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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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의 영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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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란 224년에 건국되어 651년 멸망하여, 400여 년간 지속됐던 이란 제국과 그 지배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5] 건국된 직후 파르티아계 아르사케스 왕조를 멸망시켜 서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고,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과 함께 서반구를 양분하는 강대국으로 군림했으나 7세기 초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아랍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사산 왕조란 말 그대로 왕가인 사산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가의 이름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아르다시르 1세 문서를 참고. 당대에 쓰인 국호는 Ērānshahr였는데, 파흘라비어(중세 페르시아어)로 아리아인/이란인의(Ērān) 영역(shahr)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이란의 어원이기도 하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는 이란의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슬람교의 도래 이후 페르시아인들이 정치-군사 부문에서 주도권을 잃고 아랍인에서 튀르크인, 몽골인 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지만, 사산 왕조 시대에 형성된 "'이란'"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페르시아 문화는 전근대 시대 내내 서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으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6]
중국에선 파사국(波斯國)이라 불렀다. 신라 승려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파사국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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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경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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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마애상. 무릎을 꿇은 쪽이 발레리아누스, 말 탄 쪽이 샤푸르 1세다.
사산 왕조의 발흥은 흔히 파르티아로 알려진 아르사케스 왕조의 약화와 쇠퇴에서 출발한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지방 분권적인 봉건 귀족들의 집합체였던 파르티아 제국은 훨씬 거대한 로마 제국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1세기 동안 수도 크테시폰이 3차례나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때문에 아르사케스 가문의 권위와 실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지방 통제력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CE 3세기 초 이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아르사케스 가문 내에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이 내전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와 대규모 전면전을 치르게 되어 파르티아의 국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문서를 참고.
중앙 정부의 약화를 틈타 가장 먼저 반란의 기치가 내걸린 곳이 바로 파르스(Fars)였다. 파르스는 곧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이며 페르시스(Persis), 즉 '페르시아'의 어원이 되는 곳이다. 이곳의 귀족이었던 사산 가문의 바박(Babak 혹은 Papak)이 아르사케스 가문의 방계 분봉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한 것이다. 바박은 중앙정부에 자신과 그의 맞아들 샤푸르를 파르스의 새 분봉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얼마 안 가 죽었다. 뒤이어 샤푸르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갑작스럽게 죽었고, 샤푸르의 동생이었던 아르다시르가 파르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때가 대략 212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12년 동안 아르다시르는 파르스를 완전히 제압하고 서쪽의 후제스탄과 동쪽의 케르만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했고, 이에 큰 위협을 느낀 파르티아 황제 아르타바누스 4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르다시르를 공격했지만 224년 호르모즈데건 전투에서 패하며 전사했다. 곧 아르다시르는 자신이 이란의 황제(Shahanshah-i Iran)임을 선포했고, 이 시점을 사산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아르다시르는 수도를 파르스의 에스타흐르에서 아르사케스 왕조의 옛 수도 크테시폰으로 옮기고, 이란의 다른 지역들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로마 국경 침범 및 아르메니아의 귀속 문제로 충돌이 일었고, 이는 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은 3개 분견대로 나뉘어 쳐들어온 로마군 중 1개 분견대가 이란에 의해 격퇴되고 나머지 둘은 철수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양측의 피해가 모두 적지 않아 일단은 소강상태로 마무리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240년에 죽었는데, 사산 왕조가 구 아르사케스 왕조의 지배 영역을 모두 확고하게 복속시킨 뒤의 일이었다.
아르다시르 1세를 계승한 샤푸르 1세는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와 쿠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로마와 지속적으로 대결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으며, 무엇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은 것이 유명하다. 아르메니아의 상당 부분 역시 이란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로마군과 그 동맹인 팔미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로마를 상대로 큰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는 로마군 포로들과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등지를 약탈하며 강제로 끌고 온 인구를 후제스탄 지역에 정착시켜 도시와 요새, 교량과 댐 등을 건설했다. 후제스탄의 군디샤푸르, 파르스의 비샤푸르와 호라산의 니샤푸르가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도시들이다.
샤푸르 1세는 학술과 문화의 후원자이자 종교적 관용을 유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가 바로 이 시대 사람으로써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이란 내에서 이단적인 종교라 할 수 있는 마니교를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다. 아마 대사제 카르티르(Kartir 혹은 Kerdir)로 대표되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마기) 계급의 득세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로마에서 끌려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기독교도 박해받지 않았으며, 바빌로니아의 유대교도들 역시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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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신에게 제위의 상징을 받는 나르세. 제위를 찬탈한 나르세는 대규모 마애상과 비문을 남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 명문이 보존되어 초기 사산 왕조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제위를 계승한 호르미즈드 1세는 고작 1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자 길란의 왕이었던 바흐람 1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도였던 데다 제위에 오르는 데 대사제 카르티르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마니를 처형하고 마니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흐람 1세는 당시 독자 세력화를 꾀하고 있던 팔미라의 제노비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지원하기도 했지만, 제노비아가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로마 측에 화평을 요청하며 저자세를 유지했다. 샤푸르 1세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태도 변화인데, 원래 영토 크기나 국력으로 볼 때 로마 제국은 이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강대국인데다, 로마는 마침 아우렐리아누스가 분열된 제국을 막 통합해 낸 상태였던 반면 이란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276년 바흐람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바흐람 2세는 부황의 전례를 따라 타종교 탄압 기조를 유지했으며, 카르티르는 제국 전체의 최고 심판관이자 원래 사산 가문의 지위였던 에스타흐르의 아나히타 신전의 수호자로 임명되어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와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282년 로마군 침공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쿠샨의 왕으로 가 있던 바흐람 2세의 동생 호르미즈드가 주변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바흐람 2세가 이를 진압하러 간 사이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 침공한 것이다. 황제와 주력군이 없는 수도 크테시폰은 로마군에게 간단히 점령되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나마 카루스 황제가 급사하여 로마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장기 점령은 피할 수 있었다. 호르미즈드의 반란은 283년 진압되었으나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 로마군이 다시 아르메니아로 침입해 왔고, 로마의 지원을 받는 아르메니아 왕자 티리다테스의 활약으로 이란은 대패하여 아르메니아 서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294년 바흐람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3세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연이은 반란과 로마와의 패전 때문에 귀족들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국 바흐람 3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왕족 중 가장 권위있는 위치인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나르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바흐람 3세를 퇴위시켜 나르세를 나르세스 1세로는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르세스 1세는 타종교 탄압을 중지하는 한편, 귀족 세력 불만의 주요 원인인 아르메니아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은 초반에만 잠깐 성공적으로 보였고 나중에는 로마군에게 역관광당해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7] 결국 나르세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역들을 로마에 할양하고 아르메니아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등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 협상을 체결해야 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로마를 침공하지 못했다.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나르세스 1세는 302년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양위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2세 역시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귀족들의 불만과 발호는 날로 심해졌다. 결국 309년 호르미즈드 2세가 죽은 뒤 귀족들은 곧 포악한 그의 맏아들 아두르 나르세를 살해하고, 둘째는 장님으로 만들고, 셋째는 감금했다. 왕위는 첩 소생의 갓난아들 샤푸르 2세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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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샤푸르 2세로 추정되는 두상.
샤푸르 2세는 호르미즈드 2세의 유복자로, 부황이 죽은 뒤 귀족들이 모후의 임신한 배 위에 왕관을 올려놓아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이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영유아 시기에 제위에 올랐으며, 재위 초창기 10여 년 동안은 모후와 귀족들이 황제를 대신해 섭정했다.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샤푸르 2세는 곧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과시한다. 그의 재위 초기 이란의 혼란과 약화를 틈타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의 아랍 부족들이 바다를 건너 파르스 일대를 약탈했다. 빡친 샤푸르 2세는 곧 소규모 원정군을 조직[8] , 아랍인들의 본거지까지 추적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때 아랍 포로들의 어깨를 뚫어 줄로 꿰어 끌고 갔기 때문에 "어깨 뚫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아랍인들은 큰 타격을 입고 상당 기간 이란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337년부터는 나르세 시대에 빼앗긴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아르메니아를 되찾기 위해 다시 로마를 공격했으며, 이 전쟁은 일진일퇴의 공방과 휴전을 반복하며 30년 가까이 이루어졌다. 359년경에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인 히온인(Xionites)과 키다르인(Kidarites) 등이 이란 동부를 공격했으나, 급히 로마 전선을 정리하고 달려온 샤푸르 2세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사산 제국에 복속되었다. 로마 전선은 361년 계속된 이란의 도발에 분노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이끄는 대규모 로마 원정군에게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크테시폰 공성이 실패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율리아누스가 급사함으로써(전사라는 주장도 있다) 무사히 격퇴되었다. 결국 샤푸르 2세는 로마 황제 요비아누스로부터 과거 나르세 시절 할양했던 영토에 더해 주요 군사도시인 니시비스와 신가라까지 양도받고, 향후 로마가 아르메니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유리한 강화 조건을 이끌어냈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다시 이란에 의해 정복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쇠약하고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받았던 샤푸르 2세는 70년 평생에 이르는 재위 기간 동안 동서의 적을 모두 제압하고, 제국을 다시 강력하게 만든 뒤 379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샤푸르는 이란에서 기독교 박해를 다시 시작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는 넓게 봤을 때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데 대한 반작용이며, 좁게 봤을 때는 이란이 기를 쓰고 차지하려 했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반(反) 이란 감정과 분열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정리가 마무리되어 제국의 공식 교리가 정해지고, 로마와 비슷한 교회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 역시 샤푸르 2세 시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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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 바흐람 5세가 자신의 별명(바흐람 구르)의 유래가 된 야생 나귀들을 사냥하는 장면. 1430년 티무르 제국 시대 작품으로, 바흐람 구르는 화려한 궁정 생활과 일화들을 남겨 오랫동안 이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379년에서 498년까지 120년에 이르는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동로마와 이란이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단기적, 산발적인 충돌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가 유지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샤푸르 2세의 긴 치세 동안 이란이 눈에 띄게 강력해졌고,[9] 150여 년에 이르는 대결의 결과 동로마와 이란이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 첫째 이유이다. 이에 더해 두 제국 모두 동방-북방에서 침입해 오는 이민족들을 상대하고 내부의 혼란을 통제해야 했으므로 서로 전면전을 치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둘째 이유다.
특히 사산 제국에서는 샤푸르 2세의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에 억눌려 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발호가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샤푸르 2세의 이복 동생으로서 제위를 계승한 아르다시르 2세는 383년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에게 양위하고 물러났으며, 샤푸르 3세는 재위 5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38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바흐람 4세는 좀 더 오래 재위하긴 했지만 결국 399년에 암살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399년 제위를 계승한 바흐람 4세의 동생 야즈데게르드 1세는 선제들보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42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재위 초기에는 기독교도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견제한 반면 말년에는 기독교도가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박해를 용인하여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의 반발을 샀지만, 대체로 그의 치세 대부분은 종교의 자유가 용인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다.
421년 야즈데게르드 1세가 변방에 체류하던 중 의문사하자 그의 큰아들 샤푸르와 작은아들 바흐람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샤푸르는 귀족들의 농간에 의해 암살되었다. 귀족들은 바흐람의 즉위 역시 막으려고 했지만, 바흐람은 이란의 속국이던 아랍계 라흠 왕조의 군대를 빌려 귀족들을 물리치고 바흐람 5세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막 즉위한 422년에는 이란 내의 기독교 박해 문제로 동로마와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 상태가 회복되었으며, 427년에는 몸소 동방에 친정하여 에프탈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같은 외치의 성공을 바탕으로 바흐람 5세는 귀족과 성직자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재위 대부분 기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사냥, 스포츠, 연회, 시와 음악 등 궁중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특히 바흐람 5세는 사냥, 그중에서도 야생 당나귀 사냥을 좋아하여 구르(야생 당나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바흐람 5세는 동로마와의 평화 협정에 따라 기독교 박해를 중지했고, 43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야즈데게르드 2세 역시 재위 초기에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가 점점 커져 조로아스터교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다. 특히 아시리아 교회의 희생자가 많았으며, 기독교 세가 크던 아르메니아를 강제로 개종시키려다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대규모 반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비해 훨씬 관대한 대우를 받던 유대인들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훈, 키다르, 에프탈, 아랍인, 투르크 등 사막과 스텝 유목민들과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캅카스와 호라산에서 각각 승리를 거두어 유목민 침입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457년 야즈데게르드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3세가 즉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과 소흐라 가문의 자르메흐르의 지원을 받은 동생 페로즈 1세에 의해 암살되었다. 페로즈는 캅카스에서 훈의 침입을 격퇴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키다르를 물리쳤으며, 7년에 달하는 기근을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483년 그는 대규모의 에프탈 침공군에게 패배해 사로잡혔고, 거액의 몸값을 내고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잡힌 뒤에야 풀려나왔다. 페로즈는 484년 다시 군대를 모아 출전해 에프탈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챈 에프탈의 기습으로 역관광당해 전군이 궤멸당하고 본인도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란 동부는 에프탈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헤라트 등 이란 동부를 휩쓸고 돌아간 에프탈은 페르시아에게 막대한 연공 납부를 강요했다. 에프탈에게 두 번이나 크게 패한 페르시아는 막대한 연공을 바쳐야했다. 한편 에프탈 침입 직전 아르메니아도 페르시아가 약해진것을 알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
소흐라의 자르메흐르를 중심으로 이란 동부에 남은 에프탈을 몰아낸 귀족들은 페로즈의 동생이자 행정 수반이었던 발라시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발라시는 선량한 인물이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혜안은 갖고 있질 못했고, 에프탈에 바치는 막대한 연공 때문에 재정은 바닥을 쳤다. 이런 발라시한테 짜증난 귀족들은 4년 만에 발라시의 눈을 멀게 만들고 유폐시켜 버린 뒤, 에프탈의 지원을 받은 페로즈의 아들 카바드를 제위에 추대했다.
