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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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카를 프란츠 요제프 벤첼 발타사르 요한 안톤 이그나즈
(Karl Franz Joseph Wenzel Balthasar Johann Anton Ignaz)
'''출생'''
1685년 10월 1일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740년 10월 20일 (55세)
팔레 아우가르텐
'''재위'''
신성 로마 황제
1711년 10월 12일 ~ 1740년 10월 20일
'''배우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1708년 결혼)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아버지'''
레오폴트 1세
'''어머니'''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형제'''
요제프 1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아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마크달레나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4. 국사조칙


1. 개요


오리지날 합스부르크 황가의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합스부르크 황가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황가로 이어진다. [1]

2. 즉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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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을 입은 카를 6세.
고드프리 넬러 경(Godfrey Kneller) 작, 1704년경
레오폴트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레오폴트 1세는 3번의 결혼에서 '''4남 16녀'''를 얻었으나 앞의 두 아들은 요절하고 마지막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만 생존했는데, 이것이 카를 6세와 그의 후계자와 그의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 레오폴트 1세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단절이 예상되자 주변국들과 영토 나눠먹기 모의를 하다 같은 가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카를로스 2세의 분노를 샀다.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펠리페 5세)를 상속인으로 지명한 데 이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앙주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경우를 대비해 루이 14세의 셋째 손자 베리 공작을 2순위, '''둘의 승계가 여의치 않을 경우''' 같은 가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3순위로 지명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집고 갈 꼬투리를 발견(?), 영국 네덜란드 등의 지지를 받아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게 된다.
전쟁 초기에는 유럽의 깡패 프랑스 루이 14세를 전 유럽이 다구리 놓는 바람에 전황이 유리했고,[2] 카탈루냐 지방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상륙해 한때 마드리드에도 입성하는 등 순조로워보였으나…

3. 즉위


1711년 '''형인 요제프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 하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요절해버렸다!'''[3] 졸지에 카를은 오스트리아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제1왕위 계승권자가 된 것이다. 애초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가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해 동군연합이 되어 유럽의 초강대국 탄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를 대공이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자 동맹국들은 지금까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4]가 물려받는 걸 저지하자고 제2의 카를 5세를 만들어주는 격이 되자 전쟁 명분이 소멸해 종결한다.[5]
카를 6세는 스페인에 미련을 버렸고, 그 결과 루이 14세의 뜻대로 그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카를 6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을 맺고 나폴리-사르데냐-시칠리아에 이르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양도받으며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카를 6세 재위 초기의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큰 팽창을 이룬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카를 6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지 못 했다.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열심히 상공업 진흥책들을 추구했으나 스페인 국왕을 자처하던 시절 데리고 있다 함께 오스트리아로 온 측근 세력들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귀족 세력의 갈등이 심했고, 카를 6세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 했다.
무엇보다 그의 치세는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 즉위초인 1718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현재의 세르비아 지방 보이보디나 지역과 루마니아 서부 영역을 확보하긴 했으나 이것이 카를 6세 시기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군사적 성공이었다.
먼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섣불리 개입했다가 손해를 봤다. 해당 전쟁의 결과가 좀 묘한 게, 폴란드의 왕위 자체[6]는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가 밀었던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폴란드 왕으로는 아우구스트 2세)가 잇게 되었다. 그러니까 폴란드 지역에선 이겼다는 말. 그러나 오스트리아 자신이 로렌 지방과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스페인에게 패배한 게 문제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얻어내 자신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 스페인카를로스 3세[7][8]에게 빼앗겨 남부 이탈리아 및 중부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모조리 상실했다. 사위인 로렌 공작 프란츠 1세는 처가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는데, 고향 로렌은 잃는 대신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대공국를 얻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파르마 피아첸체를 얻었다.[9]
그뿐만 아니라 1738~9년 치러진 7차 투르크 전쟁에서 참패, 1718년의 전쟁에서 얻어낸 영토를 대부분 토해내게 되어[10]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 업적마저도 빛이 바랬다.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세자 시절, 부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친구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하고 붙잡혔다. 친구는 그대로 사형을 당하고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쓰러졌는데, 빌헬름 1세는 저런 나약한 놈은 내 아들도 아니라며 죽이려 했다. 당연히 신하들과 왕족들은 뜯어말렸고, 이웃 국가의 군주인 카를 6세도 이 꼴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왕족에 대한 재판은 신성 로마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라고 근거를 제시하며 만류했다. 이에 빌헬름 1세는 처형을 취소했고 프리드리히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후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거의 평생을 싸운 숙적이 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아이러니.

