 심연을 마주했던 사실을 잊어버리는 종족이라면, 살 가치가 없지.” 바루스는 말했다. ''우리 종족은 잊지 않는다.'' 이건 발마군. 바루스는 그렇게 판단했다. ''공포는 신화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를 들어도 견딜 수 있고, 공포에서 교훈을 배우고, 그러면서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개념 아닌가. 바루스는 생각했다. 나의 종족이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운명에 처하는 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겠다. 바루스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저 앞쪽 강이 굽이치는 부근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동물들이 울부짖고, 각종 도구가 돌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바루스는 쏜살같이 달려나가 쓰러진 오벨리스크가 드리우는 그늘에 몸을 숨긴 다음 앞쪽을 살폈다. 강가에는 동물의 머리를 한 신들의 조각상과 기둥이 잔뜩 있는 고대 도시가 폐허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바루스가 감지했던 마법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래전의 마법, 불꽃 같은 머리결의 여왕이 바루스의 종족을 노예로 만들 때 썼던 마법. 아이오니아의 바위 아래 감옥에 바루스를 가두었던 마법. 햇볕에 검게 그을고 늑대처럼 군살 없이 탄탄한 몸매의 남자들이 폐허 바닥에 숨어 있던 유물의 방을 파내고 있었다. 다리가 굵직한 동물들이 구조물 깊은 곳에서 파낸 돌을 밖으로 실어날랐다. 삶아서 단단하게 만든 가죽 가슴갑옷을 두르고 날을 세운 갈고리창을 든 전사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바루스는 씩 웃고는 오벨리스크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착지하는 동시에 활을 쏠 채비를 마쳤다. 수정 활에서 보랏빛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없던 활시위에 으스스한 보라색 기운을 발하는 화살이 생겨났다. ''왜 저들을 죽여야 하는 거지?'' 카이의 목소리였다. 카이는 불필요한 살생을 증오했다. 바루스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카이가 활을 내리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의 종족이 내 종족을 괴멸시켰다.” 바루스는 조준을 유지하려 버티면서 말했다. “내겐 그 이유면 충분해.” 화살이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화살이 겨누는 앞쪽 멀리에서, 수염은 두 갈래로 갈라서 기르고 머리는 박박 깎은 건장한 전사 하나가 바루스를 목격했다. 전사는 경고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래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건가?'' 바루스는 숨을 내쉬었고, 다시 들이키기 직전에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화살을 쏘아 보냈다. 화살은 섬광과 함께 공중을 가르더니 수염 기른 전사의 가슴을 공격했다. 공격당한 부위는 불에 그을려 원래의 형체를 잃었고, 전사는 충격을 받아 입을 떡 벌리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다른 전사들이 창을 던졌지만, 바루스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오벨리스크에서 뛰어내리면서 피처럼 새빨간 불꽃을 내뿜는 화살을 마구 날려 보냈고, 땅에 발을 디딜 무렵에는 이미 그 화살에 전사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곧이어 불에 타듯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는 화살을 맞은 전사가 세 명 더 늘었다. 갈고리창 하나가 바루스에게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려 창을 피했고, 다시 일어서는 순간 진홍빛 화살을 두 대 연달아 쏘아 창을 던진 전사의 가슴을 공격했다. 바루스는 그렇게 폐허를 날렵하게 누비면서 붉은빛의 화살을 연사했다. 화살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목표에 명중했다. 상황은 금방 끝났다. 열여섯 명이 죽었고, 바루스의 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 갇힌 필멸의 존재들이 비통해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바루스는 피식 웃었다. 바루스가 인간을 죽일 때마다 그 둘은 괴로워했고, 약해졌으며, 바루스에 저항할 힘을 잃어갔다. 폐허가 된 도시를 발굴하던 자들은 도구를 내팽개치고 강을 향해 허겁지겁 달아났다. 바루스는 쫓아가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전사가 아니니 상관없었다. 게다가 무기를 들지 않은 필멸의 존재를 죽이면 바루스의 내면에 갇힌 발마와 카이가 격렬하게 반발하곤 했다. 바루스는 무너진 구조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칼과 악어 형상의 조각상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폐허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벽에는 큼직한 원반들이 공중에서 비옥한 땅으로 황금 빛살을 내리쬐는 풍경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돌에는 심지어 다르킨 종족이 룬테라에 오기도 전인 아득한 고대의 마법 문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액막이 봉인이군. 예전에는 강력했지만 지금은 아무 힘이 없어.” 바루스는 문자를 새긴 판석을 성큼 넘어, 커다란 뱀 머리를 한 신의 조각상이 우뚝 서서 파수를 보던 곳으로 걸어갔다. 