488년 즉위한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막강한 힘을 제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 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니교와 흡사한 교리를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교는 귀족과 부자들이 모든 재산, 심지어 부인들까지 가난한 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하층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사회에 혁명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카바드 1세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지원했고, 당연히 반발한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496년 카바드를 폐위시켜 후제스탄의 '망각의 성'이라는 감옥에 가둔 뒤 그의 동생 자마습을 대신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카바드는 곧 탈출하여 트란스옥시아나로 갔고, 그곳에서 에프탈 군대를 지원받아 크테시폰으로 돌아왔다. 자마습은 카바드에게 항복했고, 카바드 1세가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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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 20세기 초 테헤란에 조성된 호스로 1세 "아누쉬르번"(불멸의 영혼)을 묘사한 기념물. 호스로 1세는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정의롭고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
498년 제위를 되찾은 카바드 1세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물론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은 한풀 꺾였지만, 왕권이 추락했다는것은 명백했다. 특히 오랜 기근과 유목민들의 약탈, 잦은 전쟁으로 인민의 삶은 피폐해졌고 제국의 재정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 그 외 이란에 복속되어 있던 여러 아랍 부족들과 산악 부족들이 이란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독립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방에 할거한 귀족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에프탈을 이길 힘은 여전히 없다보니 살려고 연공까지 바쳐야 했다.
달리 재원을 마련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 카바드는 동로마로 눈을 돌렸다. 과거 동로마와 이란이 캅카스 지역을 분할한 뒤,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동로마가 이란에 분담금을 지불해 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현금 지불을 거부했고, 카바드는 에프탈을 끌어들인 정면 침공으로 이에 화답했다. 502년 시작된 전쟁은 506년 캅카스 지역에 훈이 대거 쳐들어오면서 평화 협정으로 끝났지만 카바드 1세는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물론, 점령한 도시를 동로마에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내 당장 재정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뒤 526년 이베리아의 귀속 문제를 두고 전쟁이 재발하여 532년까지 이어졌다. 동로마와 이란은 서로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면전을 벌였으며, 영토 변화는 없는 대신 동로마가 이란에 방어 분담금을 계속 지급하는 방향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카바드 1세는 외치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황폐해진 국내 상황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의 세력 확대는 귀족들에 대한 공격과 폭동으로 이어졌고, 마즈다크 교단과 귀족들간의 싸움으로 대귀족들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충분히 약화되었고, 마즈다크교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되자 정통 교리를 내세워 마즈다크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10] 마즈다크교와 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카바드 1세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점차 확대하여 제국 전역의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세제 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 작업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호스로 1세 시대까지 이어진다. 또 카바드 1세는 샤푸르 2세 이후 거의 중단되었던 황제 주도의 도시 조영 작업을 재개하기도 했다.
카바드 1세는 죽기 전 작은아들인 호스로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고, 531년 카바드 1세가 죽자 호스로 1세가 형 카부스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다. 마즈다크교를 절멸시키고 폐위 음모를 꾸미던 귀족과 형제들까지 제거하여 절대 권력을 확립한 호스로 1세는 앞서 언급한 내정 개혁을 강행했다. 그 결과 봉건 귀족을 대체하기 위한 데흐건(Dehqan, 하급 귀족 혹은 소영주) 집단을 육성하고, 재정 확충과 행정-군사 부문의 중앙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개혁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 "정치" 단락과 "군사" 단락을 보라)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파괴된 농장과 운하의 재건 및 확대, 새로운 도시 조영 등 각종 건설 사업도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같은 내치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호스로 1세는 적극적인 대외 공세에 나섰다. 557년 중앙아시아의 돌궐(튀르크) 제국과 연합해 에프탈을 협공, 궤멸시켰으며 571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을 점령, 속국으로 삼았다. 에프탈 멸망 후에는 돌궐이 새로운 위협이 되었으나, 적어도 호스로 1세 치세에는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에프탈, 예멘과 달리 대 동로마 전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명백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채 수십 년을 끌었다. 동로마와 이란은 532년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는데, 540년 이란 측이 조약을 파기하고 동로마를 공격했다. 당시 동로마는 서부 전선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호스로 1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이후 호스로 1세가 캅카스의 속국 라지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돌린 사이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뒤늦게 남하한 호스로 1세 역시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543년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동로마군은 이란 측의 매복에 걸려 격퇴되었고, 545년 동로마와 이란은 동로마가 연공을 보내는 조건으로 5년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547년 라지카가 이란 대신 동로마와 손을 잡기로 함에 따라 동로마군이 파견되고, 동로마와 이란은 물론 역내 친동로마 세력과 친이란 세력끼리도 충돌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결국 549년 동로마와 이란의 전면전이 재개되었고, 10여 년을 끌다가 562년 라지카가 동로마 측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571년 아르메니아의 반란으로 양측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며, 동로마와 이란은 변경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쟁을 지속했다.
579년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호르미즈드 4세는 단호한 인물로, 국내적으로는 호스로 1세 이후 극적으로 강화된 황권을 적극 행사하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동로마를 상대로 한치의 양보도 거부했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대부분 국내 귀족들과의 암투와 변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를 틈타 튀르크 세력이 대규모로 이란을 침공했으나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 추빈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완전히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흐람 추빈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곧 호르미즈드 4세의 경계심을 증폭시켰고, 양자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590년 바흐람 추빈은 본거지인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크테시폰으로 진군해 왔고, 호르미즈드 4세는 아들 호스로와 공모한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올랐으나, 바흐람 추빈은 이에 개의치 않고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자신이 새로운 황제라고 선포했다. 바흐람 추빈과 싸워 패배한 호스로 2세와 지지자들은 동로마로 도피했고, 아르메니아 서부와 이베리아를 넘기는 대가로 황제 마우리키우스로부터 동로마군을 지원받았다. 동로마군과 함께 돌아온 호스로 2세는 591년 바흐람 추빈 세력과 격돌, 승리를 거두고 제위를 되찾았다. 얼마 후에는 바흐람 추빈에 대항해 호스로 2세를 지원했던 이란 귀족 비스탐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바그라투니[11] 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602년 마우리키우스가 죽을 때까지 동로마와 이란은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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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년 동로마에서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차지하자, 호스로 2세는 즉각 자신의 은인인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을 보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로마를 침공했다. 오랜 전쟁과 반복된 내전으로 약화된 동로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동로마-이란 국경의 요새 지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포카스를 몰아내고 즉위한 새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뒤늦게 동로마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나, 611년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호스로 2세 휘하의 장군 샤힌과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이란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나톨리아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차례로 무너져내렸다. 616년에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마주 보이는 칼케돈 지역까지 이란군이 주둔했다. 동부 변경에서도 619년 슴바트 바그라투니 휘하의 군대가 튀르크의 침입을 격퇴했다. 호스로 2세와 이란 귀족들은 주체하기 힘든 엄청난 성공에 취했고, 향락과 사치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호스로 2세와 귀족들은 동로마가 계속 당하고만 있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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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 12세기 프랑스에서 묘사된 호스로 2세(가운데)와 헤라클리우스(오른쪽)의 싸움. 왼쪽에서 케루빔이 지켜보고 있다.
622년, 절망적인 상황에 몰린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란군이 동로마의 점령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틈을 타 이란의 심장부를 기습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란이 아직 흑해와 지중해에 해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을 노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바로 배를 이용해 아르메니아로 이동, 그곳에서 이란령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타격하자는 것이다. 이 작전은 과연 적중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수차례 같은 공격을 반복했다. 호스로 2세는 급히 본토에서 병력을 차출해 헤라클리우스에게 대항했지만 군대를 보내는 족족 격파당했고, 전선의 이란군은 아바르 군대와 함께 6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627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聖火)이자 전사-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동로마군에게 파괴되어 호스로 2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호스로 2세는 패전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하인, 노예들을 전장에 내모는 등 발작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보다못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628년 귀족들은 유폐되었던 호스로 2세의 아들을 카바드 2세로 추대하고, 카바드 2세는 부황 호스로 2세와 함께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했고, 카바드 2세 역시 이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호스로 2세의 전쟁으로 군대의 대부분이 사라지고[12] 수도권이 황폐화되자 대귀족들은 자기들 영지에 할거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지며 제국은 공중분해되었다. 카바드 2세의 뒤를 이은 아르다시르 3세는 겨우 7세의 어린아이였고, 곧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당했으며, 샤흐르바라즈 역시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 샤흐르바라즈는 죽기 전 휴전하는 대신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헤라클리우스와 강화했다. 이 강화는 페르시아 샤한샤가 동로마 황제의 노예라는 명칭까지 쓸 정도로 굴욕적이라 사실상 이란의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잠시 호스로 2세의 딸들인 푸란도흐트와 아자르미도흐트가 제위에 올랐으나 둘 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푸란도흐트 사후 약 2년 동안은 10명에 달하는 제위 참칭자들이 나타나 이란 제국은 끝 모를 나락에 빠져들었다.
633년 최종적으로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단일 제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8살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며 실제 권력을 가진 것은 귀족 로스탐 파로흐저드였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국은 주위 모든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캅카스 지역에서는 하자르가, 동부에서는 튀르크가 침입했으며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잘 알려진 대로 이란을 실제로 정복한 것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었다. 호스로 2세는 동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직전인 600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아라비아 반도 북부의 속국인 라흠 왕조의 왕을 사형시켜 버리고 이 지역을 이란의 직할령으로 편입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 부유하고 취약한 사산 제국의 심장부와 아라비아 사막의 약탈자들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벽이 사라졌다. 이는 오히려 라흠 왕조 치하에 있던 아랍인들이 이후 이슬람 세력에 가담하여 이란 정복에 적극 협조하는 결과까지 낳는다.
아랍 이슬람 군대는 붕괴되는 제국에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미 잦은 정쟁의 여파로 사산 황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귀족들은 많은 수가 제국을 돕지 않거나 심지어 아랍 측에 협조하기도 했다.[13] 이런 상황에서도 남은 힘을 끌어모은 제국과 아랍군 간에는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이란 중앙 정부의 군대는 636년 까디시야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수도 크테시폰에서 빠져나온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란 각지를 돌며 지원을 호소했으나, 642년 메디아의 나하반드 전투에서 마지막 충성파 군대가 패배한 뒤로 사산 왕조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아랍 이슬람 세력은 산산이 분열된 이란 각지를 차례차례 접수해 나갔고, 야즈데게르드 3세가 651년 메르브에서 살해당하면서 사산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그의 아들 페로즈를 당(통일왕조)으로 보내 권토중래를 기도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상 무의미했다. 이것에 착안했는지 쿠시나메라는, 아랍 정복자에 복수하는 내용의 대체역사성 서사시가 생겨나기도 했다. 쿠시나메는 주인공인 마지막 왕자 아비틴이 당나라를 거쳐 신라로 망명하는 내용이라 한국에서도 한때 화제가 되고 공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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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산 왕조 이전 이란을 지배했던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조의 통치 체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던 과거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동시대의 로마 제국과는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는 중세 서유럽 국가들과 훨씬 유사한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의 왕조와 국호 아래 있지만 실상은 반독립적인 봉건 영주들이 제국 각지에 독자적 영지와 세력을 구축하고 할거하는 것이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제국 전체를 직접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여러 영주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유서깊으며 권위있는 가문으로서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다. 로마에 대한 지속적인 패배로 인해 그들의 권위와 실력이 크게 실추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 배경임은 앞서 역사 부분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처럼 '약한' 아르사케스 왕조와 반대로 사산 왕조는 '강한' 중앙정부의 모델을 내세웠다. 아르다시르 1세 시대부터 이미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구축하는 한편, 황실 구성원을 분봉왕으로 삼아 지방 통제를 강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이는 자원의 효과적인 집중과 활용을 가능하게 했고, 영역 크기만 보면 아르사케스 왕조와 거의 다를 게 없던 사산 왕조가 동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격적이고 효과적인 전쟁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강한 중앙정부' 모델은 수백 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하는 일이었으며, 황실이 가진 군사력도 한계가 있었기에 이들을 모조리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산 왕조의 국가적 역량은 황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위에서 설명한 사산 왕조의 역사가 상당 부분 황제와 귀족들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의 개혁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귀족들에게 제거당하는 상황에서 강한 중앙정부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므로, 귀족들의 힘을 줄이고 그만큼 중앙정부를 강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마침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위기와 마즈다크교의 준동이 개혁을 위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고,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개혁의 핵심은 조세 방식, 그중 특히 지세에 관한 것이었다. 기존 방식은 매년 정부의 징세관들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소출을 파악하고 현물로 거두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세금을 거두기 전에는 예산을 함부로 편성할 수 없었고, 대귀족들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황제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거나 고위관료로 복무하는 대신 독자적인 조세 권한을 가지는 등 비효율과 착취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반 평민들은 이에 더해 화폐로 인두세까지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마즈다크교가 선동한 대규모 폭동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쫓겨났고, 오랜 기근과 약탈로 농토가 황폐해져 조세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이 생겼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휘하의 관료들은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대신 명시적인 토지 대장을 만들어 소유주, 지목, 생산량 등을 기록한 뒤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액수의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대귀족들의 면세 세습 토지가 늘어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며, 그 양을 예측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재정의 효율성을 늘리겠다는 취지였다. 세금을 정액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판관(주로 지역 사제) 주재 하에 지목, 생산량 등을 조정할 수 있게 했고, 인두세의 대상 역시 20세 이상 50세 이하로 제한되었다. 이 개혁이 과연 봉건 대귀족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후대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했을 때 발견한 엄청난 양의 화폐를 보면 최소한 "국가 재정의 효율화"라는 목표는 달성된 것이 확실하다.[14]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데흐건(Dehgan 혹은 Deqhan) 계급의 대두이다. 데흐건은 소규모 토지 보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급 귀족 분류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조세 개혁과 토지대장 작성으로 많은 평민 혹은 하급 귀족 토지 보유자들이 생겨났고, 중앙 정부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은 이들은 지방 향촌에서 정부의 행정 집행(주로 징세)을 직접 담당하거나 보조하면서 새로운 계급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봉건 귀족들과 달리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통제를 대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데흐건의 대두는 단기적으로 중앙 정부의 강화에 기여했다. 단 정부의 적절한 관리가 없을 경우 그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데흐건들이 사실상 봉건 귀족들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사산 왕조 말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데흐건들은 이란의 황실과 정부, 대귀족 세력들이 아랍인들의 공세에 모두 무너져 사라진 뒤에도 아랍 정부 치하에서 지역의 관리자로써 상당수 잔존할 수 있었다.
