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1. 개요
2. 배경
3. 진행
4. 목적
4.1. 대내외에 밝힌 목적
4.2. 실제 목적
5.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6.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7. 창씨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8. 사례
9. 조선인들의 대응
10.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11. 유사 사례
12. 한국
13. 번역상의 표기
14. 참고 문헌


1. 개요


(소시카이메이/そうしかいめ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을 말한다. 교과서에서는 이해가 쉽도록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하나 역사학계에서는 창씨개명이라 부르며 이것이 정책의 본질을 더욱 잘 나타내는 명칭이다.
한국의 성명(''''''名)을 일본식 시메이(''''''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創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에서 보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조했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다.
상당수의 현대 한국인과 중국인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래 성(姓)과 씨(氏)는 다른 개념이다. 춘추좌전에 "천자제후를 봉할 때 그 조상의 근원을 보고 성으로 삼고 그 봉토를 보고 씨로 삼는다." 하는 내용이 있다. 즉 성이란 출신 종족명이고 씨란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조상이 영유했던 분봉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중국 제나라의 시조인 강태공 여상은 성과 씨가 다른데, 성은 강이요 씨는 여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사실상 성씨 개념이 통합되었으나, 일본의 경우 은 오로지 덴노가 하사하는 것이다. 대부분 일본인은 성이 없이 오로지 씨만 있다. 일본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성은 후지와라, 다이라, 미나모토, 다치바나 등으로 대부분 고대 일본의 귀족에서 파생됐다. 물론 성과 씨가 같을 수 있으나 일본에서도 고대 중국에서처럼 성과 씨가 다른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우리에게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은 미나모토(후에 하사받음)이며 씨는 도쿠가와(미나모토노 도쿠가와 아손 이에야스)이다. 이처럼 일본의 귀족 및 무사계급은 원래 앞에서 언급한 4대 성씨인 후지와라나 미나모토 등 성을 가진 일족의 후손들이 각자가 소유한 장원이나 저택의 지명을 따서 각각 씨명을 정하는 식으로 성과 씨를 구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가 다케다 가문은 가문의 시조가 소유한 장원이 위치한 곳이 히타치노쿠니에 위치했던 다케다 장(竹田莊)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다케다 씨를 자처했다.) 그러한 성과 씨의 차이 때문에 일본인은 예컨대 처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사위가 씨를 바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민감하다. 한국과 달리 씨를 바꾼다는 것에 조상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2.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 민법(明治民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廢姓創氏)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 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고 우메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해졌다.
일제의 조선 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 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물론 이 계획을 아주 포기하진 않아서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지만 얼마 후 3.1 운동(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다. 이후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2안을 수립하는 등 재차 창씨개명을 시도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매우 많았다. 물론 도덕적, 인도적인 관점에서 반발한 것은 절대 아니고,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 즉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가 될 수 있다는 데에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1] 무엇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순수 일본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다.[2]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였다. 초대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 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조차도 예외는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 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내선일체 정책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토베 이나조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필두로 조선의 점진적 동화를 주창하는 입장 또한 지속되어 왔다. 이들은 기존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악영향이 됨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우러러보게 한 다음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2대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이 실정적으로 채택했으니,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 내에서는 식민지에게도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 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다.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 지배 방식인 연합주의를 일본 나름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프랑스도 열강 진입 초기에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으나 격렬한 반발로 통치가 더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동화와 거리를 두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 즉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점진적 동화 정책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되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말만 그랬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본토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해 주려는 노력도, 생각도 없었고 단지 식민 통치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3]

3.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궁성요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보다 강경책을 펼쳐 조선 내부의 독립 운동 세력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을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일본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 조선, 중국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조선인과 대만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그 증거로 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적극 사용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 수양동우회 사건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을 체포해, 고문을 거듭하며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하고 구속된 조선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를 강할 바에 차라리 자신들을 죽이라고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치안을 담당하는 곳)은 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대규모 폭동(大規模な暴動)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4]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으며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성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戶主)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5]을 찾아볼 수도 있다.[6]

4. 목적



4.1. 대내외에 밝힌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 조선인들이 원해서.
  • 조선의 성씨는 250여 종밖에 안 되는데 이는 10만여 종에 이르는 성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처럼 성씨가 다양해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4.2. 실제 목적


