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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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구춘선(具春先)[1]
출생
1857년/1860년/1867년
출생지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풍인동#
사망
1944년 3월 20일
사망지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칭현 백초구
본관
능성 구씨[2]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
2. 생애
2.1. 가계 및 초년기
2.2. 교육 운동
2.3. 3.1 운동 참여
2.4. 대한국민회
2.5.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가계 및 초년기


구춘선은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풍인동에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가 편찬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김주용 저서 <북간도 독립운동의 파수꾼 구춘선>에 따르면, 구춘선은 185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2007년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편찬한 <순국(殉國)> 통권 198호에 따르면, 구춘선은 1867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구춘선의 후손이 편찬한 <구춘선 후손 당안자료>에 따르면 구춘선은 1860년 1월 29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정확한 생년이 언제인지는 현재까지 확실하지 않다.
구춘선의 부모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그에게는 맏형 구춘희가 있고 둘째형이나 누나도 있으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구춘선에게는 두 명의 친아들과 한 명의 양자가 있었다. 장남의 이름은 구자정(具慈鼎, 1885~1959)이며, 차남의 이름은 구자승(具慈昇, 1887~1967)이며, 양자는 맏형인 구춘희의 아들로, 이름은 구자익(具滋益, 1889~1942)이다. 또한 구자익의 처인 강성혜는 이동휘의 처조카이다.
홍상표의 저서 <간도독립운동소사>에 따르면, 구춘선은 대한제국군에 입대해 궁궐의 수문장을 맡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언제 군인을 그만둔 건지는 기록이 불확실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만주로 이주하기 몇년 전에 그만두고 한학을 수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897년경에 가족들을 데리고 북간도 연길(延吉)로 이주했는데, 그 이유는 불확실하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구춘선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 보호에 진력했다. 1905년 이범윤이 노령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구춘선은 거점을 용정촌으로 옮겼다.
1907년, 구춘선은 연길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로버트 그리어슨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후 집사 이보연과 함께 용정에 용정시교회(龍井市敎會)를 설립했고, 1913년에는 하마탕 교회의 설립을 도왔다.

2.2. 교육 운동


1907년, 구춘선은 김약연, 김영학(金永鶴), 강백규, 유찬희 등에 의해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만주 군벌이 '자치'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며 개명할 것을 요구하자, 구춘선 등은 다시 1909년 9월에 간민교육회를 설립시켰다. 구춘선은 간민교육회에서 활동하면서 북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교육운동에 참여해 1911년 이동휘가 세운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의 간사로 재직했다. 계봉우의 자서전인 <꿈 속의 꿈>에 따르면, 간사 구춘선은 씩씩하고 화기스러운 맛이 있었다고 한다.
간민교육회는 1913년 4월 만주 군벌의 승인을 받고 간민회라는 한인자치단체로 발전했다. 간민회는 연길부 국자가(局子街)에 중앙총회를 두어 법률, 교육, 교섭 등 각각의 과를 나누어 사무를 집행했고, 훈춘, 왕청, 허룽현에 지방총회를 설치한 뒤 지회를 두어 북간도 지역의 한인자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하고자 노력했다. 구춘선은 간민회의 분회장이었으며,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간미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간민교육회에서 했던 것처럼 교육 운동에 전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914년 3월 중화민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모든 지방 자치기관들을 해산시킨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간민회는 설립된 지 1년도 안되어 해산되고 말았다.

2.3. 3.1 운동 참여


1919년 2월 18~20일, 구춘선을 비롯한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 33인은 연길 하장리에서 비밀 회합을 열었다. 그들은 간도 내의 교회와 단체들이 협력해서 자주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하고 연해주에서 한족독립선언서가 공포되면 북간도의 각 단체들도 집회를 열어 만세시위를 벌이고 용정촌에서 독립 선언식을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7일, 북간도 지역에 한반도에서 3.1 운동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북간도의 민족운동가들은 다시 모여서 협의한 끝에 3월 13일에 만세 시위를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전촌에서 북간도 지역 최초의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많은 민족운동가들과 학생, 한인들이 각지에서 모인 가운데 독립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군중은 독립은 선언한 후 용정 시청을 향해 시위를 전개했다. 구춘선과 배형호(裵亨湜), 김약연, 정재관 등 북간도 일대의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은 민중, 학생, 교인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만주 군벌 장쭤린의 부하 맹부덕(孟富德) 단장의 중국 군대가 그들을 막아섰고, 시위대가 해산 명령을 듣지 않고 전진하자 맹부덕은 사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고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구춘선, 이봉우(李鳳雨) 등 5명은 대표로 나서서 맹부덕의 도리에 어긋난 짓을 비판했고, 법적으로 이 일의 부당함을 강하게 제시해 사상자의 배상금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만주 군벌은 이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 그날 밤, 독립운동가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조선독립기성회를 설립하고 간도 연길현 용정에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구춘선은 회장에 선임되었고 의사원은 30명이었다.