문서 최상단의 지도에 나와 있듯이 사산 왕조의 평상시 영역은 현대 이란+이라크 국경에서 동-서로 조금 늘어난 수준이다. 수도인 크테시폰이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사산 왕조 인구의 상당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자원을 확보 가능한 이란 남서부~남부(후제스탄, 파르스, 케르만), 북서부~북동부(하메단, 레이, 호라산, 마잔다란)의 산간 및 고원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 혹은 건조기후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넓은 영토에도 인구는 700만~800만[15]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이란의 국력은 상당 부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기에, 통합된 로마 제국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만으로도 인구와 경제력에서 이란을 압도했다.[16] 특히 페르시아의 적들은 동로마만 있는 게 아니라 중동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노리는 아랍인과 투르크인, 이란계 유목민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틈만 나면 이란을 공격하고 약탈했기에 그들과도 맞서야 했다. 따라서 더 부유하고 강력한 적국과 인접한 곳에 수도와 인구, 농업 생산력 등 모든 것이 몰려 있는[17][18] 사산 왕조는 로마에 비해 훨씬 자기방어적이며 군사적인 사회로 발전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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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 사산 왕조 말기 주요 도시와 지역들을 표시한 백지도. 제국의 인구 분포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출처: Touraj Daryaee 역, Šahrestānīhā-ī Ērānšahr, P. 107[20]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 등 도시 조영 사업에 힘썼던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 도시를 만들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물을 이용하기 위한 운하와 관개 시스템 구축 사업 역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파괴한 지 100여 년 뒤에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번영할 때까지 이어져서, 당시 바그다드는 수많은 운하와 도랑, 거대한 농경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카나트(Qanat)라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으며, 조로아스터에서 갈라져나온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같이 유행했다. 미트라교 같은 고대 종교도 고립된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은 의외로 '''그들 이전에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와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1세 같은 고대 페르시아의 명군들에 대해 무지했다 한다.'''[21] 사산 왕조 초창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한 제한적 지식밖에는 없었던 듯하다.
페르시아 왕과 귀족, 사제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적 권위를 신화에 주로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페르시아어 문학의 단골 등장인물인 로스탐과 전설상의 왕국인 카야니아 왕조 신화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신화를 들추어내고 고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된 시점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페르시아 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아람어로 활발하게 번역되고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귀족들과 후궁들이 페르시아 사회에 뿌리내리며 성경의 키루스 대제와 바빌론 이야기가 페르시아 왕과 귀족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소개된 서기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사산 왕조의 기독교인들은 초창기에는 주로 제국 서부에 거주했으며, 종종 로마 제국에 협조한다는 의심을 사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겪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사산 왕조의 주류 기독교 종파였던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시한 이후에야 사산 왕조에서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한다. 이후 기독교는 사산 왕조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심지어 사산 왕조와 교역하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가 번성했었다. 또한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장수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에프탈의 카간을 전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은 그 이후 다른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 비해 더 좋은 처우를 받았던 듯 하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인도계와 중앙아시아계를 중심으로 불교도 널리 유행했다. 다만 이전 파르티아와 다르게 사산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적극 탄압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불교 교세는 고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한다. 파르티아 왕조에서 불교가 유행했던 덕분에 마니교에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의 많은 부분이 도입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모친 슈샨두흐트가 유대인이었던 영향으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이스파한에 대규모 유대인 거주지를 신축하기도 했다.
마즈다크교는 원시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분파로 모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며 결혼 대신에 남녀가 서로의 짝을 공유할 것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가치관을 둔 종교였기 때문에 많은 탄압을 받았다. 한번은 마즈다크교 광신도들이 샤한샤의 하렘에서 여자들을 납치한 적도 있었다.
사산 왕조의 주도 종족은 당연히 페르시아인이다. 물론 사산조가 다민족 국가인 만큼 사산 왕조의 황제는 공식 칭호로 "이란과 비이란의 황제(Shahanshah-e Eran ud Aneran)"를 쓰며 모든 인종과 종족을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주창했지만, 사산 가문의 일원들과 실제 제국을 정복한 이들은 아리아인들 중에서도 파르스 지역 출신인 페르시아인들이었음은 모든 이들이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몇몇 문헌에서 보이는 아르다시르 1세의 적대적 표현과는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 시절 지배층이었던 파르티아인들 역시 사산 왕조에서 페르시아인에 버금가는 종족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과 파르티아인들 사이의 타자 의식과 경쟁 의식은 사산 왕조 말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바흐람 추빈이나 샤흐르바라즈 등이 옛 파르티아 지역에 거점을 둔 파르티아계 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중기~말기 대귀족들과 황제들 사이의 대결을 페르시아계와 파르티아계의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단 이는 아직 신진 학설이다.
물론 제국에 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이란계 종족들이 이란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 또 제국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의 요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종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오히려 페르시아인들이 "소수 지배계층"에 머물렀고 비 페르시아계 인구가 더 많았을 가능성도 높다.[22] 메소포타미아, 즉 제국의 중추부 아수리스탄에는 기독교 칼데아인, 아시리아인, 아랍인, 유대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강제 이주되거나 포로로 잡혀온 시리아~아나톨리아 일대의 로마인 등이 있었다.
사산 왕조 치하 이란의 사회 계급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첫째 전사(Arteshtaran), 둘째 사제(Mobadan), 셋째 관료(Dabiran), 넷째 평민(Vasteryoshan-Hootkheshan)이다. 여기서 관료는 빠지기도 하므로, 실질적으로 전사 - 사제 - 평민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중세 유럽의 3신분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사산 왕조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각 신분 사이의 경계는 매우 엄격했다.
전사 계급은 곧 귀족이다. 귀족들 중 가장 높은 것은 물론 황제와 그 직계 자손인 황족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각 지역에 분봉된 분봉왕들(vassal kings; Shahrdaran)이 있고, 또 그 다음에는 소위 '일곱 가문'으로 알려진 대귀족들(Vaspuhragan)[23] 이 있다. 이 '일곱 가문'의 목록은 인용하는 문헌마다 차이가 많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대개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부터 있었던 수렌(Suren), 메흐란(Mihran), 카렌(Karen), 이스파흐바드(Ispahbadh) 네 가문은 빠지지 않는 편이고, 여기에 더해 스판디야드(Spandiyadh), 에스판디아르(Esfandiar), 지크(Zik), 바라즈(Varaz), 귀브(Guiw) 등에서 셋이 더해져 일곱 개를 채운다. 가끔 왕가인 사산(Sasan)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대개 이 귀족들의 본거지는 과거 파르티아 계나 사카 계 유목민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했던 메디아, 호라산, 시스탄 지역에 있었으며 분봉왕들의 영지는 시스탄, 쿠샨, 아파르샤흐르, 메르브, 케르만 등 제국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황실과 정부의 근거지는 수도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한 아수리스탄에서 후제스탄, 파르스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이들 밑에는 중상급 귀족(Vuzurgan)들과 관료들이 있고, 그 밑에는 중하급 귀족(Azadan)이 있다.
성직자들의 계급과 위계에 대한 것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최고 사제의 직함으로 추정되는 Mobadan Mobad 등이 있지만, 조로아스터교 교회 체계는 사산 왕조 성립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다. 다만 사제 집단, 특히 고위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높았기에 매우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사산조는 교육, 결혼, 예배 의식의 참여, 축제와 애도식 등 사회의 모든 일이 종교의 규례와 종교적 전통에 따라 진행되다보니 종교의 영향력이 높을수밖에 없었다.
셋째 신분인 관료는 귀족 가문이나 사제가 아닌 하급 공무원을 의미하며 굳이 따지자면 중인 혹은 부르주아쯤 되는 포지션이다.
평민 계급은 귀족과 성직자들을 제외한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층 민중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생활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물론 평민들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에 비해 삶이 어려웠다. 다만 대다수의 인구는 농민이었을 것이고, 오늘날 전해지는 사산 왕조 시대 유물들의 높은 수준을 볼 때 공예품이나 사치품을 생산하는 장인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실크로드 무역이 물론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지만, 지중해처럼 일찍부터 대규모 해상 무역이 발달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크테시폰 등 극소수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상이었을 것이다. 평민 외에 노예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중요성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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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를 몇 백 년 지배했고, 동로마 제국과 건곤일척이었던[24] 패권국답게 충분히 강력했다. 사산 왕조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기병 중심이었던 파르티아 군대의 양식을 계승했으므로 파르티아 군대와 유사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다. 우선 군대의 핵심이 카타프락토이, 혹은 클리바나리로 대표되는 중장기병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봉건 귀족과 그 가신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파르티아와 같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단순히 중장기병 - 경장기병으로만 구성되었던 파르티아에 비해 더욱 다양한 병종을 동원하였다. 또 완전한 기병 중심의 봉건제 군대였던 파르티아에 비해 좀더 중앙집권화된 군사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제국 최고의 전성기인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으로 정점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7세기 초 동로마와의 과도한 전쟁으로 군사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아랍 군대에게 무너지긴 했지만, 사산 왕조 군대는 수백 년간 서방의 거대한 로마 제국과 동방의 위협적인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중동의 지배자로 군림한 제국 국력의 핵심이었다.
기본적으로 군의 통수권은 "이란 총사령관"인 '''에란 스파보드'''(Eran Spahbod)가 가지고 그 휘하의 장군인 '''스파보드'''(Spahbod)들을 지휘했으며, 군정 및 평화 협상을 포함해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황제가 대귀족 중 한 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총사령관 대신 황제가 직접 나서 전쟁을 지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던 것이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 결과 총사령관직은 없어지고, 대신 제국을 4분하여 각 영역을 담당하는 지방 사령관직을 신설했다. 이는 각각 남동/남(Nemroz), 북동/동(Xwarasan), 남서/서(Xwarwaran), 북서/북(Adurbadagan)으로 나뉜다.[25] 일반적으로 귀족(Vuzurgan, Azadan)이나 분봉왕들의 영지를 제외한 지역들은 중앙정부의 관리가 행정을 맡았지만, 일부 변경 지역에는 군사/행정의 전권을 위임받아 사실상 분봉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진 총독들을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르즈반'''(Marzban)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대표적인 지역으로, 상황에 따라 페르시아인 마르즈반들과 아르메니아인 분봉왕들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제국 동부 지역에 임명되는 '''카나란'''(Kanarang)이라는 직책도 있었는데, 특정 지역에 임명된다는 것을 빼면 마르즈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산 왕조 군대의 정확한 편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파흘라비어 단어 중에 상/하위 부대에 관한 용어(Washt가 모여서 Drafsh가 되고, Drafsh가 모여서 Gund가 되는 식)나 천인대장(Hazarmard) 같은 용어들이 있는 것을 볼 때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갖추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도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사용했으므로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말기를 다룬 기록에서 "황제의 군단(Gund-i Shahanshah)"이나 "황금 창병대" 같은 부대 이름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워낙 단편적인 기록들이라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산 왕조 군대가 과연 중앙집권화된 상비군을 갖추었는가도 어려운 문제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상비군을 창설"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반대로 5~6세기 기록에는 "페르시아에는 동로마와 같은 상비군은 전혀 없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고, 이들은 양성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봉건 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은 전쟁시 샤한샤를 위해 싸우는 대신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배/세습할 수 있는 독자적 영지를 갖추고 있는 봉건 계급이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 시대에 비해 훨씬 강력한 중앙정부와 관료체제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군사력의 주축이 소수의 봉건 귀족 기병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역할 역시 주요 대귀족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서돌궐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장군 바흐람 추빈은 호라산의 파르티아계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상비군 비슷한 것이 아예 없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사산 제국 시대에는 로마와의 국경이 이미 수백 년 동안 고착되어 강력한 요새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쟁 시 공성과 수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따라서 요새를 지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수비대가 있어야 하는데, 소수의 봉건 귀족들이 그 같은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또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에 비해 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세적이었고[26] , 수년 이상 걸리는 전쟁도 소화해 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파르티아에 비해서는 훨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근위대 비슷한 것으로 자예단(Zhayedan 혹은 Zhavedan)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아타나토이 문서 참조).