한반도를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7]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파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본국 거주 주민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 게다가 성씨를 만들 때도 고대 일본 귀족 성씨인 원평등귤[8]은 쓰지 못하게 했다. 일본 무사계급의 유명한 성씨들(도쿠가와 등)로 창씨개명하는 것도 불가했고, 조선인들은 조선인임을 알 수 있는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게 시켰다.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락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 우익들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9] 그리고 스페인어가 완전히 공용어로 자리잡고 스페인식 이름이 보편화된 라틴아메리카의 옛 스페인 식민지들조차 스페인 본국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나머지 결국 대거 독립한 역사를 생각하면, 창씨개명에 의해 한민족의 일본화가 완료되었다 해도 한반도에는 어떤 식으로든 독립을 추구하는 이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발상은 실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5.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창씨개명을 준비해서 건국기원절[10]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서 대만과 동시에 6개월 시한을 주고 각자 스스로 창씨하라고 집중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의 수속 절차를 매우 편리하게 해 주었고 비용도 깎아 주었다.
미나미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이 열화와 같이 호응하며 엄청나게 신청하리라 예상하고 총독부에서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그날 하루 전국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은 고작 48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에 총독부는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갈구면서 창씨를 유도했지만 2월 말까지 창씨 비율은 겨우 0.26%였고 두 달이 지나도 1.07%에 그쳤다.
전국의 유림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 시한의 절반이 지난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에 불과했다. 시도별로는 경상북도[11]가 22.8%로 가장 높았고 전라북도[12]가 1.8%로 가장 낮았다.[13] 7.6%라는 엄청난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여서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당시에는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이름을 부르면 서류에 적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게 된다. 당시 신문들은 "xx군 oo% 달성!"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는 등,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했다.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형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어느 친일파는 창씨개명이 극히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였지만 자신은 개명하지 않았으니 친일파가 아니라고 우기다가 반민특위의 반박을 받고 데꿀멍하기도 했다. 또 홍사익처럼 일본군 장성이 되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인물 역시 있다.
어느 친일파는 거액을 총독부에 헌납하고 악랄하게 사업을 하여 악명이 높았는데 창씨개명에는 죽어라 반발했다. '''창씨개명을 하느니 그냥 죽겠다'''고 대들 정도여서 창씨개명을 관리하는 일본 관리들이 그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동안 친일파로 잘 활동하던 사람이 이랬으니 일본 관리들 입장에선 정말로 미치고 황당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런 설득에도 그는 '''성과 이름만큼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버티다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즉 (忠) 의 문제임과 동시에 (孝)의 문제였고,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14]
그러나 창씨개명에 극렬하게 반대하던 당시의 기성세대와 달리,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현상도 존재하였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루에, 하루코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이 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 생각해보면, 일제시대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창씨개명의 피해자들[15]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2차대전에서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6.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



1
(金)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2
(李)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元、やまもと), 리무라(李村、りむら),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3
(朴)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키(高木、たかき)
4
(崔)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사이(佐井、さい)
5
(鄭)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6
(姜)
시나노(神農、しなの),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7
(趙)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8
(尹)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9
(張)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10
(林)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11
(韓)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12
(吳)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13
(徐)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14
(申)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15
(權)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16
(黃)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17
(安)
야스다(安田、やすだ),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
18
(宋)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하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19
(全)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山、きくはら)
20
(洪)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21
(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22
(高)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23
(文)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24
(梁)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25
(孫)
손(孫、そん)[비개명],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26
(裵)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27
(曺)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28
(白)
시로카와(白川、しろがわ),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29
(劉)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30
(許)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31
(南)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32
(沈)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33
(盧)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34
(丁)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35
(河)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36
(郭)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37
(成)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38
(車)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39
(朱)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노(寧野、ねいの)
40
(禹)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41
(具)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42
(辛)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43
(任)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44
(田)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45
(閔)
민바라(閔原、みんば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46
(兪)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하라(松原、まつはら), 기젠(杞前、きぜん)
47
류(柳)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48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49
(陳)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나이(陳內、ちんない),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50
(池)
이케다(池田、いけだ)
51
(嚴)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52
(蔡)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53
(元)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54
(千)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55
(方)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56
(孔)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57
(康)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58
(玄)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59
(咸)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60
(卞)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61
(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62
(楊)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63
(邊)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64
(呂)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65
(秋)
야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66
(魯)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67
(都)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68
(蘇)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69
(愼)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70
(石)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71
(宣)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72
(薛)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73
(馬)
키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74
(吉)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75
(周)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76
(延)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山本、なかもと)
77
(房)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78
(魏)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79
(表)
오모테다(表田、おもて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80
(明)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81
(奇)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82
(潘)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83
(羅)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84
(王)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5
(琴)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86
(玉)
오하라(大原、おおはら)
87
(陸)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
88
(印)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89
(孟)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90
(諸)
에가와(穎川、えがわ)
91
(牟)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92
(蔣)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国元、くにもと)
93
남궁(南宮)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94
(卓)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95
(鞠)
아오야마(青山、あおやま), 아오다(青田、あおた)
96
(余)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97
(秦)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98
(魚)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99
(殷)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100
(片)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7. 창씨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1940년 창씨개명 제정 이후부터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거부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내렸다. 저 아래의 조치를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법도 없고 직장도 없어도 살 수 있는 강자 혹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용자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창씨개명을 안 하면 월급을 주지 말든지 깎아버리든지 하는 것이 회사 단위의 의무였을 정도니 자발적이였다는 주장은 걸러듣는 것이 좋다.
  • 직장/노무
    • 조선인 중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이유불문하고 즉시 해고한다. 다만 창씨개명에 참여하면 복직을 할 수 있다.
    •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 학교/교육
    • 조선인 학생 중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어긴 교장 및 교직원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 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제적 또는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는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 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 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 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 대상으로 올린다.
  • 교통/수송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처리한다.
  • 기타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 사무에서도 불허 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식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 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감시) 대상으로 선행한다.
    •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 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로 도항할 수 없다.
빠스껫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을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16]

