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직

 


朴承稷

1864년 7월 25일(음력 6월 22일) ~ 1950년 12월 20일 (향년 86세)
1. 개요
2. 일생
3. 친일행적
4. 가족 관계


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민족계 기업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두산그룹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자는 사선(士善), 호는 매헌(梅軒).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키 쇼우쇼쿠(三木承稷).

2. 일생


1864년 경기도 광주목 돌마면 이매리[1]에서 아버지 박문회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적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면서 조모 밑에서 자랐고,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7세 되던 1881년에 땅 주인 민영완이 해남군수로 부임하자 책실(비서)이 되어 공무를 보면서 행상 등을 하여 돈 3백 냥을 벌어 형 박승완에게 보냈고, 이듬해부터 송파상에서 포목행상을 시작해 사업 커리어를 시작했다. 1884년 해남으로 돌아와 형과 함께 장사를 하다가 1886년부터 단독으로 포목상을 맡아 마판상을 시작했다. 처음엔 송파장에서 직접 사서 말에 싣고 내륙을 돌며 팔다가, 그 후엔 제물포에서 수입 면직물을 사서 팔기 시작했다.
위와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1889년 한성 배오개로 사업 터전을 옮겼고, 1896년 박승직상점을 차리고 종로4가 15번지로 옮기고 일본과 영국 등지에서 수입한 직물을 팔아왔으며, 1900년 성진감리사, 1905년 중추원 의관 등 잠깐 관직에 외도했으나 1905년 김종한, 박기양, 신태휴, 김한규, 홍충현, 최인성 등과 함께 '광장주식회사' 설립에 동참해 근대 상설시장 '광장시장'을 설립코자 했다. 1906년 창신사, 1907년 공익사 등 합명회사 창설에 참여하는 한편, 1906년 한성상공회의소 설립에도 참여했다. 1910년엔 공익사 일부 지분을 일본 이토추합명회사에게 넘긴 후 1914년 조-일 합자회사로 개편했고, 1915년 '박가분 본포'를 세우고 연분 화장품 '박가분'을 만들어 1937년까지 생산했다.
1917년 동대문시장에 '공신상회'를 세워 곡물 판매 및 정미업을 개시했고, 1925년 박승직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해서 사세 확장을 개시했다. 본업 외에도 1920년 동양염직 취체역(이사), 1921년 경성곡물신탁 감사역, 1931년 중앙일보사 취체역 등을 각각 맡았고, 1933년 쇼와기린맥주 설립 때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부 주식을 지녔다. 1934년 경성상공협회 회장으로도 일했다. 심지어 1919년 고종 국장과 1926년 순종 국장 때 상인봉도단으로 참여했고, 1927년 월남 이상재 사회장 때 준비위원이기도 했다. 1940년 창씨개명 후 성을 따서 '미키(三木)상사'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1945년 8.15 해방 후 박승직상점을 닫았고, 쇼와기린맥주 자치위원회로부터 지배인 제의도 받았으나 고령으로 인해 장남 박두병에게 지배인 자리를 맡겼고,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이듬해 박승직상점을 '두산상회'로 바꾼 후 1950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에서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친일행적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 및 위원이 되면서 처음으로 친일 행적을 보였고, '미키 쇼우스쿠(三木承稷)'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1922년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 1924년 친일단체 동민회 평의원,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도 참여했다. 일제 말기인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을 비롯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징용이나 위안부 모집을 독려했고, 1941년 경성부 총력과에서 해군 국방헌금 1만 원을 내는 등 친일행각이 명백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4.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