대체적으로 봉건 귀족이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것이 기존의 추세라면,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시대의 개혁으로 인해 그 추세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앞서 누차 설명한 대로, 이 시대 개혁의 목표는 중앙집권의 강화였다. 군 지휘체계에서 단일 총사령관직을 없애고 4곳의 지방 사령관직으로 나눈 것 역시 황제 이외의 인물에 지나치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스로 1세가 군사 부문의 개혁에서 역점을 둔 것은 독자 영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무장하는 군사력을 황실과 관료제가 봉급과 장비를 통제할 수 있는 상비군 성격의 군사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을 통해 육성한 데흐건 계급이 행정적 측면에서는 황실의 지방 통제의 최말단이 되고, 군사적으로는 중앙정부 직속 군사력의 중핵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분석하는 바가 다르지만, 최소한 개혁 이전에 비해서 군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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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사산 왕조의 중장기병들은 시대에 따른 갑옷, 투구, 무기, 마구나 기타 장비들의 변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시대의 중장기병 형태를 그대로 계승했다. 근거리에서는 양손으로 잡는 장창을 사용해 돌격하고, 원거리에서는 활을 이용한 견제를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칼과 도끼, 메이스, 단검, 투창, 다트 등 다양한 보조 무기를 사용했다. 마갑을 갖춘 카타프락토이들이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그 수는 적었고, 아마 마갑 없이 기수만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Kaveh Farrokh 박사는 그의 책 "Sassanian Elite Cavalry"에서 시대에 따른 기병 무장 양식의 차이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시대 중장기병들은 크게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우선 왕조 초기에는 로마와 주로 대립하면서 비싸고 불편한 파르티아식 판갑옷 대신 사슬갑옷을 도입했고, 마갑도 없거나 천으로 된 것들이 주류였다.
이것이 점차 중장화되어, 4세기경에 이르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묘사대로 "눈구멍과 콧구멍을 제외한 전신을 철갑으로 가린" 식의 초중장기병이 나타났다.
그러나 4~5세기 이후 다수의 경장 궁기병을 운용하는 에프탈, 튀르크 등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오자 소수의 둔중한 중장기병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무장을 좀 더 가볍게 하고, 대신 숫자를 늘린 중장기병 운용이 나타났다. 또 칼의 패용법이나 활의 종류, 등자의 사용 등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위 기병대인 '''푸쉬티그반'''(Pushtigban)과 그 예하 부대인 '''기안-아비스파르'''(Gyan-Avspar) 또한 중장기병이였는데. 사바란(기병) 중에서도 1,000명의 최정예 병사들만을 차출해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안-아비스파르는 1,000명의 병사 중에서도 더욱 최정예만을 골라 구성되었는데, 이름의 뜻[27] 에 걸맞는 열성적인 전투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동방 원정 당시 무방비상태였던 율리아누스에게 창을 꽃아 죽인 게 푸쉬티그반 소속 기병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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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군과 맞붙는 초창기 사산 왕조 군대를 묘사한 암벽 부조. 당시 귀족들의 기마 전투 양식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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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서부 케르만샤 주의 타케 보스탄에 남아있는 사산 왕조 후기의 부조. 완전무장한 당시 중장기병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경무장 궁기병 역시 중요한 전력으로 활용되었으나[28] , 정주 문명의 역사가 오래된 사산 제국은 더 이상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카르헤 전투 시절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처럼 대규모의 경무장 궁기병을 자체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이란 본토의 군대는 거의 소수 귀족 전사 계급의 중장기병에 집중되었고, 경기병 전력은 주로 동맹, 속국 동원, 용병의 형태로 보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샤푸르 2세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유목민 집단인 히온인(Xionites)의 왕 그룸바테스와 전쟁을 벌여 그를 복속시킨 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동원한 경우가 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낙타 기병을 동원한 경우가 있지만, 사산 제국의 경우 낙타가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와 반대로 사산 제국의 가장 큰 적이던 동로마는 낙타 기병대를 운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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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가 중장기병을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경무장 궁기병을 동원했다면, 사산 왕조는 기병의 부족을 만회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보병을 동원했다. 보병의 지휘관은 '''파야간 사라르'''(Payyagan Salar)로 불렸다. 보병은 다시 궁병과 창병, 기타 용병들로 나뉜다. 대다수의 창병들은 임시로 징집된 농민이나 하층민으로써, 가죽 모자나 조잡한 투구, 고리버들이나 나무, 가죽 따위로 만든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 외에는 별다른 방어구가 없었다. 이들은 주로 진지 수비나 공사, 기병대의 보조나 시중, 전장 정리 등 각종 잡일에 동원되었다. 물론 필요할 경우 전면전에 나서기도 했지만 화살받이 이상의 역할이 기대되지는 않았다. 단 공성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보병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대오를 갖추어 이동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보병들도 어느 정도의 훈련은 받은 것 같다. 궁병들의 경우 최소한 활은 쏠 줄 알아야 하니 창병들보다는 취급이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탁티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궁병들은 활의 정확한 조준보다는 빠른 연사능력을 더 중시했다.
로마와 비슷한 중장보병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란 역시 근접전을 위한 보병들을 자주 동원했지만, 이는 상술한 경무장 궁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농민 징집병이나 용병 혹은 동맹국, 속국 병력들이었다. 이외에도 데일람(카스피 해 연안의 이란 북부 산악지역), 쿠르드, 소그드, 아르메니아, 아랍 등에서 보병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중 특히 데일람 병사들이 투창과 칼을 잘 쓰기로 유명했으며 이후 이슬람 시대에도 용병으로 활약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철갑을 입은 기병과 보병"이라거나 "보병들은 검투사(murmillo)들처럼 차려입었고..." 등 보병들이 갑옷을 입고 있는 듯한 묘사들이 있는데,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이 병사들의 정확한 정체나 성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른 기록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성벽 위에 늘어서 있었다는 묘사도 있으나, 이 정도로 중무장한 이들은 보병이 아니라 수성을 돕기 위해 말을 버리고 성벽에 올라온 기병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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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다시피 수백 년 동안 고착된 로마-이란 간 국경지대에는 강력한 요새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거점 도시들도 성벽으로 방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전쟁시 공성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사산 왕조는 로마 못지않은 다양한 공성 무기와 공성 기술을 발전시켰다. 공성전에 별 관심이 없던 파르티아와 달리 당장 시조인 아르다시르 1세부터 로마식 공성 장비를 도입했다는 설명이 있다. 공성 무기를 이용한 공격 외에도 대규모의 땅굴 파기 혹은 토산 쌓기도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로 징집된 보병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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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 군대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으로는 코끼리를 전쟁에 적극 동원했다는 점이 있다.[29] 파르티아는 물론 사산 왕조 전과 후를 통틀어 이란 지역의 국가이면서 전투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동원한 나라는 셀레우코스 왕조밖에 없다. 이란 지역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기 때문에 코끼리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수입되었으며, 위에 나무로 된 망루를 올리고 2~3명의 궁병이 탔다. 셀레우코스 시대와 달리 코끼리에 따로 갑옷을 입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코끼리에 갑옷을 입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산조를 끝으로 중동에서는 더이상 전투 코끼리가 동원되지 않았다.
해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란이 당시 이란 본토와 페르시아 만을 끼고 마주보는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지배했고, 6세기경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예멘까지 정복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해군 활동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양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반면 제국 서부의 경우 지중해로 가는 길이 동로마에 의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에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건너다니는 배들 말고는 해군 비슷한 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7세기 초 동로마를 완전히 코너로 몰아넣었을 때,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해 임시로 배를 만들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공격에 패하면서 상륙에 실패하게 된다.
그밖에 사산 왕조 군사들의 복식을 현대에 와서 재현하거나 복원한 그림들을 보고 싶다면, 밑의 링크를 참조할 것. #
재미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6, 7, 8, 10대 샤한샤의 행적은 조선 6~9대 왕의 행적과 유사하다는 점이 있다. 또 하나는 '''호르미즈드라는 이름을 가진 샤한샤(왕중왕, 황제)치고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점'''인데, 재위 기간이 짧거나 무능하거나 최후가 비참했다.
사산 왕조의 영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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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란 224년에 건국되어 651년 멸망하여, 400여 년간 지속됐던 이란 제국과 그 지배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5] 건국된 직후 파르티아계 아르사케스 왕조를 멸망시켜 서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고, 수백 년 동안 지중해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과 함께 서반구를 양분하는 강대국으로 군림했으나 7세기 초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아랍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사산 왕조란 말 그대로 왕가인 사산 가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가의 이름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아르다시르 1세 문서를 참고. 당대에 쓰인 국호는 Ērānshahr였는데, 파흘라비어(중세 페르시아어)로 아리아인/이란인의(Ērān) 영역(shahr)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이란의 어원이기도 하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는 이란의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슬람교의 도래 이후 페르시아인들이 정치-군사 부문에서 주도권을 잃고 아랍인에서 튀르크인, 몽골인 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지만, 사산 왕조 시대에 형성된 "'이란'"이라는 강력한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페르시아 문화는 전근대 시대 내내 서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으므로, 사산 왕조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6]
중국에선 파사국(波斯國)이라 불렀다. 신라 승려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파사국이 등장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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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경쟁 관계
2.1. 건국과 첫 번째 전성기 (CE. 224 -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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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마애상. 무릎을 꿇은 쪽이 발레리아누스, 말 탄 쪽이 샤푸르 1세다.
사산 왕조의 발흥은 흔히 파르티아로 알려진 아르사케스 왕조의 약화와 쇠퇴에서 출발한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지방 분권적인 봉건 귀족들의 집합체였던 파르티아 제국은 훨씬 거대한 로마 제국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1세기 동안 수도 크테시폰이 3차례나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때문에 아르사케스 가문의 권위와 실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지방 통제력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CE 3세기 초 이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아르사케스 가문 내에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이 내전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와 대규모 전면전을 치르게 되어 파르티아의 국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문서를 참고.
중앙 정부의 약화를 틈타 가장 먼저 반란의 기치가 내걸린 곳이 바로 파르스(Fars)였다. 파르스는 곧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이며 페르시스(Persis), 즉 '페르시아'의 어원이 되는 곳이다. 이곳의 귀족이었던 사산 가문의 바박(Babak 혹은 Papak)이 아르사케스 가문의 방계 분봉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한 것이다. 바박은 중앙정부에 자신과 그의 맞아들 샤푸르를 파르스의 새 분봉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얼마 안 가 죽었다. 뒤이어 샤푸르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갑작스럽게 죽었고, 샤푸르의 동생이었던 아르다시르가 파르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때가 대략 212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12년 동안 아르다시르는 파르스를 완전히 제압하고 서쪽의 후제스탄과 동쪽의 케르만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했고, 이에 큰 위협을 느낀 파르티아 황제 아르타바누스 4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르다시르를 공격했지만 224년 호르모즈데건 전투에서 패하며 전사했다. 곧 아르다시르는 자신이 이란의 황제(Shahanshah-i Iran)임을 선포했고, 이 시점을 사산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아르다시르는 수도를 파르스의 에스타흐르에서 아르사케스 왕조의 옛 수도 크테시폰으로 옮기고, 이란의 다른 지역들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로마 국경 침범 및 아르메니아의 귀속 문제로 충돌이 일었고, 이는 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은 3개 분견대로 나뉘어 쳐들어온 로마군 중 1개 분견대가 이란에 의해 격퇴되고 나머지 둘은 철수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양측의 피해가 모두 적지 않아 일단은 소강상태로 마무리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240년에 죽었는데, 사산 왕조가 구 아르사케스 왕조의 지배 영역을 모두 확고하게 복속시킨 뒤의 일이었다.
아르다시르 1세를 계승한 샤푸르 1세는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와 쿠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로마와 지속적으로 대결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으며, 무엇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은 것이 유명하다. 아르메니아의 상당 부분 역시 이란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로마군과 그 동맹인 팔미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로마를 상대로 큰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는 로마군 포로들과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등지를 약탈하며 강제로 끌고 온 인구를 후제스탄 지역에 정착시켜 도시와 요새, 교량과 댐 등을 건설했다. 후제스탄의 군디샤푸르, 파르스의 비샤푸르와 호라산의 니샤푸르가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도시들이다.