8. 사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안동 권씨(安東權)[17]라서 안도(安東), (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岡'''郡) 출신이라 오카무라('''岡'''村), 하동(河東) 정씨라서 가와히가시 혹은 가와토(河東)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다).[18][19] 고령 박씨다카기(高木)의 경우에는 박(朴)의 목()자와 고령 박씨의 고()자를 따서 만들었다. 심재설[20]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青木)로 창씨개명하였다.
좀 더 나아가서 (南)씨, (柳)씨, (林)씨, (桂)씨, (吳)씨는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미나미(南), 야나기(柳), 하야시(林), 가쓰라(桂), 구레(吳) 씨가 일본에 있기 때문에 안 해도 알아보지는 못했다는 듯.[21] 오히려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당시에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대한민국이 문화훈장을 추서했을 정도)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류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니 조선인으로 인신공격 당한 일도 있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22]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에선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의 경우,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남궁(南宮)씨의 경우에는 성이 두 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23]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24]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다만 다른 2글자 성은 일본어로 읽었을 때 다소 위화감이 있다고 생각한 경우 본관 등을 따서 창씨개명을 하기도 했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25] 그러나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전주 이씨의 경우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26]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약방'이었다.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다), (야마), (하라), (가와), (무라), (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 당시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코)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오), (로), (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27].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의 경우에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 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인인 자기 부인을 손씨로 바꾸어서[28]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9. 조선인들의 대응