조각상은 사암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먼 과거에 있었던 어떤 대참사 때문에 쓰러진 채였고, 그 너머로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이 있었다. 바루스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은 먼 옛날의 불꽃에 타버려 시커멓고 매끈해진 돌벽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루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매[2] 바루스가 찾는 여성 다르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 대체 어디 있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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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 배경
'''"화살은 찰나만 살 뿐이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맞혀야 할 대상에만 집중한 채."''' 아이오니아에는 예로부터 커다랗고 흉물스러운 구덩이[3] 하나가 있었다. 이 구덩이에서는 부패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세상 전체가 타락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때문에 아이오니아의 원로들은 구덩이 위에 신전을 짓고 파수꾼을 두어 부패한 기운을 억제하고자 했다. 이 일의 책임자가 바로 신전의 수호자 바루스였다. 아이오니아 최고의 전사들만이 신전 수호자로 뽑힐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받은 소임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활 솜씨를 갖추고 성품 또한 고귀했기에 어찌 보면 신전의 수호자는 정확히 바루스를 위한 직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바루스는 신전 근처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녹서스의 군대가 아이오니아를 침공했다. 그런데 하필 신성한 신전이 그들의 진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루스는 녹서스 기습 부대들이 휩쓸고 간 자리마다 시신과 폐허가 즐비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마저 없으면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진군해 오는 전쟁 기계들을 막아낼 방도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동시에 끝까지 남아 신전을 수호해야 하는 것 또한 바루스의 의무였다. 신전이 가둬두고 있는 타락한 기운은 절대 세상에 풀려나면 안 될 것이었기에. 결국, 바루스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파수꾼의 임무를 완수하는 길을 택했다. 결전의 그 날, 사원을 빼앗으려던 녹서스 부대들은 바루스의 화살 아래 모조리 격파됐다. 그러나 신전을 지켜내고 마을로 돌아간 그의 앞에는 연기 자욱한 폐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들의 칼끝에 목숨을 잃은 가족을 보자 회한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내 끓어오르는 증오로 변했다. 바루스는 녹서스 정벌대 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먼저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모든 걸 희생해 가며 지켜냈던 신전 밑바닥, 타락한 구덩이의 부패한 에너지를 제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구덩이는 타오르는 불꽃이 양초의 심지를 탐하듯 바루스를 통째로 집어삼켰고 추악한 기운은 그가 지닌 고귀한 내면의 힘을 잠식해 송두리째 정복하고 말았다. 복수심에 모든 걸 던지고 시꺼먼 불길에 몸을 내맡긴 바루스는 몸속으로 파고드는 증오의 힘을 느꼈다. 다시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애초에 모든 것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추악한 기운은 바루스에게 적을 파멸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적을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 따윈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바루스는 구덩이를 나와 아이오니아 정벌에 관여한 자들을 찾으러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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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후보:
바루스'''
날짜: CLE 22년 3월 7일
'''관찰'''
혹시라도 전쟁 학회 안에서 휘두르고 싶어질까 봐 걱정이 든 바루스가 활을 빨아들이자, 무기는 스르륵 손바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티끌 한 점 없이 반들반들 닦여 있는 회랑 벽에 붙은 장식용 방패와 검이 그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두 팔은 액체처럼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일종의 검은색 장갑으로 연결돼 있고, 발끝에서 허리까지 지저분하고 혼탁한 기운이 딱지처럼 더덕더덕 뒤덮고 있다.
언뜻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수한 색깔이 뒤섞여 바루스의 피부 위를 끈적한 석유처럼 흐르고 있다. 이 오염물질이 아직 온전히 남아있는 사람 살을 더 파고들어 오진 않았을까 바루스는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곤 거울에 미치는 모습이야 어떻든 간에,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아직 균형이 깨지진 않았다며 애써 위안 삼는다.
