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레흐트 조약

 

'''Treaty of Utrecht''' (영어)
'''Traités d'Utrecht''' (프랑스어)
'''Fried von Utrecht''' (독일어)
'''Tratado de Utrecht''' (스페인어)
1. 개요
2. 내용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수습을 위해 1713년 프랑스가 영국, 네덜란드와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에도 부르봉 왕실이 세워졌으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합병은 금지되었고 따라서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이 사라졌다.

2. 내용



2.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랜 세월 근친혼을 반복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압스부르고 가문)의 내력으로 인하여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온갖 유전병을 다 달고 태어났고, 결국 후손을 낳는 데 실패한다. 이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후계자로 지명됐으나 그 역시 요절해버리자, 스페인 왕실과 친척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뒷공작을 통해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을 후계자로 밀어준다. 이 뒷공작을 깨닫고 분노한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 펠리페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루이 14세의 부인이 스페인 왕실 출신이었기 때문에 펠리페 5세에게도 어느 정도는 스페인의 피가 흘렀고[1], 따라서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서유럽 내 전통적인 두 강국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추후에 하나의 국왕을 모시는 단일 국가로 통합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고,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충격과 공포에 빠진다.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유럽 국가들이 동맹을 맺게 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다.
13년의 걸친 전쟁은 지리했다. 프랑스의 국력은 유럽 모든 국가들의 다굴을 견딜 수 있었지만, 반대로 영국의 명장 말보로 공 처칠이 이끄는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국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 유럽에서의 전쟁은 야전보다는 대포들로 도배된 요새들을 깨부수는 공성전의 비율이 높았고, 때문에 전쟁은 툭하면 교착 상태에 빠졌다.[2]
프랑스의 경우 스페인 왕위를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가 (남아메리카의 황금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페인 제국의 부도 부거니와) '스페인 왕위에 부르봉 가문 출신의 인물을 앉혀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가들로 둘러쌓이는 양면 전쟁의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다. 프랑수아 1세 시절 스페인-오스트리아 연합을 다스리는 카를 5세에 연패를 당한 기억으로 뼈저리게 느낀 바 있어서 이것에 대해선 프랑스는 필사적이었다. 반면 반 프랑스 연합국의 경우 목표가 '프랑스와 스페인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숙적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을 지지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초를 치는 일이 발생했으니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주장해왔던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의 형 요제프 1세가 후사 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카를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카를 6세로 즉위한 것이다. 계속 카를 6세를 밀어주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카를 6세라는 한 군주를 모시는 꼴이 되고 말 터이니 결국 200여 년 전 서유럽의 최강자 카를 5세의 시대가 재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 프랑스 연합국의 주요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카를 6세의 스페인 국왕 즉위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부르봉 가문의 인물을 스페인 왕위에 앉혀 양면전쟁을 피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인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위를 동시에 차지하는 카를 5세의 재림은 막아야 한다.' '따라서 프랑스-스페인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몇가지 조건을 붙인 뒤 부르봉 가문의 인물을 스페인 왕위에 올린다.' 이렇게 프랑스와 영국-네덜란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협상 테이블을 차리게 된다 .

2.2. 협상 및 결과


협상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하나의 가문으로 묶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통합 문제였다. 루이 14세의 고집으로 인해서 협상은 길어졌지만, 결국 1712년 앙주공 펠리페가 스페인의 왕으로 승인받은 댓가로 자신과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면서 해결된다. 또한 역으로 프랑스가 스페인의 왕위를 요구하는 사항도 방지하기 위해서 베리 공작[3]과 오를레앙 공작[4] 역시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또한 압스부르고 왕조 당시 유럽 곳곳에 확보한 영토 역시 할양됐다. 사보이아 공국시칠리아밀라노 공국의 일부를 가져갔으며, 오스트리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사르데냐, 나폴리 왕국, 그리고 밀라노 공국의 대부분을 얻었다. 영국은 지브롤터미노르카를 얻어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활동할 거점을 확보하였다. 프랑스는 네덜란드가 동군연합으로 다스리던 오랑주 공국과 사보이아령이던 알프스 산맥의 위바이 강 계곡 일대를 얻었다.
유럽 외부에서도 영토 할양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영국이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다. 허드슨 만 해안 일대와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섬이 프랑스의 손에서 영국에게로 넘어갔으며, 또한 스페인으로부터는 대서양 노예 무역의 독점권(Asiento)을 받아낸다.[5] 네덜란드의 경우 영토는 할양받지 않았지만 프랑스 · 에스파냐로부터 상업적 특권을 인정받았다.
상술하였듯, 루이 14세의 목표는 당연히 스페인의 왕좌였지만 가능하면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막대한 유럽 내외의 영토도 노리고 있어 손자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으며,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의 병합을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한 세기 전 합스부르크 가문의 좌절이 보여주었듯이, 다양한 세력이 엇비슷한 힘을 구축한 유럽에서 독보적인 강대국이 나타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루이 14세의 지나친 야심은 영국을 선두로 한 기타 유럽 국가들의 견제 앞에 제지되었고,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로 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힘의 균형이 자리잡는다.'''[6] 또한 별볼일 없는 섬나라로 여겨졌던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내내 당대 유럽의 최강국 프랑스와 대등한 국력을 보여주면서 자국에게 유리한 조약 내용을 이끌어냈고, 이 조약은 19세기 영국이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된다.[7]

[1] 물론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라서 펠리페 본인은 스페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전혀 없었다. 스페인어도 카를로스 2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고 나서야 배우기 시작했을 정도.[2] 거의 모든 징집 가능 남성과 동원 가능한 자원을 쥐어짜서 총력전으로 진행된 1차 대전에서도 상대방의 우주 방어를 뚫지 못해서 4년 동안이나 참호전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시기 각국의 군대들은 사실상 용병에 가까운 소수의 직업 군인들이었고, 각국의 정부들은 왕실 명목으로 돈을 꾸어서 전쟁 자금을 조달해야만 했으니 전쟁 진행이 얼마나 지지부진했을지는 자명하다.[3] 루이 14세의 막내 손자.[4] 루이 14세의 조카로 부르봉 왕실의 방계 가문. 후일 루이 필리프 1세를 배출하는 가문.[5] 이 때, 영국 정부로부터 이 독점권을 따낸 회사가 남해 회사 (South Sea Company)인데, 영국 정부의 채권을 인수하는 대가로 노예 무역권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규모 자체가 워낙 작아 (남미의 주요 항구 10여 곳에 1년에 노예선 1척을 보내는 것만 허가받았으며, 그나마도 수익의 4분의 1을 스페인 왕에게 내야 했다) 수익성은 시망이었고, 결정적으로 1718년 사국 동맹 전쟁이 벌어지면서 스페인이 남미의 남해 회사 자산을 압류하여 큰 손해를 본다. 이는 남해거품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계기가 된다. 다만, 노예 무역권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 이후 1750년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6] 위트레히트 조약 이후 유럽 역사를 보면 잘 나타난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한동안 세력 균형이 이어지다가 다시 프랑스가 설쳐대자 유럽 각국들의 공조로 진압하고 빈 체제를 수립한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수립하고 세력 균형을 위협하자 1차 대전2차 대전을 통하여 독일의 야망을 분쇄한다.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는 유럽 연합 공조 체제.[7] 바로 앞 문장에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글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영국의 국력은 인도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와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한 대서양 일대의 제해권에서 나왔다. 영국은 20세기 초 독일의 위협으로 영불협상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영예로운 고립을 부르짖으며 유럽 내의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