한편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역관광을 꾀했다. 하나같이 오늘날에 보아도 신 들린 풍자와 재치가 있는 이름들이다. 조상님들의 해학과 풍자를 엿볼 수 있는 사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이름들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실려 있다.
  • '이누쿠소 구라에(犬糞倉衛, 견분창위)', 개똥이나 처먹어라라는 뜻이다.[29] 물론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 '이누코 구마소(犬子熊孫, 견자웅손)', 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다는 뜻. 역시 퇴짜를 맞았다. 다만 일본에도 비슷한 뜻인 이누카이(犬養) 씨는 있다.
  • 이름이 '전병하(田炳夏)'인 한 농부는 자신의 이름에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덴노 헤이카. 즉,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천황 폐하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天皇陛下는 てんのうへいか(텐노 헤이카)이고 田農炳夏는 でんのうへいか(덴노 헤이카)로, 청음과 탁음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식 말장난인 고로아와세에서는 청탁음이 무시되므로 매맞을 일이었다.
  • 어떤 고등학생은 창씨개명 강요에 반항하는 뜻에서 쇼와 덴노의 황태자 책봉 이전 칭호와 이름을 합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라고 개명을 하려 했다가 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우연치 않게도 쇼와 덴노가 황태자 책봉 전에 쓴 어칭호 미치노미야가 조선어로 미친놈이야와 비슷하여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 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비아냥거리는 뜻도 가질 수 있다.
  • 조선총독부로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좋냐는 엽서가 날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전자는 천황 집안 다 죽인다는 뜻의 天皇族 皆殺에 인명에 쓰이는 (로)를 붙인 것이고, 후자는 쇼와 망해라라는 뜻인 昭和亡에다가 장남의 이름에 쓰이는 太郞(다로)를 붙인 것이다.
  •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실시한 총독의 이름이 '미나미 지로(南次郎)'인 것을 보고, '내가 총독보다 형님이구만'이라는 뜻으로 '미나미 다로'(南太郞)로 창씨개명했다. 물론 처음엔 넘겼다가 뒤늦게 알아차린 총독부는 퇴짜를 놓는다. 일본에서 太郞(타로)와 次郞(지로)는 각각 장남과 차남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 당시 유명한 만담가인 신불출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고 지었는데, 이는 畜生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축생이다. 한국어에서는 그냥 짐승이라는 뜻이지만, 일본어에서는 "씨발, 개자식, 좆 같다" 등의 욕으로 사용한다. 당시에는 세로쓰기가 더 흔했으므로 이에 맞춘 고품격 개드립이었고 이를 늦게 알아차린 총독부에선 역시 퇴짜를 놓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신불출이 개그 소재로 창씨개명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34초부터) 공연 후 빡쳐서 찾아온 미와 경부는 덤.
  • 역시 신불출의 이야기. 첫 번째 개명인 구로다 규이치가 퇴짜 맞은 후에 두 번째로 이름을 江原野原(강원야원)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 즉 추임새인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든 것이며 이 역시 일본을 디스하는 의미이다.
  • 한국어 위키백과사례를 보면, 장난으로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 내지는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이라고 지은 사례도 있었다. 이 경우는 일단 별 문제는 없는(?) 개명이라 퇴짜 맞았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한 마을 전체가 짜고 마을 사람 전원이 같은 성과 같은 이름으로 통일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성과 이름을 통일시켜버리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세 징수나 행정 절차상 귀찮은 일이 많아지므로(...)
  • 네이버웹툰 조선왕조실톡 312화에서도 창씨개명을 강요당한 조선인들의 재치담긴 이름을 소개했다.