샤푸르 1세는 학술과 문화의 후원자이자 종교적 관용을 유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가 바로 이 시대 사람으로써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이란 내에서 이단적인 종교라 할 수 있는 마니교를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다. 아마 대사제 카르티르(Kartir 혹은 Kerdir)로 대표되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마기) 계급의 득세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로마에서 끌려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기독교도 박해받지 않았으며, 바빌로니아의 유대교도들 역시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2. 첫 번째 침체기 (272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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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신에게 제위의 상징을 받는 나르세. 제위를 찬탈한 나르세는 대규모 마애상과 비문을 남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 명문이 보존되어 초기 사산 왕조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제위를 계승한 호르미즈드 1세는 고작 1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자 길란의 왕이었던 바흐람 1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도였던 데다 제위에 오르는 데 대사제 카르티르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마니를 처형하고 마니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흐람 1세는 당시 독자 세력화를 꾀하고 있던 팔미라의 제노비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지원하기도 했지만, 제노비아가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로마 측에 화평을 요청하며 저자세를 유지했다. 샤푸르 1세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태도 변화인데, 원래 영토 크기나 국력으로 볼 때 로마 제국은 이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강대국인데다, 로마는 마침 아우렐리아누스가 분열된 제국을 막 통합해 낸 상태였던 반면 이란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276년 바흐람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바흐람 2세는 부황의 전례를 따라 타종교 탄압 기조를 유지했으며, 카르티르는 제국 전체의 최고 심판관이자 원래 사산 가문의 지위였던 에스타흐르의 아나히타 신전의 수호자로 임명되어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와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282년 로마군 침공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쿠샨의 왕으로 가 있던 바흐람 2세의 동생 호르미즈드가 주변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바흐람 2세가 이를 진압하러 간 사이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 침공한 것이다. 황제와 주력군이 없는 수도 크테시폰은 로마군에게 간단히 점령되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나마 카루스 황제가 급사하여 로마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장기 점령은 피할 수 있었다. 호르미즈드의 반란은 283년 진압되었으나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 로마군이 다시 아르메니아로 침입해 왔고, 로마의 지원을 받는 아르메니아 왕자 티리다테스의 활약으로 이란은 대패하여 아르메니아 서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294년 바흐람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3세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연이은 반란과 로마와의 패전 때문에 귀족들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국 바흐람 3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왕족 중 가장 권위있는 위치인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나르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바흐람 3세를 퇴위시켜 나르세를 나르세스 1세로는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르세스 1세는 타종교 탄압을 중지하는 한편, 귀족 세력 불만의 주요 원인인 아르메니아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은 초반에만 잠깐 성공적으로 보였고 나중에는 로마군에게 역관광당해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7] 결국 나르세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역들을 로마에 할양하고 아르메니아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등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 협상을 체결해야 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로마를 침공하지 못했다.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나르세스 1세는 302년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양위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2세 역시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귀족들의 불만과 발호는 날로 심해졌다. 결국 309년 호르미즈드 2세가 죽은 뒤 귀족들은 곧 포악한 그의 맏아들 아두르 나르세를 살해하고, 둘째는 장님으로 만들고, 셋째는 감금했다. 왕위는 첩 소생의 갓난아들 샤푸르 2세에게 돌아갔다.
2.3. 두 번째 전성기 (309 -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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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샤푸르 2세로 추정되는 두상.
샤푸르 2세는 호르미즈드 2세의 유복자로, 부황이 죽은 뒤 귀족들이 모후의 임신한 배 위에 왕관을 올려놓아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이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영유아 시기에 제위에 올랐으며, 재위 초창기 10여 년 동안은 모후와 귀족들이 황제를 대신해 섭정했다.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샤푸르 2세는 곧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과시한다. 그의 재위 초기 이란의 혼란과 약화를 틈타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의 아랍 부족들이 바다를 건너 파르스 일대를 약탈했다. 빡친 샤푸르 2세는 곧 소규모 원정군을 조직[8] , 아랍인들의 본거지까지 추적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때 아랍 포로들의 어깨를 뚫어 줄로 꿰어 끌고 갔기 때문에 "어깨 뚫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아랍인들은 큰 타격을 입고 상당 기간 이란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337년부터는 나르세 시대에 빼앗긴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아르메니아를 되찾기 위해 다시 로마를 공격했으며, 이 전쟁은 일진일퇴의 공방과 휴전을 반복하며 30년 가까이 이루어졌다. 359년경에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인 히온인(Xionites)과 키다르인(Kidarites) 등이 이란 동부를 공격했으나, 급히 로마 전선을 정리하고 달려온 샤푸르 2세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사산 제국에 복속되었다. 로마 전선은 361년 계속된 이란의 도발에 분노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이끄는 대규모 로마 원정군에게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크테시폰 공성이 실패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율리아누스가 급사함으로써(전사라는 주장도 있다) 무사히 격퇴되었다. 결국 샤푸르 2세는 로마 황제 요비아누스로부터 과거 나르세 시절 할양했던 영토에 더해 주요 군사도시인 니시비스와 신가라까지 양도받고, 향후 로마가 아르메니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유리한 강화 조건을 이끌어냈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다시 이란에 의해 정복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쇠약하고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받았던 샤푸르 2세는 70년 평생에 이르는 재위 기간 동안 동서의 적을 모두 제압하고, 제국을 다시 강력하게 만든 뒤 379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샤푸르는 이란에서 기독교 박해를 다시 시작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는 넓게 봤을 때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데 대한 반작용이며, 좁게 봤을 때는 이란이 기를 쓰고 차지하려 했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반(反) 이란 감정과 분열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정리가 마무리되어 제국의 공식 교리가 정해지고, 로마와 비슷한 교회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 역시 샤푸르 2세 시대로 여겨진다.
2.4. 두 번째 침체기 (379 -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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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 바흐람 5세가 자신의 별명(바흐람 구르)의 유래가 된 야생 나귀들을 사냥하는 장면. 1430년 티무르 제국 시대 작품으로, 바흐람 구르는 화려한 궁정 생활과 일화들을 남겨 오랫동안 이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379년에서 498년까지 120년에 이르는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동로마와 이란이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단기적, 산발적인 충돌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가 유지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샤푸르 2세의 긴 치세 동안 이란이 눈에 띄게 강력해졌고,[9] 150여 년에 이르는 대결의 결과 동로마와 이란이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 첫째 이유이다. 이에 더해 두 제국 모두 동방-북방에서 침입해 오는 이민족들을 상대하고 내부의 혼란을 통제해야 했으므로 서로 전면전을 치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둘째 이유다.
특히 사산 제국에서는 샤푸르 2세의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에 억눌려 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발호가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샤푸르 2세의 이복 동생으로서 제위를 계승한 아르다시르 2세는 383년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에게 양위하고 물러났으며, 샤푸르 3세는 재위 5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38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바흐람 4세는 좀 더 오래 재위하긴 했지만 결국 399년에 암살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399년 제위를 계승한 바흐람 4세의 동생 야즈데게르드 1세는 선제들보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42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재위 초기에는 기독교도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견제한 반면 말년에는 기독교도가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박해를 용인하여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의 반발을 샀지만, 대체로 그의 치세 대부분은 종교의 자유가 용인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다.
421년 야즈데게르드 1세가 변방에 체류하던 중 의문사하자 그의 큰아들 샤푸르와 작은아들 바흐람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샤푸르는 귀족들의 농간에 의해 암살되었다. 귀족들은 바흐람의 즉위 역시 막으려고 했지만, 바흐람은 이란의 속국이던 아랍계 라흠 왕조의 군대를 빌려 귀족들을 물리치고 바흐람 5세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막 즉위한 422년에는 이란 내의 기독교 박해 문제로 동로마와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 상태가 회복되었으며, 427년에는 몸소 동방에 친정하여 에프탈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같은 외치의 성공을 바탕으로 바흐람 5세는 귀족과 성직자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재위 대부분 기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사냥, 스포츠, 연회, 시와 음악 등 궁중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특히 바흐람 5세는 사냥, 그중에서도 야생 당나귀 사냥을 좋아하여 구르(야생 당나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바흐람 5세는 동로마와의 평화 협정에 따라 기독교 박해를 중지했고, 43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야즈데게르드 2세 역시 재위 초기에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가 점점 커져 조로아스터교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다. 특히 아시리아 교회의 희생자가 많았으며, 기독교 세가 크던 아르메니아를 강제로 개종시키려다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대규모 반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비해 훨씬 관대한 대우를 받던 유대인들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훈, 키다르, 에프탈, 아랍인, 투르크 등 사막과 스텝 유목민들과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캅카스와 호라산에서 각각 승리를 거두어 유목민 침입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457년 야즈데게르드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3세가 즉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과 소흐라 가문의 자르메흐르의 지원을 받은 동생 페로즈 1세에 의해 암살되었다. 페로즈는 캅카스에서 훈의 침입을 격퇴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키다르를 물리쳤으며, 7년에 달하는 기근을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483년 그는 대규모의 에프탈 침공군에게 패배해 사로잡혔고, 거액의 몸값을 내고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잡힌 뒤에야 풀려나왔다. 페로즈는 484년 다시 군대를 모아 출전해 에프탈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챈 에프탈의 기습으로 역관광당해 전군이 궤멸당하고 본인도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란 동부는 에프탈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헤라트 등 이란 동부를 휩쓸고 돌아간 에프탈은 페르시아에게 막대한 연공 납부를 강요했다. 에프탈에게 두 번이나 크게 패한 페르시아는 막대한 연공을 바쳐야했다. 한편 에프탈 침입 직전 아르메니아도 페르시아가 약해진것을 알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
소흐라의 자르메흐르를 중심으로 이란 동부에 남은 에프탈을 몰아낸 귀족들은 페로즈의 동생이자 행정 수반이었던 발라시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발라시는 선량한 인물이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혜안은 갖고 있질 못했고, 에프탈에 바치는 막대한 연공 때문에 재정은 바닥을 쳤다. 이런 발라시한테 짜증난 귀족들은 4년 만에 발라시의 눈을 멀게 만들고 유폐시켜 버린 뒤, 에프탈의 지원을 받은 페로즈의 아들 카바드를 제위에 추대했다.
488년 즉위한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막강한 힘을 제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 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니교와 흡사한 교리를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교는 귀족과 부자들이 모든 재산, 심지어 부인들까지 가난한 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하층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사회에 혁명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카바드 1세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지원했고, 당연히 반발한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496년 카바드를 폐위시켜 후제스탄의 '망각의 성'이라는 감옥에 가둔 뒤 그의 동생 자마습을 대신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카바드는 곧 탈출하여 트란스옥시아나로 갔고, 그곳에서 에프탈 군대를 지원받아 크테시폰으로 돌아왔다. 자마습은 카바드에게 항복했고, 카바드 1세가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2.5. 세 번째 전성기 (498 -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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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 20세기 초 테헤란에 조성된 호스로 1세 "아누쉬르번"(불멸의 영혼)을 묘사한 기념물. 호스로 1세는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정의롭고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
498년 제위를 되찾은 카바드 1세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물론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은 한풀 꺾였지만, 왕권이 추락했다는것은 명백했다. 특히 오랜 기근과 유목민들의 약탈, 잦은 전쟁으로 인민의 삶은 피폐해졌고 제국의 재정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 그 외 이란에 복속되어 있던 여러 아랍 부족들과 산악 부족들이 이란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독립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방에 할거한 귀족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에프탈을 이길 힘은 여전히 없다보니 살려고 연공까지 바쳐야 했다.
달리 재원을 마련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 카바드는 동로마로 눈을 돌렸다. 과거 동로마와 이란이 캅카스 지역을 분할한 뒤,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동로마가 이란에 분담금을 지불해 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현금 지불을 거부했고, 카바드는 에프탈을 끌어들인 정면 침공으로 이에 화답했다. 502년 시작된 전쟁은 506년 캅카스 지역에 훈이 대거 쳐들어오면서 평화 협정으로 끝났지만 카바드 1세는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물론, 점령한 도시를 동로마에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내 당장 재정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뒤 526년 이베리아의 귀속 문제를 두고 전쟁이 재발하여 532년까지 이어졌다. 동로마와 이란은 서로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면전을 벌였으며, 영토 변화는 없는 대신 동로마가 이란에 방어 분담금을 계속 지급하는 방향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카바드 1세는 외치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황폐해진 국내 상황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의 세력 확대는 귀족들에 대한 공격과 폭동으로 이어졌고, 마즈다크 교단과 귀족들간의 싸움으로 대귀족들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충분히 약화되었고, 마즈다크교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되자 정통 교리를 내세워 마즈다크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10] 마즈다크교와 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카바드 1세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점차 확대하여 제국 전역의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세제 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 작업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호스로 1세 시대까지 이어진다. 또 카바드 1세는 샤푸르 2세 이후 거의 중단되었던 황제 주도의 도시 조영 작업을 재개하기도 했다.