2.4. 대한국민회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조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독립기성회는 대한국민회로 개명되었고 구춘선은 대한국민회 회장을 맡았다. 1921년 3월 21일자 일본외무성의 기록에 따르면, 대한국민회는 본부인 총부를 하마탕에 두었고, 총부 밑에 민정기관으로 8개의 지방회와 지회 130여개를 두었다고 한다. 또한 대한국민회 총부에는 회장 구춘선과 부회장 서상용(徐相庸)을 비롯해 55명의 임원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단체로 자처하며 만주에서 임시정부의 명령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구춘선은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임시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지난 3월 13일 만세시위 때 사망한 17명의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또한 군자금을 모으려 애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전홍섭(全洪燮)[3]을 구하기 위해 대한국민회 차원에서 50원을 구제금으로 기부했다. 그리고 대한국민회에 군사조직을 두고 군대를 통한 독립운동 활동에 전념했다. 독자적인 무장단체로 활동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대한국민회 산하로 받아들이고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 역시 받아들였으며, 안무의 국민회군을 따로 조직해 다른 두 무장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편성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구춘선은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이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동안 후방에서 행정 업무를 총괄했고 1920년 7월 13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최진동에게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서북간도에 있는 대한독립군을 토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속히 그들을 도울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수행해나가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보냈다.

재연변(在延邊)대한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은 삼가 두 번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자세히 살피시고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합하(閤下)시여,충(忠)과 애(愛)는 본디 두 가지 이치가 아닙니다.그러므로 충애지사(忠愛之士)가 있어야만 충애한 사람을 아낄 줄 알게 되고, 충애지사를 만나고 난 뒤에라야 충애에 대하여 더불어 말 할 수가 있음이니,이것은 사정이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권위가 빛나고 위세가 높이 울린다고 해도 더불어 사령(辭令)을 접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제가 합하에 대하여 인정으로 말하더라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사이이고 국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중국과 한국으로 서로 다릅니다. 다만 훌륭한 분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마치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것과 같으니,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오직 합하의 충애의 마음이 하늘의 해처럼 밝으시고 의리의 기운이 서리처럼 늠름하시며, 또 저희들이 흠앙(欽仰)하는 분이 되시어 한번 뵙고 진실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 어느 하루 없었던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낮에 거리를 가로질러 가면 여러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우니,지금 시기에 이런 일은 저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합하께서도 역시 불편하실 듯하여 비록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만 감히 이렇게 글로 대신오오니 혹 나라 없는 사람의 애달픈 충정을 굽어 가련히 여겨 주실런지요?

지금 세상이 변하는 파란(波瀾)이 일어나며 풍운(風雲)이 오그라드는 때를 당하였으니, ‘도의(道義)’라고 하는 두 글자는 종이 위에 남아 잇는 헛된 글자가 되었고 강함과 권력이 서로 넘보며 저 하찮은 왜적(倭敵)이 감히 스스로를 높여 아주 무리하게 교섭을 한 것이 오래되어 버릇이 되었습니다.틈을 엿보아 단서를 빌어 움직여 이미 국제문제로 끄집어내었으니,연변의 관리들의 정세는 실로 진퇴양난에 처해 있습니다.굳이 적의 강청을 따르려 하면 우리가 수천 년 서로 입술과 이처럼 지내며 서로 지켜온 의리가 상할까 염려되고, 꾸짖어 물리치고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중국에 해가 있을 것입니다.