4. 국사조칙


국사조칙(國事詔勅). 국본조칙이라고도 한다. 영어: Pragmatic Sanction, 독일어: Pragmatische Sanktion, 라틴어: Pragmatica sanctio
카를 6세의 즉위 기간 중 가장 큰 업적은 바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존속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없는 경우의 정치적 혼란과 국가 분열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했고, 후사 없이 요절한 형 요제프 1세를 보며 오스트리아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카를 6세는 즉위 직후인 1713년,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한 살리카법을 부정하는 국사조칙을 발표하고 재임 기간 내내 주변국들로부터 이를 인정, 승인받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다만 해당 국사조칙이 완전히 그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국사조칙(국본조칙)의 근거는 이러하다. 프랑크 왕국 계열의 대륙국가에서 살리카법으로 여계 승계를 금지하는 관습법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에는 이 규정을 비껴나갈 특권이 있었다.
때는 11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오스트 변경백을 오스트리아 공작령으로 격상시키면서 남계 후손이 끊길 경우 영지를 몰수하지 않고 당시 통치가문이던 바벤베르크 가문에서 계승권을 독자적으로 정해 이어나갈 수 있는 특권(Privilegium_Minus(''프리빌리기움 미누스''))을 부여했다.[11]
1703년[12] 레오폴트 1세 대에 카를을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 주장하며 그를 스페인으로 보내기 전, 두 아들의 동의를 받아 오스트리아 대공령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에 대한 <상호 계승 약관>을 마련했는데,[13] 내용인즉 요제프 및 그의 후손들은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을, 카를과 그 자손들은 스페인을 계승하며 만약 한쪽의 남자 후손이 단절되면 상대방 집안을 계승할 수 있고, '''만약 두 집안 모두의 남자 후손이 단절되면 여자 후손이 이를 계승할 수 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여자 후손이 없으면 고모가 계승하는 것까지 인정했다. 이 덕분에 합스부르크의 계승법은 살리카법에서 준살리카법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위 후 1713년 국사조칙은 이전의 상호 계승 약관에 내용을 첨가한 것으로, 합스부르크 영지의 불가분성을 천명하며(분할상속 불가) 여계 상속의 법률적 근거를 마련했다.
다만 과거의 협약에서는 여자 후손들 중 형인 요제프의 후손이 카를의 후손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카를은 이를 국사조칙으로 대외에 공표할 때 살짝 수정해 '''통치자의 딸'''이 계승하도록 명시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에서는 직계에 ''어떠한'' 남자 후손도 남아있지 않을 경우 가문의 수장의 딸이, 딸도 없다면 누이가, 누이도 없다면 고모가 가문을 이어받도록 하는 예외조항이 생기게 된 것이다.[14] 이런 교묘한 내용 덕분에 요제프의 두 딸은 카를의 딸들보다 계승권에서 밀리게 되었고 그 덕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할 수 있었다. 다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출생이므로 카를 6세가 그녀를 즉위시키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종의 '보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성 후계자의 앞뒤가 뒤바뀐 껄쩍지근함은 카를 6세를 내내 괴롭힌 듯하다. 그는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거의 죽을 때까지 아들을 보려고 용을 썼다. 이 때문에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을 감안하더라도 후계자로서의 제왕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어릴 적에는 신부수업이나 받았었다.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초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해 고생했다.
국사조칙 발표에는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 아래에 있던 구성국들 간의 알력이 크게 작용했는데, 헝가리가 딴지를 걸 것을 염려한 다른 구성국, 특히 크로아티아가 국사조칙을 열렬히 지지했다. 1720년 오스트리아의 모든 영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1723년에는 헝가리에서도 통과되어 합스부르크 모든 상속지에서 헌법적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이후 여러 나라에 국사조칙 승인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은 비록 그의 말년에 있었던 전쟁의 패배로 빛이 바랬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아들을 두지 못 하고 죽으면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하는 기반을 닦았고, 그녀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를 존속, 유지시키는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사조칙은 현실적인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는데, 카를 6세 생전에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국사조칙을 승인했지만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는 200여년 전 다른 문서를 근거로 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자신이 정당한 부계 상속자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계를 요구한 데다 황제 선거까지 출마했으며,[15] 기존의 상호 계승 약관에 따라 국사조칙이 부정당할 경우 최우선 상속자인 요제프 1세의 첫째 딸은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폴란드 국왕으론 3세)에 시집갔는데, 카를 6세가 죽자마자 둘이 짝짜꿍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를 반땡해먹기로 멋대로 합의한다. 결국 국사조칙은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실력행사(?)를 거쳐 승인받게 된다.