카바드 1세는 죽기 전 작은아들인 호스로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고, 531년 카바드 1세가 죽자 호스로 1세가 형 카부스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다. 마즈다크교를 절멸시키고 폐위 음모를 꾸미던 귀족과 형제들까지 제거하여 절대 권력을 확립한 호스로 1세는 앞서 언급한 내정 개혁을 강행했다. 그 결과 봉건 귀족을 대체하기 위한 데흐건(Dehqan, 하급 귀족 혹은 소영주) 집단을 육성하고, 재정 확충과 행정-군사 부문의 중앙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개혁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 "정치" 단락과 "군사" 단락을 보라)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파괴된 농장과 운하의 재건 및 확대, 새로운 도시 조영 등 각종 건설 사업도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같은 내치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호스로 1세는 적극적인 대외 공세에 나섰다. 557년 중앙아시아의 돌궐(튀르크) 제국과 연합해 에프탈을 협공, 궤멸시켰으며 571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을 점령, 속국으로 삼았다. 에프탈 멸망 후에는 돌궐이 새로운 위협이 되었으나, 적어도 호스로 1세 치세에는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에프탈, 예멘과 달리 대 동로마 전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명백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채 수십 년을 끌었다. 동로마와 이란은 532년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는데, 540년 이란 측이 조약을 파기하고 동로마를 공격했다. 당시 동로마는 서부 전선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호스로 1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이후 호스로 1세가 캅카스의 속국 라지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돌린 사이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뒤늦게 남하한 호스로 1세 역시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543년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동로마군은 이란 측의 매복에 걸려 격퇴되었고, 545년 동로마와 이란은 동로마가 연공을 보내는 조건으로 5년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547년 라지카가 이란 대신 동로마와 손을 잡기로 함에 따라 동로마군이 파견되고, 동로마와 이란은 물론 역내 친동로마 세력과 친이란 세력끼리도 충돌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결국 549년 동로마와 이란의 전면전이 재개되었고, 10여 년을 끌다가 562년 라지카가 동로마 측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571년 아르메니아의 반란으로 양측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며, 동로마와 이란은 변경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쟁을 지속했다.
579년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호르미즈드 4세는 단호한 인물로, 국내적으로는 호스로 1세 이후 극적으로 강화된 황권을 적극 행사하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동로마를 상대로 한치의 양보도 거부했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대부분 국내 귀족들과의 암투와 변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를 틈타 튀르크 세력이 대규모로 이란을 침공했으나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 추빈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완전히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흐람 추빈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곧 호르미즈드 4세의 경계심을 증폭시켰고, 양자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590년 바흐람 추빈은 본거지인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크테시폰으로 진군해 왔고, 호르미즈드 4세는 아들 호스로와 공모한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올랐으나, 바흐람 추빈은 이에 개의치 않고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자신이 새로운 황제라고 선포했다. 바흐람 추빈과 싸워 패배한 호스로 2세와 지지자들은 동로마로 도피했고, 아르메니아 서부와 이베리아를 넘기는 대가로 황제 마우리키우스로부터 동로마군을 지원받았다. 동로마군과 함께 돌아온 호스로 2세는 591년 바흐람 추빈 세력과 격돌, 승리를 거두고 제위를 되찾았다. 얼마 후에는 바흐람 추빈에 대항해 호스로 2세를 지원했던 이란 귀족 비스탐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바그라투니[11] 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602년 마우리키우스가 죽을 때까지 동로마와 이란은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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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년 동로마에서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차지하자, 호스로 2세는 즉각 자신의 은인인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을 보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로마를 침공했다. 오랜 전쟁과 반복된 내전으로 약화된 동로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동로마-이란 국경의 요새 지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포카스를 몰아내고 즉위한 새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뒤늦게 동로마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나, 611년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호스로 2세 휘하의 장군 샤힌과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이란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나톨리아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차례로 무너져내렸다. 616년에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마주 보이는 칼케돈 지역까지 이란군이 주둔했다. 동부 변경에서도 619년 슴바트 바그라투니 휘하의 군대가 튀르크의 침입을 격퇴했다. 호스로 2세와 이란 귀족들은 주체하기 힘든 엄청난 성공에 취했고, 향락과 사치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호스로 2세와 귀족들은 동로마가 계속 당하고만 있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2.6. 몰락 (622 -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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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 12세기 프랑스에서 묘사된 호스로 2세(가운데)와 헤라클리우스(오른쪽)의 싸움. 왼쪽에서 케루빔이 지켜보고 있다.
622년, 절망적인 상황에 몰린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이란군이 동로마의 점령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틈을 타 이란의 심장부를 기습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란이 아직 흑해와 지중해에 해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을 노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바로 배를 이용해 아르메니아로 이동, 그곳에서 이란령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타격하자는 것이다. 이 작전은 과연 적중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수차례 같은 공격을 반복했다. 호스로 2세는 급히 본토에서 병력을 차출해 헤라클리우스에게 대항했지만 군대를 보내는 족족 격파당했고, 전선의 이란군은 아바르 군대와 함께 6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627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聖火)이자 전사-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동로마군에게 파괴되어 호스로 2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호스로 2세는 패전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하인, 노예들을 전장에 내모는 등 발작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보다못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628년 귀족들은 유폐되었던 호스로 2세의 아들을 카바드 2세로 추대하고, 카바드 2세는 부황 호스로 2세와 함께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했고, 카바드 2세 역시 이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호스로 2세의 전쟁으로 군대의 대부분이 사라지고[12] 수도권이 황폐화되자 대귀족들은 자기들 영지에 할거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지며 제국은 공중분해되었다. 카바드 2세의 뒤를 이은 아르다시르 3세는 겨우 7세의 어린아이였고, 곧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당했으며, 샤흐르바라즈 역시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 샤흐르바라즈는 죽기 전 휴전하는 대신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헤라클리우스와 강화했다. 이 강화는 페르시아 샤한샤가 동로마 황제의 노예라는 명칭까지 쓸 정도로 굴욕적이라 사실상 이란의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잠시 호스로 2세의 딸들인 푸란도흐트와 아자르미도흐트가 제위에 올랐으나 둘 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푸란도흐트 사후 약 2년 동안은 10명에 달하는 제위 참칭자들이 나타나 이란 제국은 끝 모를 나락에 빠져들었다.
633년 최종적으로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단일 제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8살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며 실제 권력을 가진 것은 귀족 로스탐 파로흐저드였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국은 주위 모든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캅카스 지역에서는 하자르가, 동부에서는 튀르크가 침입했으며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잘 알려진 대로 이란을 실제로 정복한 것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었다. 호스로 2세는 동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직전인 600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아라비아 반도 북부의 속국인 라흠 왕조의 왕을 사형시켜 버리고 이 지역을 이란의 직할령으로 편입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 부유하고 취약한 사산 제국의 심장부와 아라비아 사막의 약탈자들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벽이 사라졌다. 이는 오히려 라흠 왕조 치하에 있던 아랍인들이 이후 이슬람 세력에 가담하여 이란 정복에 적극 협조하는 결과까지 낳는다.
아랍 이슬람 군대는 붕괴되는 제국에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미 잦은 정쟁의 여파로 사산 황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귀족들은 많은 수가 제국을 돕지 않거나 심지어 아랍 측에 협조하기도 했다.[13] 이런 상황에서도 남은 힘을 끌어모은 제국과 아랍군 간에는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이란 중앙 정부의 군대는 636년 까디시야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수도 크테시폰에서 빠져나온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란 각지를 돌며 지원을 호소했으나, 642년 메디아의 나하반드 전투에서 마지막 충성파 군대가 패배한 뒤로 사산 왕조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아랍 이슬람 세력은 산산이 분열된 이란 각지를 차례차례 접수해 나갔고, 야즈데게르드 3세가 651년 메르브에서 살해당하면서 사산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그의 아들 페로즈를 당(통일왕조)으로 보내 권토중래를 기도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상 무의미했다. 이것에 착안했는지 쿠시나메라는, 아랍 정복자에 복수하는 내용의 대체역사성 서사시가 생겨나기도 했다. 쿠시나메는 주인공인 마지막 왕자 아비틴이 당나라를 거쳐 신라로 망명하는 내용이라 한국에서도 한때 화제가 되고 공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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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산 왕조 이전 이란을 지배했던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조의 통치 체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던 과거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동시대의 로마 제국과는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는 중세 서유럽 국가들과 훨씬 유사한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의 왕조와 국호 아래 있지만 실상은 반독립적인 봉건 영주들이 제국 각지에 독자적 영지와 세력을 구축하고 할거하는 것이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제국 전체를 직접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여러 영주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유서깊으며 권위있는 가문으로서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다. 로마에 대한 지속적인 패배로 인해 그들의 권위와 실력이 크게 실추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 배경임은 앞서 역사 부분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처럼 '약한' 아르사케스 왕조와 반대로 사산 왕조는 '강한' 중앙정부의 모델을 내세웠다. 아르다시르 1세 시대부터 이미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구축하는 한편, 황실 구성원을 분봉왕으로 삼아 지방 통제를 강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이는 자원의 효과적인 집중과 활용을 가능하게 했고, 영역 크기만 보면 아르사케스 왕조와 거의 다를 게 없던 사산 왕조가 동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격적이고 효과적인 전쟁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강한 중앙정부' 모델은 수백 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하는 일이었으며, 황실이 가진 군사력도 한계가 있었기에 이들을 모조리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산 왕조의 국가적 역량은 황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위에서 설명한 사산 왕조의 역사가 상당 부분 황제와 귀족들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의 개혁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귀족들에게 제거당하는 상황에서 강한 중앙정부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므로, 귀족들의 힘을 줄이고 그만큼 중앙정부를 강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마침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위기와 마즈다크교의 준동이 개혁을 위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고,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개혁의 핵심은 조세 방식, 그중 특히 지세에 관한 것이었다. 기존 방식은 매년 정부의 징세관들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소출을 파악하고 현물로 거두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세금을 거두기 전에는 예산을 함부로 편성할 수 없었고, 대귀족들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황제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거나 고위관료로 복무하는 대신 독자적인 조세 권한을 가지는 등 비효율과 착취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반 평민들은 이에 더해 화폐로 인두세까지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마즈다크교가 선동한 대규모 폭동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쫓겨났고, 오랜 기근과 약탈로 농토가 황폐해져 조세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이 생겼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휘하의 관료들은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대신 명시적인 토지 대장을 만들어 소유주, 지목, 생산량 등을 기록한 뒤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액수의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대귀족들의 면세 세습 토지가 늘어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며, 그 양을 예측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재정의 효율성을 늘리겠다는 취지였다. 세금을 정액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판관(주로 지역 사제) 주재 하에 지목, 생산량 등을 조정할 수 있게 했고, 인두세의 대상 역시 20세 이상 50세 이하로 제한되었다. 이 개혁이 과연 봉건 대귀족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후대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했을 때 발견한 엄청난 양의 화폐를 보면 최소한 "국가 재정의 효율화"라는 목표는 달성된 것이 확실하다.[14]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데흐건(Dehgan 혹은 Deqhan) 계급의 대두이다. 데흐건은 소규모 토지 보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급 귀족 분류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조세 개혁과 토지대장 작성으로 많은 평민 혹은 하급 귀족 토지 보유자들이 생겨났고, 중앙 정부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은 이들은 지방 향촌에서 정부의 행정 집행(주로 징세)을 직접 담당하거나 보조하면서 새로운 계급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봉건 귀족들과 달리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통제를 대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데흐건의 대두는 단기적으로 중앙 정부의 강화에 기여했다. 단 정부의 적절한 관리가 없을 경우 그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데흐건들이 사실상 봉건 귀족들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사산 왕조 말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데흐건들은 이란의 황실과 정부, 대귀족 세력들이 아랍인들의 공세에 모두 무너져 사라진 뒤에도 아랍 정부 치하에서 지역의 관리자로써 상당수 잔존할 수 있었다.
4. 사회
문서 최상단의 지도에 나와 있듯이 사산 왕조의 평상시 영역은 현대 이란+이라크 국경에서 동-서로 조금 늘어난 수준이다. 수도인 크테시폰이 영역의 서쪽 끝부분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사산 왕조 인구의 상당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자원을 확보 가능한 이란 남서부~남부(후제스탄, 파르스, 케르만), 북서부~북동부(하메단, 레이, 호라산, 마잔다란)의 산간 및 고원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사막 혹은 건조기후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넓은 영토에도 인구는 700만~800만[15]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이란의 국력은 상당 부분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기에, 통합된 로마 제국은 물론이요, 동로마 제국만으로도 인구와 경제력에서 이란을 압도했다.[16] 특히 페르시아의 적들은 동로마만 있는 게 아니라 중동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노리는 아랍인과 투르크인, 이란계 유목민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틈만 나면 이란을 공격하고 약탈했기에 그들과도 맞서야 했다. 따라서 더 부유하고 강력한 적국과 인접한 곳에 수도와 인구, 농업 생산력 등 모든 것이 몰려 있는[17][18] 사산 왕조는 로마에 비해 훨씬 자기방어적이며 군사적인 사회로 발전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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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 사산 왕조 말기 주요 도시와 지역들을 표시한 백지도. 제국의 인구 분포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출처: Touraj Daryaee 역, Šahrestānīhā-ī Ērānšahr, P. 107[20]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르다시르 1세, 샤푸르 1세, 샤푸르 2세,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 등 도시 조영 사업에 힘썼던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와 그 인근 지역에 도시를 만들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물을 이용하기 위한 운하와 관개 시스템 구축 사업 역시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파괴한 지 100여 년 뒤에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번영할 때까지 이어져서, 당시 바그다드는 수많은 운하와 도랑, 거대한 농경지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수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카나트(Qanat)라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용해 최대한 넓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5. 종교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으며, 조로아스터에서 갈라져나온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같이 유행했다. 미트라교 같은 고대 종교도 고립된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은 의외로 '''그들 이전에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와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1세 같은 고대 페르시아의 명군들에 대해 무지했다 한다.'''[21] 사산 왕조 초창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한 제한적 지식밖에는 없었던 듯하다.