아직 끝장나지 않았어. 바루스가 다짐하듯 말한다. 난 망가진 게 아냐. 겉모습만 좀 바뀐 것뿐이지.
'''회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법이지.
테샨에게 활 잡는 법, 활시위를 당기는 법, 그리고 호흡을 조절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바루스 역시 활쏘기에 대해 더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다. 바루스가 사원의 수호자로 임명됐으니, 아들은 이제 스스로 무예를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늘 곁에서 지켜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루스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현실이 아니란 걸 날카로운 눈은 이미 간파한 터였다.
이건 소환사들이 리그의 챔피언 후보를 놓고 벌이는 장난 같은 심사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자신의 아들이, 그것도 살아서 서 있지 않은가. 바루스는 아들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헝클어뜨리며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이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들 곁에 다시 설 수 있는 이런 축복을 최대한 누리고 싶었다. 언덕을 올려다보던 둘의 시선이 사원에 가서 멈췄다.
사원은 이 마을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풍요의 시대를 온몸으로 웅변하듯, 실용성이란 찾아볼 수 없게 지은 건물이었다.
“팔라스의 구덩이에요,” 아들이나 아들이 아닌 존재가 말했다. “저기 팔라스의 구덩이가 보여요.”
“그래, 그땐 알지 못했지만 네 말이 맞다.” 바루스가 아들에게 대답했다.
“저걸 혼자서 지키게 했단 말이에요?”
“그랬단다.”
새로 수호자 역할을 맡은 이후부턴 놀랄 일 투성이였다. 어려서부터 매일 같이 드리던 기도문에는 중요한 부분들이 몇 가지 누락돼 있었다. 원로들이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었다.
얼굴, 가슴, 양팔에 지혜로운 올빼미 문신을 새겨 넣자 통찰력이 올라간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그 구덩이의 실체란. 겨우 지름 1.5미터 정도에 아무 특색도 없는 둥근 구덩이가 이렇게나 큰 근심의 근원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놀라웠던 사건은 처음 경비를 서던 날 일어났다. 구덩이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물리치기 쉬웠으리라. 구덩이는 거의 순간적인 환영이나 감각으로 말을 걸어왔다. 인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이 구덩이는 주위에 인간이 있는 걸 감지했다. 언덕 어귀에 인간들이 둥지를 틀고 있음을, 아둔한 육신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음을 구덩이는 모두 알았다. 바루스는 구덩이가 느끼고 있는 혼란을, 일종의 아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원에 의해 격리된 오랜 세월 동안 쌓여간 감정이었다. 구덩이는 바루스가 좋아할 만한 걸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에게 계속 뭔가를 주고 싶어했다. 구덩이는 남들을 만족하게 해 주려고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가둬두겠노라 약속했던 그런 ‘인정사정없는 괴물’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루스가 아침 봉인 의식을 치르려 성소에 들어섰더니, 젊음의 생기를 만끽하며 서 있는 자신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서 말라 비틀어지며 피부 거죽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환영이 보였다. 구덩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란 느낌이 확 들었다.
“지금 이렇게 해 줄까?” 구덩이가 그의 대답을 기대하며 제안했다.
“아니.” 바루스는 거절했다.
구덩이가 다시 말을 걸어오자, 현실은 완전히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는 발목까지 오는 피 웅덩이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물결이 번지면서 점점 올라오더니 마침내 굉음을 울리며 거대한 파도가 됐다. 그러더니 목소리가, 아니 목소리라고 생각되는 것이 애원하듯 다시 말을 걸었다. “지금 어때?”
그때 로즈마리와 참나무 향의 톡 쏘는 연기가 바루스의 환영을 비집고 들어왔다. 두 손을 뒤로 짚으며 털썩 쓰러진 바루스는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향로에 향을 채워 넣으려 했다. 하지만 구리 사슬에 걸리는 바람에 향로가 엎어지고, 내용물이 바루스의 손을 사정 없이 지져댔다.
“지금인가?”
구덩이의 음성이 마음속에서 쩌렁쩌렁 울렸지만, 이번엔 올빼미가 구덩이의 유혹을 물리쳐줬다. 올빼미의 힘에 기대어 미로 같은 벽을 따라 겨우 문으로 가자, 불길에 휩싸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이 처참한 광경을 보아야 하다니.
