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테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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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찍은 호스로 2세의 황궁 아치 유적의 사진.
크테시폰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이다. 아르사케스 왕조(기원전 247 ~ 기원후 224)와 사산 왕조(224 ~ 651)의 수도 역할을 했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지로서 바빌론과 셀레우키아의 역할을 이어받았으며, 쇠퇴한 뒤에는 바그다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크테시폰(Ctesiphon)이라는 표기는 고대 그리스어식 표기(Κτησιφῶν)에 따른 것이다. 사산 왕조 시대의 중세 페르시아어를 아람 문자로 기록한 팔라비(pahlavi) 문헌들에는 tyspwn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티스푼 혹은 티스폰 정도로 발음된다. 이 이름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크테시폰은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위치했으며,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32km 떨어진 지점으로 추정된다.
크테시폰이 처음 도시로 형성된 것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파르티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빼앗은 기원전 2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본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이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옛 수도였던 셀레우키아를 정복했지만,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인 그곳에 자신들이 들어가 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캠프를 치고 주둔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국의 새로운 지배층인 파르티아인들이 머무는 이 캠프 지역에 인구가 몰리기 시작하여 점차 신도시로 발전한 것이 크테시폰이다. 그리하여 기원후 1세기경이 되면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행정 중심지이자 겨울 수도가 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는 이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고지대인 메디아나 히르카니아 등으로 왕실 거처를 옮겼다가 추운 겨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로 내려오는 관습을 유지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도시를 감싸는 성벽이 건설되었고, 이후 인구 밀집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점점 규모가 확장되면서 주변 도시들과 합쳐져 거대한 도시권을 이루게 되었다. 개중 유명한 것들로는 상술한 셀레우키아, 그리고 발라시 1세(볼로가세스 1세, 재위 51 ~ 78)가 조성한 교역 중심지 볼로게소케르타(Vologesocerta. Vologesias 혹은 Valakhshabad, Valakhshgerd) 등이 있다.
부유하고 규모가 커진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와 대립했던 로마 제국의 주된 공격 목표가 되었다. 로마는 인구와 국력에서 파르티아를 크게 앞섰으며, 파르티아는 중앙집권이 되지 못한 봉건제 사회였기 때문에 로마의 강력한 공세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크테시폰은 116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165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휘하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연이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 역시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길게 유지하지는 못했으며, 점령할 때마다 파르티아인들에게 도로 내주기를 반복했다.
동영상은 토탈 워: 아틸라에서 재현된 당대 크테시폰의 모습.
아르사케스 왕조는 224년 아르더번 4세(아르타바누스 4세, 재위 216 ~ 224)가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 ~ 240)에게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멸망했다. 크테시폰을 점령한 아르다시르 1세는 226년 수도를 크테시폰으로 옮기고, 자신이 이란의 황제(Shahanshah-i Eran)임을 선포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모든 황제들은 크테시폰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사산 왕조 시대의 크테시폰은 이전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인구 밀집 지대의 핵심이자 제국의 행정 중심지, 황제의 겨울 거처로서의 역할을 했다.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제국 각지를 향하는 도로망이 뻗어 있었는데, 개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황제의 여름 거처인 하메단(엑바타나)과 조로아스터교의 성화(聖火)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있는 메디아로 가는 도로였다. 아랍인들이 '하얀 궁전'이라고 불렀던 황궁(항목 최상단의 사진이 그 일부로 추정된다)도 크테시폰에 있었는데, 호스로 2세 시대에는 크테시폰 대신 근처의 다스타게르드(Dastagird)에 새 황궁을 지어 머무르기도 했다.
사산 왕조는 크테시폰과 그 주변 지역을 이란의 심장(del-i eranshahr)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했지만, 정작 인구의 대다수는 비 이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시리아인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선주민들이 다수였으며, 이란인들은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시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의 아소리스탄(Asoristan), 혹은 아수리스탄이라고 불렀다. 이 '아시리아인'들은 대개 아람어를 쓰고, 자신들의 토착 종교나 기독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계 인구(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는 비교적 소수였으며 대부분 군인, 관료 등 지배계급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Adur Gushnasp, Adur Burzen-Mihr, Adur Farnbag)가 각각 메디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지역에 있고 정작 인구 밀집 지역이자 수도권인 메소포타미아에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 역시 이 같은 인구 구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소수집단으로 유대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살았다.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에는 헬레니즘 도시인 셀레우키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인 인구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산 왕조 초기 이후로는 토착 인구에 동화되어 거의 사라졌다. 반대로 로마와 이란의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로마 제국의 시리아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이 정착하기도 했다.
