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원(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동원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 및 독립운동 가담 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도윤공서(道尹公署) 외교과원(外交科員)을 역임했고, 1919년 2월 18일과 20일 양일간 자신의 집에서 김영학(金永學), 김정(金精), 박경철(朴敬喆), 구춘선, 고평, 이홍준(李弘俊), 이성근(李聖根), 김순문(金舜文), 강용헌(姜龍憲), 이성호(李盛浩), 박정훈(朴貞勳) 등과 함께 광복단을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또한 박동원은 이홍준, 이성근, 김영학, 김정 등과 함께 일제와의 결사투쟁을 맹세하는 의미로 혈서를 썼다. 이후 1919년 3월 13일에 발발한 용정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다가 중국관헌으로부터 면직당했고, 3월 26일에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해 4월 초, 그는 김정, 이흥삼(李興三) 등과 함께 무기 조달을 위해 아이훈 지방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1차적으로 훈춘을 거쳐 국경으로 진입하여 활동하고자 했다.1. 북간도 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힘을 다 바칠 것
2. 모든 간도 내의 단체는 머지 않아 연해주(沿海州)에서 협의, 반포할 한민족의 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시위운동을 개시할 것
3. 한민족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 안의 각 단체의 유력자는 용정(龍井)에 회집하여 독립 선언을 하여 기세를 올릴 것
1919년 5월, 박동원은 학생 5명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이동휘와 만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하순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장티푸스에 걸려버렸고 8월 25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동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