[1] 여성 계승이 불가능했던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한 사위 프란츠 1세 이후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황가다. 다만 사위 프란츠 1세는 허수아비나 다름 없었던지라…[2] 프랑스의 전황이 어느 정도로 암울했냐면 1710년 천하의 루이 14세가 "펠리페 5세가 카를 대공에게 '훔친 왕위(?)' 신속히 양위한다"는 조건을 제외하고 연합국의 조건을 다 수용하고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루이 14세의 제안은 그러나 영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3] 요제프 1세에게 딸은 있었으나 당시의 계승법은 살리카법이었다.[4] 루이 14세에게는 적장자 왕세자(그랑 도팽 루이)와 적장손 왕세손(프티 도팽 루이), 다른 손자(베리 공작 샤를-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2위), 증손자(프티 도팽의 아들-브르타뉴 공작, 앙주 공작 루이)가 있어서 전쟁 초기에는 앙주 공작 필리프(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까지 물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전쟁 후반기 프랑스 부르봉 가문 왕손들이 줄초상(?)이 나면서 루이 14세의 혈육은 펠리페 5세를 제외하곤 증손자 루이 15세밖에 남지 않게 되지만.[5] 전쟁 자체는 영국, 프랑스 등이 따로 치고박다 1714년에야 종결된다.[6] 이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거의 위성국 취급이었고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국력을 믿고 어거지로 삥뜯으러 간 것이지 진지하게 장인의 복위를 바란 건 아니었다. 이후의 결과를 볼 때 루이 15세는 목표를 달성한 셈.[7] 원래는 카를로스 2세 당시 스페인 영토였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잃게 된다. 카를로스 3세는 이 영토를 다시 스페인의 세력권 안에 넣고 이 이후에 어머니 이사벨 파르네제 덕에 나폴리의 왕이 되고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잃은 영토를 수복한다. 이후 1860년 레소르지멘토 과정에서 사르데냐에 의해 이 지역의(파르마와 양사칠리아 부르봉 왕가)왕가가 소멸한다. 참고로 카를로스 3세의 어머니 이사벨 파르네제가 카를 6세와 4촌이니 서로 5촌간이다.[8] 애초에 위트레흐트 강화 조약으로 스페인이 이 땅의 소유권을 포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안습이다. 이 전쟁에의 개입으로 스페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이후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전에 예상한 펠리페가 스페인의 왕으로 지명되었을 경우의 최악의 시나리오인 '''프랑스 2중대'''가 된다.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반 오스트리아군이 '''신흥 강국 프로이센, 전통 강국 프랑스, 영토 더 얻어 발전한 스페인'''인 것을 생각하면......[9] 안습하게도 파르마와 피에첸차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이 다시 가져간다(...)''' 그리고 이 땅은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펠리페 드 부르봉에게 가서 부르봉-파르마계가 만들어진다. 현 스페인 좌파연합 '카를리스타 당'의 당수인 카를로스 우고, 카를 1세의 부인이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어머니인 지타 황후, 미하이 1세의 부인 안 드 부르봉파르마가 이 가문 출신이다. 여담이지만 샤를 10세의 유일한 손녀가 이 가문으로 시집갔다고 한다.(적손 보르도 공작 앙리는 후사 없이 요절)[10] 모두 잃은 건 아니고 베오그라드 지방과 서부 루마니아 지방 대부분은 반환했지만 왈라키아 지방 바나트(현재 루마니아 서부)는 계속 지켜냈다.[11]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황제 가문이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벨프 가문(훗날 하노버 왕조로 이어짐)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바벤베르크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편을 들었다. 그러다가 여러 대에 걸쳐 애증의 관계였던 벨프 가문이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후대에 혼인관계가 있었고 벨프 가문 영지를 몰수했다가 바벤베르크에 분봉한 바이에른 공작령을 다시 돌려주면서 이에 대한 보상으로 바이에른 공작령에서 오스트리아를 분리해 수여하고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이러한 특권을 부여한 것. 참고로 바벤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공작 호전공(好戰公) 프리드리히는 후사 없이 전투 중 허무하게 죽어서 이 특권을 사용해보지도 못 했다.[1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1년부터 벌어졌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카를 대공을 카를로스 3세로 주장한 것은 1703년이다.[1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라 동맹국 사이에서도 퐈이어될 만한 민감한 내용이라 공표하진 않았다.[14]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계승권자가 여섯 명 있었는데 그 여섯 명이 전부 공주들'''이었다!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여동생 둘(1. 네덜란드 여총독 마리아 엘리자베트)(2. 포르투갈 왕비 마리아 안나 - 페르난도 6세의 장모), 요제프 1세의 딸 둘(1. 작센 선제후비 겸 폴란드 왕비 마리아 요제파 - 루이 16세의 외할머니, 카를로스 3세의 장모) (2. 바이에른 선제후비 겸 신성로마제국 황후 마리아 아말리아-카를 7세의 부인), 그리고 카를 6세의 딸 둘(1녀: 마리아 테레지아),(2녀: 프란츠 1세의 제수, 동생인 샤를도 카를 6세의 작은딸에게 시집감).[15] 게다가 부인이 카를 6세의 형인 요제프 1세의 둘째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