상술한 대로 크테시폰 주위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크테시폰 주위에는 여러 위성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사산 왕조 말기 크테시폰의 주요 위성도시들로는 웨-아르다시르(Weh-Ardashir), 아스펀바르(Aspanbar), 서버트(Sabat), 웨-안티오키-호스로(Weh-Antiok-i Khosraw)가 있었고, 문헌에 따라 다섯 개에서 일곱 개까지 늘어난다.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거대한 원형 성벽이 둘러쳐진 크테시폰이 있었고, 그 반대편 서쪽 강변에 마찬가지로 원형 성벽이 둘러쳐진 웨-아르다시르가 있었다. 웨-아르다시르는 아르다시르 1세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5~6세기 경 티그리스 강의 흐름이 바뀌어 도시를 관통하게 되면서 쇠퇴했다. 웨-아르다시르에서 5 km 정도 남쪽에 서버트가 있었고, 크테시폰에서 남쪽으로 5 km 떨어진 곳에 성벽 없는 교외지역인 아스펀바르가 있었다. 아스펀바르에서 다시 남쪽에 사각형 성벽을 가진 웨-안티옥-호스로가 있었는데, 이는 6세기 초 황제 호스로 1세가 로마 제국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곳에서 강제 이주시킨 인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건설한 도시라는 설이 있다. 안티오키아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사각형의 성벽과 로마식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아랍인들은 이곳을 로마인들의 도시라는 뜻에서 '알 루미야'라고 불렀다. 이처럼 최소 4개 이상의 도시들이 크테시폰과 함께 거대한 도시권을 이뤘으므로 이후 아랍 문헌들에서는 크테시폰을 가리켜 '여러 도시들'이라는 뜻의 알 마다인이라고 기록하게 된다.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의해 여러 차례 공격 목표가 되었다. 카루스(재위 282 ~ 283) 황제는 바흐람 2세가 동부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크테시폰을 함락, 약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로마에 의한 크테시폰 점령은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율리아누스(재위 361 ~ 363) 황제는 크테시폰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후퇴하던 중 사망했으며, 헤라클리우스(재위 610 ~ 641) 황제는 이란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628년에 크테시폰 바로 앞까지 진군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로마군이 물러간 지 몇년 되지 않아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 이란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국 까디시야 전투에서 이란 중앙정부의 군대가 무너지자 크테시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고 말았다.
이란의 황제와 귀족, 관료, 군대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키기 전에 도주했고, 아랍인들은 도시에서 막대한 재물을 노획했다. 아랍 군대는 피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아랍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완전히 장악한 뒤 쿠파, 바스라 등 신도시를 건설하자 그곳으로 인구가 빠져나가기도 하여 크테시폰(상술했듯 아랍인들은 '도시들'이라는 뜻의 알 마다인이라고 불렀다) 일대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크테시폰 주위에는 여전히 방대한 농경지와 수리 시설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잔존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시대까지 크테시폰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총독들이 임명되었으며, 사산 왕조의 구 황궁은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
크테시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압바스 왕조로 교체된 뒤, 압바스 왕조가 이라크를 중심지로 삼기 위해 크테시폰 바로 근처에 바그다드를 건설한 이후의 일이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바그다드의 새 궁전에 쓸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크테시폰의 황궁을 철거했고, 바그다드가 완성되고 번영을 누리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인구도 대부분 바그다드 지역으로 옮겨 갔다. 이후 12~13세기까지는 작은 마을 몇 개 정도 수준으로 사람이 살기도 했지만, 14세기 이후 몽골 제국과 티무르의 침입으로 이라크 지역이 완전히 쇠퇴하면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전락하였다.
크테시폰 일대에 대한 근대적 발굴 조사는 1928~29년, 1930~31년 독일-미국의 합동 조사단에 의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1964년 이탈리아 조사단이 한 차례 더 조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아직 크테시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현대 이라크의 정세를 보면 근시일 내에 획기적인 성과가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008년 찍은 호스로 2세의 황궁 아치 유적의 사진.