왠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바루스는 무작정 달렸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번에만은, 전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어쩌면, 어쩌면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러져버린 활 옆에 처참한 주검이 되어 누운 아내와 아들을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만큼은 그 활을 집어 들고서 사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겨주지 않았다.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환영이 보였다. 갈비뼈를 뚫고서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바루스는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인가?” 구덩이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지금.” 바루스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젠장.”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둑이 터지고 잠잠하던 웅덩이가 심연으로부터 터져 나와, 닿는 곳마다 끓어오르는 검은 유리로 날카롭게 할퀴어댔다. 허공으로 분출하며 피어나는 연기 기둥을 휘감아 돌던 액체가 급기야 바루스를 찾아 쓰러뜨렸다. 액체는 손에 닿아 살갗을 벗겨내더니 집어삼켜 버렸고, 이윽고 화살마저 먹어 치웠다. 두 팔, 두 다리를 먹어 들어가던 액체는 올빼미 문신이 새겨진 부분에 와서 그만 딱 멈췄다. 구덩이의 마력이 올빼미의 힘까지는 억누르지 못한 탓이었다. 무심한 광기의 그 순간, 바루스는 문득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이내 과거의 기억이 물러가고, 소환사 하나가 힘겹게 헐떡이는 게 보였다. 환영들이 속박에서 풀려나려 몸부림치며 끔찍한 악몽 같은 장면들을 계속 내보였다. 그리곤 점차 회고실의 모습이 분명히 자리를 잡으며, 기묘할 정도로 눈부시게 바루스가 겪어온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루스는 발끝만 겨우 지면에 닿아 있었다. 병력이 가까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바루스가 덮치자 행렬의 맨 앞에 있던 마차만은 말에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머리가 따르지 않는 자들, 혹은 그저 운이 없는 자들은 바루스에게 순식간에 죽어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바루스가 공격하던 속도를 늦추자, 모양은 어떨지 몰라도 기능만은 똑같은 활이 그의 손목에서 생명이라도 얻은 듯 저절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이 무기를 쓰는 법은 따로 배울 필요도 없었다. 남자 한 명이 바로 화살에 맞아 술 자루처럼 터져나갔다.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는 녹서스 군인들도 놀랄 수 밖에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아난대도 이들은 역시 피와 살로 된 인간일 뿐이었다. 빠른 속도만으론 그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바루스의 활에서 발사되는 기운은 비록 진짜 화살은 아니지만 마치 진짜처럼 녹서스의 기치 아래 선 모든 병사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갔다. 쭉 뻗어 나간 기운은 피에 굶주린 듯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며 적들을 붙들고 묶어 놓았다. 적을 하나하나 해치울 때마다 바루스의 활시위는 더 빠르게 당겨졌고, 종국에는 각각의 화살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됐다. 바루스의 목표로 잡히면 속절없이 달아나다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며, 사냥과 피의 향연이 계속 이어졌다. 자비를 약속하기도 했지만, 이를 지킨 적은 없었다.
이제 어둠이 휘몰아치며 축축하게 젖은 낙엽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몰살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뭉그러진 남녀의 시신들과 합쳐져 묘하게 들척지근한 냄새였다. 바루스는 부서진 마차 위로 몸을 굽히고서, 그가 발사했던 촉수에 관통된 성명서를 움켜쥐었다. 성명서에는 전쟁을 지시했던 망할 녹서스 놈들의 이름이 더 적혀 있었다…
빌어먹을 전범들. 네놈들이 앗아간 건 천 배로 갚아주리라.
소환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어떤 결정을 내린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소환사의 움직임과 함께 마지막 환영의 자락이 걷혀 나갔다.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은 분명하군. 우리 챔피언 중에 녹서스 요원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그녀가 손을 앞으로 저었다. “이 모든 게 복수를 위한 거지.”
“물론, 리그에서 그대의 개인적인 복수 같은 걸 원하진 않는다는 것쯤 알고 있겠지?” 소환사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이젠 그대도 깨달았을 텐데.” 바루스, 아니 어쩌면 바루스의 형상을 한 미지의 존재가 퉁퉁 부은 시꺼먼 혀를 내보이며 대답했다.
“나한테 남은 목표는 그거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