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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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13년 7월 25일 ~ 1714년 9월 11일까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둘러싼 공방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다.
2. 배경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후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카탈루냐인들의 봉기로 1705년 8월 22일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에게 넘어갔다. 이후 카를 대공을 지지하는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카탈루냐 연합군은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을 상대로 수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격돌했다. 그러던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서 뒤를 잇자,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동기를 상실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2년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713년 4월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한다. 카를 6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었고 스페인 내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 놓인 지역은 오직 카탈루냐 뿐이었다.
1713년 7월 7일, 펠리페 5세의 군사 대표들은 바르셀로나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영토에 대해 동일한 법규를 실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싶어했다. 이는 카탈루냐인들이 원하는 자치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 저항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에게 대항한 그들을 철저히 보복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카탈루냐 임시 정부 '훈타 데 브라코스'는 7월 9일 항복을 거부하고 카를 6세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바르셀로나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카탈루냐 연합군
- 총사령관: 안토니오 데 빌라로엘
- 병력: 정규군 1,500명, 민병대 3,500명, 대포 수문.
3.2. 스페인-프랑스 동맹군
- 스페인군 총사령관: 펠리페 5세
- 프랑스군 총사령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 병력: 스페인군 25,000명, 프랑스군 20,000명, 대포 80문, 곡사포 20문.
4. 전투 경과
1713년 7월 25일, 표퓰리 공작 레스티노 칸텔모-스튜어트가 이끄는 스페인군 25,000명이 바르셀로나로 진군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외곽의 마을들을 점령한 후 도시에 곡사포와 대포를 퍼부어 항복을 강요하려 했다. 그러나 주앙 바티스타 바셋이 이끄는 소규모 카탈루냐 민병대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해 의외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카탈루냐 주민들은 스페인군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고 스페인군의 식량 강제 공출에 맞서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게다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해양 봉쇄는 자주 깨져 말료르카 섬에서 화약과 탄약 및 식량이 비교적 쉽게 수비대에게 전달되었다.
1713년 8월과 10월, 안토니 드 베렝구어와 라파엘 네봇이 이끄는 브라스 밀리타 원정대는 바르셀로나 북쪽 해안에 있는 아레니스 데 마르에서 기병 300명과 보병 300명을 징발했다. 그들은 카탈루냐 전역에서 저항 운동을 일으켜 5천 명의 신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이후 이들은 카탈루냐의 여러 지역에서 스페인군을 공격하고 도시를 불태워 적이 식량을 확보할 여력을 상실하게 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 지원군이 오거나 영국이 마음을 돌려 카탈루냐 분쟁에 개입하기를 희망했다. 스페인군은 이러한 카탈루냐인들의 저항에 대해 포로를 모두 처형하고 사보타주를 벌인 민간인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지만, 이는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군에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고, 스페인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몇 달 동안 정체되었다.
그러던 1714년 초,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카탈루냐에 도착했다. 이제 4만여 명으로 불어난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카탈루냐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하고 바르셀로나 포위망을 좁혔다. 또한 바르셀로나에 대한 해상 봉쇄가 강화되면서 수비대는 식량 확보가 점점 어려워졌다. 포퓰리 공작은 이제 적이 항복할 거라 판단하고 바르셀로나에 포격을 퍼부었지만, 카탈루냐의 수도는 좀처럼 항복하지 않았다. 1714년 5월 17일, 포퓰리 공작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있는 카푸틴 수녀원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군은 격렬한 전투 끝에 수녀원을 간신히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녀원을 사수하고 있던 카탈루냐인 17명을 상대하는 동안 5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포퓰리 공작은 적이 이토록 격렬하게 저항하자 매우 격분하여 해군 사령관 장 바티스트 뒤 카세 제독에게 주민들이 피신해 있는 라 리베라 항구를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뒤 카세 제독은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대답하고 거절했고, 포퓰리 공작은 2주도 지나지 않아 경질되었다. 1714년 7월 6일, 포퓰리 공작을 대신해 바르셀로나 공방전을 이끌 지휘관으로 선임된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무의미한 희생을 치르는 것보다 적이 명예로운 항복을 하도록 허용하는 게 낫다고 여기고 펠리페 5세에게 카탈루냐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펠리페 5세는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자신에게 대항하는 적에 대한 강렬한 적의를 품고 있었기에 베릭 공작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바르셀로나를 파괴하고 반란군을 모조리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베릭 공작은 할 수 없이 바르셀로나 요새 근처에 참호를 건설하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2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적 저격수에게 저격당해 목숨을 잃었다.
1714년 8월 12일, 베릭 공작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은 두 개의 보루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적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한편 카탈루냐 정부는 영국 의회에 대표단을 보내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구원을 호소했지만, 이미 오랜 전쟁으로 지친 영국은 끝내 카탈루냐 저항군을 돕지 않았다. 이후 베릭 공작은 공세를 계속 펼쳤지만 적의 저항으로 아군의 손실이 막심해지자, 공세를 중단하고 바르셀로나를 포위한 뒤 대포로 포격해 도시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714년 9월 3일, 베릭 공작은 바르셀로나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며 12일간 휴전을 맺을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정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바르셀로나는 적의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동안 바르셀로나 수비대를 지휘했던 안토니오 데 빌라로엘은 적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휘관에서 물러났고 라파엘 카사노바가 그 뒤를 이었다. 9월 11일 오전 4시 30분,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의 최종 공세가 개시되었다. 연합군은 포격으로 허물어진 성벽 곳곳을 넘어 도시로 침투했고, 수비대는 8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연합군은 도시 중앙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 아우구스타 수녀원을 점령하려 했지만, 수비대는 이곳에 바리게이트를 세우고 필사적으로 싸워 적의 침입을 저지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바르셀로나의 도심 구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역을 점령하고 안토니오 데 빌라로엘과 라파엘 카사노바를 비롯한 수비대 지휘관들이 모조리 부상당하자, 카탈루냐 정부는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베릭 공작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1년 2개월 동안 진행된 바르셀로나 공방전은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은 1년 2개월 동안 바르셀로나 공방전을 치르면서 14,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 막심한 피해에 격분한 스페인은 수백 명에 달하는 카탈루냐 지도자들을 처형했고 모든 카탈루냐 기관을 폐쇄했으며 카탈루냐 어를 금지했다. 이후 카탈루냐인들은 9월 11일을 '카탈루냐 국경일'로 지정하고 이 날이 될 때마다 의식을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