1. 개요
크테시폰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도시이다. 아르사케스 왕조(기원전 247 ~ 기원후 224)와 사산 왕조(224 ~ 651)의 수도 역할을 했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지로서 바빌론과 셀레우키아의 역할을 이어받았으며, 쇠퇴한 뒤에는 바그다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2. 이름과 위치
크테시폰(Ctesiphon)이라는 표기는 고대 그리스어식 표기(Κτησιφῶν)에 따른 것이다. 사산 왕조 시대의 중세 페르시아어를 아람 문자로 기록한 팔라비(pahlavi) 문헌들에는 tyspwn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티스푼 혹은 티스폰 정도로 발음된다. 이 이름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크테시폰은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위치했으며,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32km 떨어진 지점으로 추정된다.
3. 역사
3.1.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
크테시폰이 처음 도시로 형성된 것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파르티아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빼앗은 기원전 2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본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이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옛 수도였던 셀레우키아를 정복했지만,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인 그곳에 자신들이 들어가 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캠프를 치고 주둔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국의 새로운 지배층인 파르티아인들이 머무는 이 캠프 지역에 인구가 몰리기 시작하여 점차 신도시로 발전한 것이 크테시폰이다. 그리하여 기원후 1세기경이 되면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행정 중심지이자 겨울 수도가 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는 이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더운 여름에는 서늘한 고지대인 메디아나 히르카니아 등으로 왕실 거처를 옮겼다가 추운 겨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로 내려오는 관습을 유지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도시를 감싸는 성벽이 건설되었고, 이후 인구 밀집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점점 규모가 확장되면서 주변 도시들과 합쳐져 거대한 도시권을 이루게 되었다. 개중 유명한 것들로는 상술한 셀레우키아, 그리고 발라시 1세(볼로가세스 1세, 재위 51 ~ 78)가 조성한 교역 중심지 볼로게소케르타(Vologesocerta. Vologesias 혹은 Valakhshabad, Valakhshgerd) 등이 있다.
부유하고 규모가 커진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와 대립했던 로마 제국의 주된 공격 목표가 되었다. 로마는 인구와 국력에서 파르티아를 크게 앞섰으며, 파르티아는 중앙집권이 되지 못한 봉건제 사회였기 때문에 로마의 강력한 공세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크테시폰은 116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165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휘하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게 연이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 역시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길게 유지하지는 못했으며, 점령할 때마다 파르티아인들에게 도로 내주기를 반복했다.
3.2. 사산 왕조 시대
동영상은 토탈 워: 아틸라에서 재현된 당대 크테시폰의 모습.
아르사케스 왕조는 224년 아르더번 4세(아르타바누스 4세, 재위 216 ~ 224)가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 ~ 240)에게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멸망했다. 크테시폰을 점령한 아르다시르 1세는 226년 수도를 크테시폰으로 옮기고, 자신이 이란의 황제(Shahanshah-i Eran)임을 선포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모든 황제들은 크테시폰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사산 왕조 시대의 크테시폰은 이전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인구 밀집 지대의 핵심이자 제국의 행정 중심지, 황제의 겨울 거처로서의 역할을 했다.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제국 각지를 향하는 도로망이 뻗어 있었는데, 개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황제의 여름 거처인 하메단(엑바타나)과 조로아스터교의 성화(聖火)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있는 메디아로 가는 도로였다. 아랍인들이 '하얀 궁전'이라고 불렀던 황궁(항목 최상단의 사진이 그 일부로 추정된다)도 크테시폰에 있었는데, 호스로 2세 시대에는 크테시폰 대신 근처의 다스타게르드(Dastagird)에 새 황궁을 지어 머무르기도 했다.
사산 왕조는 크테시폰과 그 주변 지역을 이란의 심장(del-i eranshahr)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했지만, 정작 인구의 대다수는 비 이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시리아인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선주민들이 다수였으며, 이란인들은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아시리아인들의 땅이라는 뜻의 아소리스탄(Asoristan), 혹은 아수리스탄이라고 불렀다. 이 '아시리아인'들은 대개 아람어를 쓰고, 자신들의 토착 종교나 기독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페르시아어를 쓰는 이란계 인구(페르시아인, 파르티아인 등)는 비교적 소수였으며 대부분 군인, 관료 등 지배계급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Adur Gushnasp, Adur Burzen-Mihr, Adur Farnbag)가 각각 메디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지역에 있고 정작 인구 밀집 지역이자 수도권인 메소포타미아에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 역시 이 같은 인구 구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소수집단으로 유대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살았다.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에는 헬레니즘 도시인 셀레우키아를 중심으로 그리스인 인구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산 왕조 초기 이후로는 토착 인구에 동화되어 거의 사라졌다. 반대로 로마와 이란의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로마 제국의 시리아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이 정착하기도 했다.