페르시아 왕과 귀족, 사제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적 권위를 신화에 주로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페르시아어 문학의 단골 등장인물인 로스탐과 전설상의 왕국인 카야니아 왕조 신화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신화를 들추어내고 고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된 시점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페르시아 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아람어로 활발하게 번역되고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귀족들과 후궁들이 페르시아 사회에 뿌리내리며 성경의 키루스 대제와 바빌론 이야기가 페르시아 왕과 귀족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소개된 서기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사산 왕조의 기독교인들은 초창기에는 주로 제국 서부에 거주했으며, 종종 로마 제국에 협조한다는 의심을 사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겪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사산 왕조의 주류 기독교 종파였던 네스토리우스교를 이단시한 이후에야 사산 왕조에서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한다. 이후 기독교는 사산 왕조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심지어 사산 왕조와 교역하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가 번성했었다. 또한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장수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가 에프탈의 카간을 전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은 그 이후 다른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 비해 더 좋은 처우를 받았던 듯 하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인도계와 중앙아시아계를 중심으로 불교도 널리 유행했다. 다만 이전 파르티아와 다르게 사산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적극 탄압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불교 교세는 고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한다. 파르티아 왕조에서 불교가 유행했던 덕분에 마니교에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의 많은 부분이 도입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모친 슈샨두흐트가 유대인이었던 영향으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이스파한에 대규모 유대인 거주지를 신축하기도 했다.
마즈다크교는 원시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분파로 모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며 결혼 대신에 남녀가 서로의 짝을 공유할 것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가치관을 둔 종교였기 때문에 많은 탄압을 받았다. 한번은 마즈다크교 광신도들이 샤한샤의 하렘에서 여자들을 납치한 적도 있었다.
6. 민족
사산 왕조의 주도 종족은 당연히 페르시아인이다. 물론 사산조가 다민족 국가인 만큼 사산 왕조의 황제는 공식 칭호로 "이란과 비이란의 황제(Shahanshah-e Eran ud Aneran)"를 쓰며 모든 인종과 종족을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주창했지만, 사산 가문의 일원들과 실제 제국을 정복한 이들은 아리아인들 중에서도 파르스 지역 출신인 페르시아인들이었음은 모든 이들이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몇몇 문헌에서 보이는 아르다시르 1세의 적대적 표현과는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 시절 지배층이었던 파르티아인들 역시 사산 왕조에서 페르시아인에 버금가는 종족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과 파르티아인들 사이의 타자 의식과 경쟁 의식은 사산 왕조 말기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바흐람 추빈이나 샤흐르바라즈 등이 옛 파르티아 지역에 거점을 둔 파르티아계 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중기~말기 대귀족들과 황제들 사이의 대결을 페르시아계와 파르티아계의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단 이는 아직 신진 학설이다.
물론 제국에 페르시아인과 파르티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이란계 종족들이 이란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 또 제국의 중심지였던 메소포타미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의 요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종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오히려 페르시아인들이 "소수 지배계층"에 머물렀고 비 페르시아계 인구가 더 많았을 가능성도 높다.[22] 메소포타미아, 즉 제국의 중추부 아수리스탄에는 기독교 칼데아인, 아시리아인, 아랍인, 유대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강제 이주되거나 포로로 잡혀온 시리아~아나톨리아 일대의 로마인 등이 있었다.
6.1. 계급
사산 왕조 치하 이란의 사회 계급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첫째 전사(Arteshtaran), 둘째 사제(Mobadan), 셋째 관료(Dabiran), 넷째 평민(Vasteryoshan-Hootkheshan)이다. 여기서 관료는 빠지기도 하므로, 실질적으로 전사 - 사제 - 평민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중세 유럽의 3신분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사산 왕조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각 신분 사이의 경계는 매우 엄격했다.
전사 계급은 곧 귀족이다. 귀족들 중 가장 높은 것은 물론 황제와 그 직계 자손인 황족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각 지역에 분봉된 분봉왕들(vassal kings; Shahrdaran)이 있고, 또 그 다음에는 소위 '일곱 가문'으로 알려진 대귀족들(Vaspuhragan)[23] 이 있다. 이 '일곱 가문'의 목록은 인용하는 문헌마다 차이가 많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대개 아르사케스 왕조 시대부터 있었던 수렌(Suren), 메흐란(Mihran), 카렌(Karen), 이스파흐바드(Ispahbadh) 네 가문은 빠지지 않는 편이고, 여기에 더해 스판디야드(Spandiyadh), 에스판디아르(Esfandiar), 지크(Zik), 바라즈(Varaz), 귀브(Guiw) 등에서 셋이 더해져 일곱 개를 채운다. 가끔 왕가인 사산(Sasan)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대개 이 귀족들의 본거지는 과거 파르티아 계나 사카 계 유목민들이 집중적으로 이주했던 메디아, 호라산, 시스탄 지역에 있었으며 분봉왕들의 영지는 시스탄, 쿠샨, 아파르샤흐르, 메르브, 케르만 등 제국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황실과 정부의 근거지는 수도 크테시폰을 중심으로 한 아수리스탄에서 후제스탄, 파르스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이들 밑에는 중상급 귀족(Vuzurgan)들과 관료들이 있고, 그 밑에는 중하급 귀족(Azadan)이 있다.
성직자들의 계급과 위계에 대한 것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최고 사제의 직함으로 추정되는 Mobadan Mobad 등이 있지만, 조로아스터교 교회 체계는 사산 왕조 성립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다. 다만 사제 집단, 특히 고위 사제들은 귀족들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높았기에 매우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사산조는 교육, 결혼, 예배 의식의 참여, 축제와 애도식 등 사회의 모든 일이 종교의 규례와 종교적 전통에 따라 진행되다보니 종교의 영향력이 높을수밖에 없었다.
셋째 신분인 관료는 귀족 가문이나 사제가 아닌 하급 공무원을 의미하며 굳이 따지자면 중인 혹은 부르주아쯤 되는 포지션이다.
평민 계급은 귀족과 성직자들을 제외한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층 민중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생활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물론 평민들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에 비해 삶이 어려웠다. 다만 대다수의 인구는 농민이었을 것이고, 오늘날 전해지는 사산 왕조 시대 유물들의 높은 수준을 볼 때 공예품이나 사치품을 생산하는 장인의 수도 많았을 것이다. 실크로드 무역이 물론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지만, 지중해처럼 일찍부터 대규모 해상 무역이 발달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크테시폰 등 극소수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상이었을 것이다. 평민 외에 노예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중요성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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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를 몇 백 년 지배했고, 동로마 제국과 건곤일척이었던[24] 패권국답게 충분히 강력했다. 사산 왕조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기병 중심이었던 파르티아 군대의 양식을 계승했으므로 파르티아 군대와 유사했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적지 않았다. 우선 군대의 핵심이 카타프락토이, 혹은 클리바나리로 대표되는 중장기병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봉건 귀족과 그 가신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파르티아와 같다. 그러나 사산 왕조는 단순히 중장기병 - 경장기병으로만 구성되었던 파르티아에 비해 더욱 다양한 병종을 동원하였다. 또 완전한 기병 중심의 봉건제 군대였던 파르티아에 비해 좀더 중앙집권화된 군사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제국 최고의 전성기인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으로 정점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7세기 초 동로마와의 과도한 전쟁으로 군사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아랍 군대에게 무너지긴 했지만, 사산 왕조 군대는 수백 년간 서방의 거대한 로마 제국과 동방의 위협적인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중동의 지배자로 군림한 제국 국력의 핵심이었다.
7.1. 지휘 계통과 편제
기본적으로 군의 통수권은 "이란 총사령관"인 '''에란 스파보드'''(Eran Spahbod)가 가지고 그 휘하의 장군인 '''스파보드'''(Spahbod)들을 지휘했으며, 군정 및 평화 협상을 포함해 전쟁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황제가 대귀족 중 한 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총사령관 대신 황제가 직접 나서 전쟁을 지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던 것이 호스로 1세 시대의 군제개혁 결과 총사령관직은 없어지고, 대신 제국을 4분하여 각 영역을 담당하는 지방 사령관직을 신설했다. 이는 각각 남동/남(Nemroz), 북동/동(Xwarasan), 남서/서(Xwarwaran), 북서/북(Adurbadagan)으로 나뉜다.[25] 일반적으로 귀족(Vuzurgan, Azadan)이나 분봉왕들의 영지를 제외한 지역들은 중앙정부의 관리가 행정을 맡았지만, 일부 변경 지역에는 군사/행정의 전권을 위임받아 사실상 분봉왕과 다름없는 권한을 가진 총독들을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르즈반'''(Marzban)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대표적인 지역으로, 상황에 따라 페르시아인 마르즈반들과 아르메니아인 분봉왕들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제국 동부 지역에 임명되는 '''카나란'''(Kanarang)이라는 직책도 있었는데, 특정 지역에 임명된다는 것을 빼면 마르즈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산 왕조 군대의 정확한 편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파흘라비어 단어 중에 상/하위 부대에 관한 용어(Washt가 모여서 Drafsh가 되고, Drafsh가 모여서 Gund가 되는 식)나 천인대장(Hazarmard) 같은 용어들이 있는 것을 볼 때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갖추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도 10진법에 따른 부대 편제를 사용했으므로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사산 왕조 말기를 다룬 기록에서 "황제의 군단(Gund-i Shahanshah)"이나 "황금 창병대" 같은 부대 이름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워낙 단편적인 기록들이라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산 왕조 군대가 과연 중앙집권화된 상비군을 갖추었는가도 어려운 문제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상비군을 창설"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반대로 5~6세기 기록에는 "페르시아에는 동로마와 같은 상비군은 전혀 없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고, 이들은 양성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대부분 봉건 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은 전쟁시 샤한샤를 위해 싸우는 대신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배/세습할 수 있는 독자적 영지를 갖추고 있는 봉건 계급이었다.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 시대에 비해 훨씬 강력한 중앙정부와 관료체제를 갖추고 있긴 했지만, 군사력의 주축이 소수의 봉건 귀족 기병이라는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역할 역시 주요 대귀족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서돌궐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장군 바흐람 추빈은 호라산의 파르티아계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상비군 비슷한 것이 아예 없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사산 제국 시대에는 로마와의 국경이 이미 수백 년 동안 고착되어 강력한 요새 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쟁 시 공성과 수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따라서 요새를 지키려면 상당한 규모의 수비대가 있어야 하는데, 소수의 봉건 귀족들이 그 같은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또 사산제국은 파르티아에 비해 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세적이었고[26] , 수년 이상 걸리는 전쟁도 소화해 낼 수 있었으므로 어쨌든 파르티아에 비해서는 훨씬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근위대 비슷한 것으로 자예단(Zhayedan 혹은 Zhavedan)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아타나토이 문서 참조).
대체적으로 봉건 귀족이 군사력의 주축이었던 것이 기존의 추세라면,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시대의 개혁으로 인해 그 추세에 변화가 일게 되었다. 앞서 누차 설명한 대로, 이 시대 개혁의 목표는 중앙집권의 강화였다. 군 지휘체계에서 단일 총사령관직을 없애고 4곳의 지방 사령관직으로 나눈 것 역시 황제 이외의 인물에 지나치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스로 1세가 군사 부문의 개혁에서 역점을 둔 것은 독자 영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무장하는 군사력을 황실과 관료제가 봉급과 장비를 통제할 수 있는 상비군 성격의 군사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을 통해 육성한 데흐건 계급이 행정적 측면에서는 황실의 지방 통제의 최말단이 되고, 군사적으로는 중앙정부 직속 군사력의 중핵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달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분석하는 바가 다르지만, 최소한 개혁 이전에 비해서 군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7.2. 기병(Sava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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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군대의 주력이 중장기병이었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사산 왕조의 중장기병들은 시대에 따른 갑옷, 투구, 무기, 마구나 기타 장비들의 변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시대의 중장기병 형태를 그대로 계승했다. 근거리에서는 양손으로 잡는 장창을 사용해 돌격하고, 원거리에서는 활을 이용한 견제를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칼과 도끼, 메이스, 단검, 투창, 다트 등 다양한 보조 무기를 사용했다. 마갑을 갖춘 카타프락토이들이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지만 그 수는 적었고, 아마 마갑 없이 기수만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Kaveh Farrokh 박사는 그의 책 "Sassanian Elite Cavalry"에서 시대에 따른 기병 무장 양식의 차이에 주목하여 사산 왕조 시대 중장기병들은 크게 3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우선 왕조 초기에는 로마와 주로 대립하면서 비싸고 불편한 파르티아식 판갑옷 대신 사슬갑옷을 도입했고, 마갑도 없거나 천으로 된 것들이 주류였다.
이것이 점차 중장화되어, 4세기경에 이르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묘사대로 "눈구멍과 콧구멍을 제외한 전신을 철갑으로 가린" 식의 초중장기병이 나타났다.