10.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친일파인 것은 아니다. 1941년 기준,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당시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때문에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이 당시 미성년자라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던 입장의 사람[30]도 상당수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사람은 많다. 대개가 일본인이나 친일파로 위장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경우이며, 위에서 보듯이 창씨개명을 지시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욕설로 창씨명을 만들기도 했다.
반대로 창씨개명의 자발성을 홍보하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역시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 홍사익이 있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원리와 상관없는 내용은 주석 처리 바람.
개명된 이름은 모두 리다이렉트 처리 바람.
  • 강대련 - 이하라 가오루(渭原螢)
  • 강덕상 - 시나노 사토루(信濃智)
  • 강만길 - 교다 만키치(姜田萬吉): 강/만길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고은 -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 구용서 -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 구에 原을 붙여 창씨했다.
  • 권상로 - 안도 소로(安東相老): 본관인 '안동'을 따서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상로'를 그대로 사용.
  • 김대중 - 도요타 다이주(豊田大中): 김해 김씨인 데다 흔한 김씨들의 창씨 이름과는 다른 '도요타'를 사용한 것이 다소 특이하다.[31]
  • 김동인 - 곤도 후미히토(金東文仁): 김동/인으로 분리하여 '김동'으로 창씨한 다음, '인' 앞에는 문학을 뜻하는 文을 넣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한자는 같지만 金이 빠진 東文仁이라는 기록도 발견되기 때문에 곤도가 아니라 히가시(東), 혹은 가네히가시(金東)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김동환 - 시로야마 아오키(白山靑樹)[32]
  • 김문집 -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 대구에서 나서 일본 에도에서 공부하고 서울 용산구에 살았다는 뜻을 담아 창씨했다.
  • 김석범 - 가네야마 쇼(金山照)
  • 김석원 -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 김/석원으로 이름을 분리한 다음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성근 -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 재일교포 출신[33].
  • 김영덕 -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성씨인 金에 본관인 언양의 彦을 넣어 창씨했다. 재일교포 출신.
  • 김영삼 - 가네무라 코스케(金村康右): 성씨인 金에, 흔한 일본식 성씨의 접미사인 村을 합성한 창씨. 가네다, 가네야마 등과 함께 김 씨들이 흔히 사용한 창씨다.
  • 김재규 - 가네모토 겐이치(金本元一): 가네모토 역시 당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이다.
  • 김정렬 - 가가와 사다오(香川貞雄): 이름인 사다오는 원래 이름자인 정렬에서 따 온 듯.
  • 김정렴 - 다마이 마사토(玉井正人)
  • 김종원- 가나야마 소모토(金山宗元)
  • 김종필 - 가네무라 슌에이(金村俊英)[34]: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김 씨들의 흔한 창씨명.
  • 김활란 -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 '활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덕술 -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한자 鴻에는 기러기라는 뜻도 있지만 넓다는 뜻도 있어서 히로라고 읽은 것이다.
  • 리덩후이(이등휘) -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 문명기 -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朗): 문명/기로 분리한 뒤, 琦에 일본식 이름인 一朗를 붙여 창씨했다.
  • 박남규 - 오토모 사네오미(大朝實臣): 일본 제국의 진짜 신하라는 뜻을 담아 창씨했다.
  • 박대륜 - 샤쿠무네 다이린(釋宗大輪): 석가모니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아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대륜을 그대로 사용.
  • 박승직 - 미키 쇼우쇼쿠(三木承稷)
  • 박정희 -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본관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따고, 朴에서 木을 따 창씨하였다. 고령 박씨들의 흔한 창씨법.[35]
  • 박중양 -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중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창화 -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 '창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정자 -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두진 - 시라카와 미노루(白川実): 원래의 성씨에 川을 붙여 창씨했다.
  • 백석 -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 이름 '기코'는 백석 시인의 본명 '기행'을 그대로 썼다. 시라무라는 본래의 성씨인 白에, 일본식 성씨인 村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36]
  • 백선엽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대장 이름과 같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요시노리가 당대의 유명인사였다는 점과 창씨개명 시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시라카와는 앞서 백석 시인처럼, 본래의 성씨에 일본식 성씨인 川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이다. [37]
  • 서정주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본관인 '달성'으로 창씨했다. '달성'을 일본어식으로 읽어도 위화감이 없으므로, 본관이 그대로 창씨로 사용되었다.
  •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조선인 최초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 인물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동인이 훨씬 빠르다. 다만 이 이름을 경술국치 이전부터 이미 사용한 것은 사실. 어쨌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노다 영감', '야전 대감'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 송몽규 - 소무라 무게이(宋村夢奎)
  • 송해 - 기무라 후키(木村福): 나무 목(木)은 (宋)씨에서 따와 村을 붙여 일본의 흔한 성씨인 기무라로 만들고, 복(福)은 본명인 '복희(福熙)'에서 따 왔다.
  • 신격호 -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38]: 신 씨들은 본관이나 성씨의 합성명이 흔한 것과 달리, 주역의 간지를 따라 창씨한 예가 많다. 그에 따르면 신(辛)은 중광이 되는데, 중광을 일본어로 읽으면 일본에서 흔한 성씨인 시게미쓰가 되므로.
  • 신병현 - 히라야마 에이지로(平山榮次郞): 본관인 '평산'을 따서 창씨했다.
  • 신불출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특이하게도 두 번이나 창씨개명한 경우. 처음에는 일본어 욕인 칙쇼(畜生)를 파자해서 창씨개명하고 신고했으나 당연히 퇴짜를 맞았고, 그 다음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추임새인 '에헤라 노아라'를 일본어로 음차해서 재차 창씨개명했다. 당연히 트롤링목적이었다.#
  • 신상묵 -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 신현확 - 히라바야시 유쿠니(平林佑國)
  • 심영 - 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 예명인 '심영'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창씨만 하고, '심영'은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아오키(青木)라는 창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을 변형한 것. 실제로 다른 심씨들은 본관 그대로를 따와 아오마쓰라고 지은 사례도 있다.