상술한 대로 크테시폰 주위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크테시폰 주위에는 여러 위성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사산 왕조 말기 크테시폰의 주요 위성도시들로는 웨-아르다시르(Weh-Ardashir), 아스펀바르(Aspanbar), 서버트(Sabat), 웨-안티오키-호스로(Weh-Antiok-i Khosraw)가 있었고, 문헌에 따라 다섯 개에서 일곱 개까지 늘어난다.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거대한 원형 성벽이 둘러쳐진 크테시폰이 있었고, 그 반대편 서쪽 강변에 마찬가지로 원형 성벽이 둘러쳐진 웨-아르다시르가 있었다. 웨-아르다시르는 아르다시르 1세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5~6세기 경 티그리스 강의 흐름이 바뀌어 도시를 관통하게 되면서 쇠퇴했다. 웨-아르다시르에서 5 km 정도 남쪽에 서버트가 있었고, 크테시폰에서 남쪽으로 5 km 떨어진 곳에 성벽 없는 교외지역인 아스펀바르가 있었다. 아스펀바르에서 다시 남쪽에 사각형 성벽을 가진 웨-안티옥-호스로가 있었는데, 이는 6세기 초 황제 호스로 1세가 로마 제국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뒤 그곳에서 강제 이주시킨 인구를 정착시키기 위해 건설한 도시라는 설이 있다. 안티오키아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사각형의 성벽과 로마식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아랍인들은 이곳을 로마인들의 도시라는 뜻에서 '알 루미야'라고 불렀다. 이처럼 최소 4개 이상의 도시들이 크테시폰과 함께 거대한 도시권을 이뤘으므로 이후 아랍 문헌들에서는 크테시폰을 가리켜 '여러 도시들'이라는 뜻의 알 마다인이라고 기록하게 된다.
크테시폰은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의해 여러 차례 공격 목표가 되었다. 카루스(재위 282 ~ 283) 황제는 바흐람 2세가 동부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사이 크테시폰을 함락, 약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로마에 의한 크테시폰 점령은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율리아누스(재위 361 ~ 363) 황제는 크테시폰을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후퇴하던 중 사망했으며, 헤라클리우스(재위 610 ~ 641) 황제는 이란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628년에 크테시폰 바로 앞까지 진군했지만 점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로마군이 물러간 지 몇년 되지 않아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 이란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결국 까디시야 전투에서 이란 중앙정부의 군대가 무너지자 크테시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고 말았다.
3.3. 그 이후
이란의 황제와 귀족, 관료, 군대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키기 전에 도주했고, 아랍인들은 도시에서 막대한 재물을 노획했다. 아랍 군대는 피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아랍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완전히 장악한 뒤 쿠파, 바스라 등 신도시를 건설하자 그곳으로 인구가 빠져나가기도 하여 크테시폰(상술했듯 아랍인들은 '도시들'이라는 뜻의 알 마다인이라고 불렀다) 일대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크테시폰 주위에는 여전히 방대한 농경지와 수리 시설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잔존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시대까지 크테시폰 주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총독들이 임명되었으며, 사산 왕조의 구 황궁은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다.
크테시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750년 우마이야 왕조가 압바스 왕조로 교체된 뒤, 압바스 왕조가 이라크를 중심지로 삼기 위해 크테시폰 바로 근처에 바그다드를 건설한 이후의 일이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바그다드의 새 궁전에 쓸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크테시폰의 황궁을 철거했고, 바그다드가 완성되고 번영을 누리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인구도 대부분 바그다드 지역으로 옮겨 갔다. 이후 12~13세기까지는 작은 마을 몇 개 정도 수준으로 사람이 살기도 했지만, 14세기 이후 몽골 제국과 티무르의 침입으로 이라크 지역이 완전히 쇠퇴하면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전락하였다.
크테시폰 일대에 대한 근대적 발굴 조사는 1928~29년, 1930~31년 독일-미국의 합동 조사단에 의하여 처음 실시되었다. 이후 1964년 이탈리아 조사단이 한 차례 더 조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아직 크테시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현대 이라크의 정세를 보면 근시일 내에 획기적인 성과가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