왜적의 일시적인 체면 때문에 군인과 경찰을 파송하여 적과 함께 행사함이 어찌 합하께서는 즐겨 들으시고 각 관리들은 즐겨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하여,급하고 어려울 때 합하와 같은 충애한 분께서 안으로 원루(寃淚)를 머금고 계심은 어찌 저와 다름이 있었겠습니까?또 왜노(倭奴)의 야심은 길가는 사람도 다 아는 바입니다.그들이 말한 만주정책이란 것은 만주를 그들 품속의 떡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한인 운동이 이미 80∼90%는 성취되었으니 한인이 독립할 날이 만주정책이 화해되는 날일 뿐만아니라 저 자질구레한 세 섬(일본을 가리킴)의 남은 목숨마저도 아득한 푸른 바다 굴에 보존할 수 없게 됨은 손바닥을 보듯 기약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세계의 시선이 모두 서구(西歐)에 집중되었는데,지금은 동양으로 옮겨졌습니다. 동양의 독일로 나란히 일컬어지던 미국과 일본의 외교가 있는 듯 없는 듯 하며, 러시아와 왜 사이에 틈이 벌어진 지도 이미 크게 벌어졌으니,중국과 한국이 왜적에 대하여 쌓인 원한과 깊은 원수가 어찌 불구대천(不俱戴天)일 뿐이겠습니까?시기로 본다면 밀접하고 친절하여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아닙니까?그렇다면 한인은 바로 중국에 왜적을 막아주는 선봉이며 만주의 보장(保障)입니다. 합하께서 처음부터 은혜를 베풀어 주심이 비록 온갖 어려움이 모인 가운데 처해있으시겠지만,하더라도 애국으로 목표를 삼아주시기를 바랍니다.나라를 사랑할 줄 안다면 또한 한인을 사랑하실 줄도 아실것입니다.

아아,장홍(萇弘)의 피가 푸른 구슬로 변했으니 형(荊)에서의 억울함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유유한 저 푸른 하늘이여,이 사람이 누구입니까?,넓고 넓은 저 우주여,위험한 가운데서 우리 한인을 후원해 주실 분은 합하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으며,중국이 아니면 어디 기댈 곳이 있겠습니까?다만 저의 말씀은 여기서 그칩니다.합하께서는 사랑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 2년(1920) 3월 모일

제연변 대한국민회장 구춘선

구춘선은 1920년 4월에도 청원서를 보내 중국 정부의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그는 연변 한인의 여러 대표자들과 함께 대중국 경고서를 중국에 보내 협조하지 않을 경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일제의 난동은 곧 진압될 것이니 속히 자신들을 도우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1920년 10월부터 간도에서 한인들을 무자비로 살해하는 간도 참변을 단행하자, 더이상 용정에 머물 수 없게 된 구춘선과 독립지사들은 러시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여러 독립단체의 대표들과 연명해 성토문을 발표했다.

기원 4254년 6월 28일 노령 흥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 중에서 러시아 병정과 싸운 결과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을 내는 일대 참극을 연출하였다. 동 대한의용대에 참가한 단체는 사할린군대, 청룡군대(靑龍軍隊), 이만군대(伊萬軍隊, 노령), 광복단, 군정서, 의군부, 도독부, 혈성대 등으로서, 동 대 참모부원은 홍범도, 안무, 서일, 조욱(曹煜), 지청천, 이용(李鏞), 채영(蔡英), 최진동(崔振東), 오하정(吳夏黙) 등 15명이었다. 그런데 노령에 거주하는 일부 한인의 자치기관인 한족회는 전대한민의회라 개칭하여 그 수뇌자인 문창범, 김하석(金夏錫), 원세훈은 자기 세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한의용대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하여 저들의 음모로 러시아 병정은 이와 같은 거동으로 나와서 이 참극을 연출하였다.


2.5. 이후의 경력


자유시 참변 후 러시아에서 만주로 건너온 구춘선은 1921년 11월 강구우, 마진 등과 함께 고려 공산당에 가입했다. 돈화현 지부에 소속되었다. 이후 그는 1921년 12월 15일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합부(總合部)라는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 그는 총합부의 부장으로 선임되었고, 부원들은 대부분 대한국민회 조직원들로 이뤄졌다. 총합부는 국내 지방으로의 진공작전, 일본 경찰관 암살, 사관학교 설립, 군자금 모집 등을 계획했다. 또한 1922년 4월 안도현 도두산(仍頭山) 부근에 사관학교를 설립해 국내에서 학식 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사관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노령에서 암살대를 모집하여 일본 경찰관을 암살하고, 무장 군인을 필두로 두만강 건너 온성과 종성 방면의 일본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할 계획을 짰으며, 일제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도록 평범한 기독교 단체로 위장했다.
구춘선은 1923년 9월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다. 당시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존속시키되 개조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그는 이동휘와 함께 개조파 진영에 가담해 임시정부 존속을 옹호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양측의 양보 없는 대립으로 인해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독립운동 세력은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통일된 조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구춘선은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칭현 백초구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4년 3월 20일 왕청현 백초구에서 사망했다. 구춘선의 유해는 현지에 매장되었다가 1999년 10월 27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구춘선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일부자료에는 具春善으로도 기록이 되어있다.[2]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함경도에 도원수파 충렬공계 집성촌이 있어서 도원수파 충렬공계로 추측된다고 《능성구씨종보》 제177호에 써져 있다.[3]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홍섭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