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훈

 

[image]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당시 촬영된 사진
성명
박광훈(朴光勳)
본관
밀양 박씨[1]
생몰
1882년 7월 11일 ~ 1938년 5월 17일
출생지
강원도 영월도호부
(현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2]
사망지
강원도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광훈은 1882년 7월 11일에 영월군 양변면 금마리의 양반 가정에서 양변면장을 지낸 박수창(朴受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0일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양변면에 강연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그날을 만세시위 날짜로 정한 뒤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지자들을 포섭해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작성했다.
이후 군수가 4월 21일에 찾아오자, 그는 이용헌(李龍獻), 이병익(李炳翼), 박수영, 박재호, 박춘희(朴春喜), 김창진(金昌鎭) 등과 함께 70여 명의 장꾼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박광훈은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영월군수 석명선의 앞을 가로막고 몽둥이로 위협하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 군수 일행은 할 수 없이 수회에 걸쳐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박광훈 등이 독립만세명부에 서명을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서명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급파된 헌병대에게 총과 몽둥이로 구타당하며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공소한 끝에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938년 5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광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규정공파(糾正公派)-선곡공파(仙谷公派) 22세 '''훈(勳)''' 영(永) 준(準) 항렬. 아버지 박수창(朴受昌)은 21세 '''수(受)''' 진(鎭) 항렬.[2] 인근의 신일리·용석리·주천리와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수경·박수영·박수우·박재호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