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1세
사산 왕조의 4대 황제. 재위기간 273-276년.
1.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샤푸르 1세의 차남이다.[1] 더욱이 첩실소생이였기 때문에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의 취급은 나쁜 편이였으며, 샤푸르 1세의 비문중 그의 이름만은 성화(聖火)에 의해 공표되지 않았다. 또한 바흐람이 왕으로서 통치하던 기란 지역은, 제국의 필두로 위치해 있는 아르메니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의 남방에 펼쳐진 비옥한 카라케네, 제국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은 지역이여서 계승에 유리한 조건은 아니였다.[2]
처음으로 바흐람 1세의 모습이 언급된 것은 나그쉐 라쟈브에 있는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다. 여기에서는 아르다시르나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베레스라그나 신의 앞에서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이고 있다. 이것은 승리의 야자타[3] 와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이였기에 4명의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은 가장 신앙심이 깊었으며, 조로아스터의 교도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형인 호르미즈드 1세가 급사했을 때, 다음의 황제는 카라케네의 왕인 3남 샤푸르나 사카의 왕인 4남 나르세스 1세가 유력했다. 그러나 바흐람은 혈통의 약점을 마니교의 전파를 우려하는 조로아스터교단과 협력하는 것으로 극복하여 결국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2. 조로아스터교의 신봉자
바흐람과 협력한 조로아스터단은 마니교의 창시자이며 예언자인 마니를 처형하였다. 투루판 시에서 출토된 마니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마니는 형이 집행되기 전 감옥에서 그대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후세의 마니교도들이 남긴 종교 문서류나 전설 등에서는 마니의 죽음을 순교자로 과대하게 왜곡하거나 윤색한 것도 많아, 가죽이 벗겨진 마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또한 아라비아어의 일화집 중에는 짚이 가득 채워진 마니의 가죽이 가끔 샤푸르 도시의 성문에 매달아지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로아스터교단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오른 바흐람 1세의 입장에 의하면 마니교의 박해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동안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던 마니교는 당시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지만,[4] 대다수가 박해받아 처형되었다.
3. 로마와의 전쟁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의 남부 경계 지대의 주요 도시 팔미라에서는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의 아내 제노비아가 어린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옹립했으며, 그와 동시에 스스로는 황태후를 자칭하면서 팔미라 제국의 섭정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지배 영역을 로마 제국의 근처까지 확대시켰다. 결국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272년에 팔미라 토벌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제노비아는 사산 왕조에 지원을 요구하였고, 바흐람은 병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싸움에 진 제노비아는 퇴각하여 사산 왕조에 망명을 하려 하였지만, 유프라테스강 근처에서 로마군에게 포로로 잡힌다.
바흐람 1세는 이후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제의하기 위해 공사를 로마에 파견했으며, 아우렐리아누스는 바흐람의 제의를 받고 휴전 협정을 수락하였다. 또한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실시한 274년에 페르시아는 로마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개선식에 축하사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렇게 로마와의 평화를 구걸하면서 서서히 위신이 떨어지던 찰나에...
275년, 결국 로마는 사산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다달했을때 부하들 중엔 원정을 저지하려는 음모가 조장되었다. 결국 아우렐리아누스는 비잔티움과 페린투스 사이의 진지에 도달했을때 근위병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고 바흐람 1세는 276년에 사망한다. 그 뒤를 아들인 바흐람 2세가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