그러나 4~5세기 이후 다수의 경장 궁기병을 운용하는 에프탈, 튀르크 등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오자 소수의 둔중한 중장기병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무장을 좀 더 가볍게 하고, 대신 숫자를 늘린 중장기병 운용이 나타났다. 또 칼의 패용법이나 활의 종류, 등자의 사용 등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근위 기병대인 '''푸쉬티그반'''(Pushtigban)과 그 예하 부대인 '''기안-아비스파르'''(Gyan-Avspar) 또한 중장기병이였는데. 사바란(기병) 중에서도 1,000명의 최정예 병사들만을 차출해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안-아비스파르는 1,000명의 병사 중에서도 더욱 최정예만을 골라 구성되었는데, 이름의 뜻[27] 에 걸맞는 열성적인 전투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의 동방 원정 당시 무방비상태였던 율리아누스에게 창을 꽃아 죽인 게 푸쉬티그반 소속 기병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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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군과 맞붙는 초창기 사산 왕조 군대를 묘사한 암벽 부조. 당시 귀족들의 기마 전투 양식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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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서부 케르만샤 주의 타케 보스탄에 남아있는 사산 왕조 후기의 부조. 완전무장한 당시 중장기병의 형태를 알 수 있다.
경무장 궁기병 역시 중요한 전력으로 활용되었으나[28] , 정주 문명의 역사가 오래된 사산 제국은 더 이상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와 카르헤 전투 시절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처럼 대규모의 경무장 궁기병을 자체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이란 본토의 군대는 거의 소수 귀족 전사 계급의 중장기병에 집중되었고, 경기병 전력은 주로 동맹, 속국 동원, 용병의 형태로 보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샤푸르 2세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유목민 집단인 히온인(Xionites)의 왕 그룸바테스와 전쟁을 벌여 그를 복속시킨 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동원한 경우가 있다.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낙타 기병을 동원한 경우가 있지만, 사산 제국의 경우 낙타가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와 반대로 사산 제국의 가장 큰 적이던 동로마는 낙타 기병대를 운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7.3. 보병(Pai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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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가 중장기병을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경무장 궁기병을 동원했다면, 사산 왕조는 기병의 부족을 만회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다수의 보병을 동원했다. 보병의 지휘관은 '''파야간 사라르'''(Payyagan Salar)로 불렸다. 보병은 다시 궁병과 창병, 기타 용병들로 나뉜다. 대다수의 창병들은 임시로 징집된 농민이나 하층민으로써, 가죽 모자나 조잡한 투구, 고리버들이나 나무, 가죽 따위로 만든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 외에는 별다른 방어구가 없었다. 이들은 주로 진지 수비나 공사, 기병대의 보조나 시중, 전장 정리 등 각종 잡일에 동원되었다. 물론 필요할 경우 전면전에 나서기도 했지만 화살받이 이상의 역할이 기대되지는 않았다. 단 공성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보병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대오를 갖추어 이동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보병들도 어느 정도의 훈련은 받은 것 같다. 궁병들의 경우 최소한 활은 쏠 줄 알아야 하니 창병들보다는 취급이 나았던 것으로 보인다. <탁티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궁병들은 활의 정확한 조준보다는 빠른 연사능력을 더 중시했다.
로마와 비슷한 중장보병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란 역시 근접전을 위한 보병들을 자주 동원했지만, 이는 상술한 경무장 궁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농민 징집병이나 용병 혹은 동맹국, 속국 병력들이었다. 이외에도 데일람(카스피 해 연안의 이란 북부 산악지역), 쿠르드, 소그드, 아르메니아, 아랍 등에서 보병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중 특히 데일람 병사들이 투창과 칼을 잘 쓰기로 유명했으며 이후 이슬람 시대에도 용병으로 활약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철갑을 입은 기병과 보병"이라거나 "보병들은 검투사(murmillo)들처럼 차려입었고..." 등 보병들이 갑옷을 입고 있는 듯한 묘사들이 있는데, 더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이 병사들의 정확한 정체나 성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른 기록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성벽 위에 늘어서 있었다는 묘사도 있으나, 이 정도로 중무장한 이들은 보병이 아니라 수성을 돕기 위해 말을 버리고 성벽에 올라온 기병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7.4. 기타 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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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다시피 수백 년 동안 고착된 로마-이란 간 국경지대에는 강력한 요새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거점 도시들도 성벽으로 방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전쟁시 공성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사산 왕조는 로마 못지않은 다양한 공성 무기와 공성 기술을 발전시켰다. 공성전에 별 관심이 없던 파르티아와 달리 당장 시조인 아르다시르 1세부터 로마식 공성 장비를 도입했다는 설명이 있다. 공성 무기를 이용한 공격 외에도 대규모의 땅굴 파기 혹은 토산 쌓기도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로 징집된 보병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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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 군대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으로는 코끼리를 전쟁에 적극 동원했다는 점이 있다.[29] 파르티아는 물론 사산 왕조 전과 후를 통틀어 이란 지역의 국가이면서 전투 코끼리를 적극적으로 동원한 나라는 셀레우코스 왕조밖에 없다. 이란 지역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기 때문에 코끼리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수입되었으며, 위에 나무로 된 망루를 올리고 2~3명의 궁병이 탔다. 셀레우코스 시대와 달리 코끼리에 따로 갑옷을 입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코끼리에 갑옷을 입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산조를 끝으로 중동에서는 더이상 전투 코끼리가 동원되지 않았다.
해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란이 당시 이란 본토와 페르시아 만을 끼고 마주보는 아라비아 반도 북부를 지배했고, 6세기경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예멘까지 정복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해군 활동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양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반면 제국 서부의 경우 지중해로 가는 길이 동로마에 의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에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을 건너다니는 배들 말고는 해군 비슷한 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7세기 초 동로마를 완전히 코너로 몰아넣었을 때,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위해 임시로 배를 만들었지만 동로마 해군의 공격에 패하면서 상륙에 실패하게 된다.
그밖에 사산 왕조 군사들의 복식을 현대에 와서 재현하거나 복원한 그림들을 보고 싶다면, 밑의 링크를 참조할 것. #
8. 역대 샤한샤
재미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6, 7, 8, 10대 샤한샤의 행적은 조선 6~9대 왕의 행적과 유사하다는 점이 있다. 또 하나는 '''호르미즈드라는 이름을 가진 샤한샤(왕중왕, 황제)치고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점'''인데, 재위 기간이 짧거나 무능하거나 최후가 비참했다.
9. 언어별 명칭
10. 둘러보기
[1] 탁한 파란색이 평상시 영역이고, 중간 파란색은 로마와의 분쟁지역이며 옅은 파란색은 호스로 1세 ~ 호스로 2세 시대에 일시적으로 차지한 영역이다.[2] 페르시아어로는 Derafsh Kaviani나 Darafsh Kaviani라고 하며, 대장장이 카웨(Kaweh)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이란 신화에서 영웅 카웨가 사악한 뱀 왕 자하크의 폭정을 무너뜨릴 때 내걸었으며, 카웨가 새로운 왕이 된 뒤로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는 전설 속의 깃발이다. 사산 왕조 말엽에 왕(황제)의 군대를 표시하는 깃발로 쓰였는데, 사산 왕조를 대표할 만한 다른 문양이나 상징물이 없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대표 상징으로 여겨진다.[3] 아람어(메소포타미아 지역 공용어 겸 행정 언어), 파르티아어(4세기 이전 귀족층), 코이네 그리스어(4세기 이전 귀족층 및 로마인 포로들), 시리아어(메소포타미아 서부), 엘람어(메소포타미아 동부), 이란계 지역 언어들(아제르바이잔, 마잔다란, 호라산, 시스탄, 소그드, 호라즘, 발흐, 토하리스탄 등), 캅카스 지역 언어들, 아라비아 지역 언어들, 라틴어(로마인 포로들) 등[4] 기독교(주로 네스토리우스파),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변종 분파들(마니교, 마즈다크교, 미트라교 등), 불교, 힌두교,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등[5] 때문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라고도 부르며 현 역사 교과서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라고 표기돼 있어 학생들을 꽤나 골치 아프게 한다. 확실히 페르시아, 파르티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라며 연달아 비슷한 이름이 나열되어 있기에...[6] 실제로 사산 제국 이후 서아시아 지역을 차지한 이슬람 제국은 사산의 문화와 과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라틴어가 학술 용어로 정착했던 것처럼 이슬람권에서 페르시아어를 안다는 것은 지식인의 증표처럼 받아들여졌다.[7]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되어 로마군에게 파괴되었고 황후와 후궁들, 자손들이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8] 왜냐면 아랍 부족들은 인구가 적다보니 굳이 대규모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9] 물론 동로마와 대등한 정도는 아니었다.[10] 교단을 그대로 놔둔다면 귀족들처럼 황실을 쥐고 흔들려할것이 분명하기에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11] 성을 보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900년대에 조지아 왕위에 올라서 19세기 러시아에 흡수되기까지 왕위를 지켰고, 러시아 흡수 이후에도 표트르 바그라티온 등의 명장을 배출한 그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이 맞는다. 동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세력에 러시아까지 왔다가는 풍파속에서도 1500년 이상 버틴 실로 무지막지한 명문가다![12] 왜냐면 군대의 대부분을 동로마와의 전쟁에 투입했으니까.[13] 이런 상황은 사산 가문이 전대의 아르사케스 가문을 쳐부술 때, 그리고 더 나아가면 그 파르티아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무너뜨릴 때와 상당히 유사하다. 국가 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패권자에 충성할 뿐인 귀족들의 묶음인 중동 제국의 특성상 패권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약해지면 단합하기보다는 간을 보다가 새로운 패권자에게 빌붙는 식의 역사가 똑같이 반복된 셈.[14] 638년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켰을 때, 노획한 은화의 양은 무려 90억 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산 왕조가 누렸던 경제적 풍요가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51쪽[15] 호스로 2세 시기 동로마(비잔티움)의 영토를 병합했을 때에는 2500~3000만 정도. 물론 동로마의 반격으로 다시 영토를 빼앗기면서 오래가지 못했다.[16] 통합 로마제국은 인구 5600만이고 사산조와 싸울때의 동로마 제국은 최전성기로 인구가 2600만이었다. 한마디로 7배, 3배가 넘는 강적들과 싸웠던 것.[17] 이는 이란 땅이 척박하여 인구 부양력이 낮다보니 근대까지 인구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를 제외한 이란 지역은 몽골의 대학살 이후에는 인구가 250만까지 추락했는데 원래 이란계 민족이 주로 살던 호라산(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일대) 주 사용 언어가 이란계에서 튀르크계 언어로 바뀔 정도였다. 근대 왕조인 사파비 왕조 때도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농경지가 상당부분 황폐화되고 이후 목초지로만 활용되는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해 인구가 고작 500만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란은 1920년대에 와서야 인구가 천만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에 들어 8천만의 인구로 폭증하게 된 것은 오일머니 빨로 때운 인프라를 확충했기에 가능했다. 이는 이란뿐만 아니라 다른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마찬가지다.[18] 현재도 중동과 이란의 인구 격차는 여전한데, 아랍 국가들 전체의 인구가 4억 2천만이며 터키의 인구만해도 이란과 비슷한 8000만이다. 다만 중동은 종파, 민족, 국가별로 분열이 심하지만 이란은 기본적으로 이란인을 중심으로 단결이 잘 된편.[19]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인구 4천만에 로마제국을 우습게 보는 초강대국이라고 썼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 사산조는 국력에서 로마 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였기 때문에 오히려 '''로마가 사산조를 침공하고 압박하는 정세였다.''' 사산조는 파르티아처럼 동로마와 싸울 때는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했다. 로마가 사산조를 상대로 어지간히 애먹은 이유는 국력보다 보급 문제와 지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사산조의 수도를 두 번이나 파괴했다. 하지만 로마가 동서 분리된 후에는 사산 왕조가 동로마에 대해 호각 이상의 전적을 유지했다.[20] 현재도 이란의 인구분포는 사산조 시절과 비슷하다.[21] 다만 이들은 지중해 동부 대부분 지역과 트라키아 일대가 한때는 페르시아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다.[22]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만 해도 페르시아인은 소수에 불과하고 인구의 대부분이 비페르시아인이었다. 현대의 이란이 이란계가 국가에서 다수가 될수 있었던 것도 이란 내의 비페르시아 이란계 종족들이 시대를 거쳐오면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23]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보다 더 컸던 역사적 아르메니아(터키의 동부지역 대부분 포함)의 지역명 중 바스푸라칸(Vaspurakan)이 있는데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 이곳은 오늘날의 터키 동쪽 끝의 반 호수와 그 주변지역이다.[24] 통일(고대) 로마 시절에는 국력의 한계로 꽤 밀렸다. 하지만 로마는 한 명이 다스리기에는 너무 넓다는 게 수많은 황제의 치세를 통해 증명되어 여러 명이 합동 분할 통치를 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갔는데 그럼 또 그 자신들끼리 싸우게 되고 그럴 때는 대외 공세는 신경도 못 썼기에, 통일 로마의 국력이 그대로 투사된 적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는 세번이나 수도 혹은 수도 근처까지 깊게 털렸다.[25] 북방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불길한 방위이기 때문에 방위명이 아니라 지명인 아두르바다간을 썼다.[26] 물론 나중에는 로마의 반격으로 오히려 역관광당해 페르시아의 피해가 심각해져서 더이상의 공세를 못하고 화친을 맺는다.[27] 중세 페르시아어로 '''삶을 바친자/희생자'''라는 뜻인데, 이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돌격의 최전방에서 적에게 죽든 아군에 밀려 죽든 미친듯이 싸우던 자들'''인 것으로 보인다.[28] 사산조 기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29] 로마와의 전쟁 때는 코끼리가 700마리 정도 동원되었다고 한다.[30] 중국 남북조시대 역사서 위서(魏書) 등에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