  • 쑨원(손문) - 나카야마 쇼(中山樵): 쑨원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도쿄의 히비야 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근처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저택이 있었고 이 글자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의 호와 창씨명으로 썼다. 에서는 쑨원이란 본명보다는 창씨에서 유래한 호를 붙인 '쑨중산 선생'으로 더 많이 부른다.
  • 우장춘 -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나가하루는 장춘(長春)의 일본식 독음이고, 스나가란 성은 그가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자로 들어가면서 얻게 된 성씨이다. 다만 해외 논문 등을 발표할 때에는 '나가하루 우'(Nagaharu U)로 쓰는 등 우씨 성을 고집했다고 한다.
  • 윤동주[39] -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성만 일본식으로 바꾸고, '동주'는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본관 파평 윤씨에서 평(平)을 따왔고,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연못에 떠 있던 옥함 속 아이였다는 설화에서 소(沼 : 연못)를 따온 것이다.
  • 윤치호 - 이토 지코(伊東致昊)[40]: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 자를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윤치호의 경우 신문 광고를 빌려 창씨개명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 이광수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香山는 일본의 초대 덴노진무 덴노가 도읍으로 정한 나라현 가시하라(橿原) 시에 있는 가구산(香久山)[41]에서 가져왔으며, 광수(光洙)의 光과 일본식 郞을 합쳐 이름으로 삼은 것.
  • 이동인 - 아사노 도진(朝野東仁)[42]: '동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朝野라는 창씨명은 '전주 이씨 → 조선'에서 온 듯.
  • 이명박 -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일본 출생[43]으로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따라서 통명이었던 아키히로가 주가 되어, 그것을 그냥 한국이름 '명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44] 그의 본관인 경주시의 옛 이름 월성(月城)에서 따와 月山이라 창씨하였다.
  • 이봉창 -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아래 이완용처럼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던 시절에 알아서 일본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는 이봉창이 일본을 좋아하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 그는 일본어도 아주 잘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일제시대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것이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된다.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땐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일본식 이름으로 인해 친일파 밀정으로 오해당한 바 있다. 다행히 김구가 이 때 이봉창이 내뱉은 말 "당신들 너무 한심한 거 아니오? 나 같았으면 그 때[45] 수류탄만 있었으면 콱"을 듣고 일단은 받아줬지만, 감시를 붙이는 등 한동안 안 믿었다고 한다.
  • 이순재 - 히로키 준사이(廣城順載)
  • 이완용 - 리노이에 간요(李家完用):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완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의외로 생전에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고 한다. 대신 영어는 무지막지하게 잘했다고 한다.
  • 이종욱 - 히로타 쇼이쿠(廣田鐘郁): '종욱'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장면 -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 '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 옥산(玉山)에서 따와 옥강(玉岡)이라 창씨하였다.
  • 장준하 - 조안 슌가(張安俊河): 장/준하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역시 당시에 흔한 창씨법이다.
  • 장훈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장'에다 本을 넣어 창씨했다.
  • 오리 전택부 - 젠케 다쿠후(全家澤鳧): 창씨개명 당시에 전씨 집안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전가(全家)'로 했다고 생존 당시 KBS 프로그램인 《사랑방중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름 부분은 '택부'를 그대로 사용.[46]
  • 정일권 -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 '일권'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정지용 - 오유미 오사무(大弓修): 동이족을 나타내는 한자 夷를 파자하여 大弓으로 창씨하고, 활 쏘는 자세를 뜻하는 修를 이름으로 삼았다.
  • 조명하 -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 이름인 명하(明河)를 성씨로 사용하였다[47].
  • 주요한 -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 이름 '고이치(紘一, 굉일)'는 일제의 황도정신이자 일본 제국주의 핵심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이다.
  • 천병규 - 유키다 게이이치(千田圭一): '병규'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채병덕 - 오시마 헤이토쿠(大島秉德): 이름은 병덕을 그대로 썼고 성은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최규하 -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규하'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게이나쓰(圭夏)'였다는 얘기도 있다.
  • 최린 - 가야마 린(佳山麟): 崔를 파자하여 佳山으로 창씨하고, '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최수부 - 다카야마 히데오(高山秀夫). 일본 후쿠오카 출생으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씨는 성인 崔를 의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 최영의 -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 崔에서 山을 따고 앞에 大를 붙여 창씨하였으며,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을 이름으로 썼다. 그래서 그의 이명이 '최배달'인 것.
  • 최지환 -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隆盛)
  • 하판락 -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 하/판락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했다.
  • 현인 - 고토 진(後藤仁): '인'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현제명 -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제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역시 흔한 창씨법.
  • 홍난파 - 모리카와 준(森川潤)
  • 홍진기 - 도쿠야마 신이치(徳山進一)

11. 유사 사례


  • 강요 차원
    • 류큐 왕국은 1522년에 아마미 군도를 병합한 후 야마토 민족계 토착민들을 류큐인에 동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야마토식 이름을 버리고 류큐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오늘날 아마미 군도 주민들은 정체성은 야마토 민족이지만 언어, 문화적으로는 류큐 왕국의 지배에 따른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임진왜란 직후에 명나라의 장군인 모문룡조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아서 이것이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결국 이에 대해 조선이 명나라 측에 항의하는 지경에 이른 바람에 같은 명나라 장군인 원숭환이 그를 체포해서 처형해버리고 뒤이어 조선군이 모문룡의 본거지인 가도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에서 가도의 주민들과 그의 부하들을 포함해서 거기에 남아있던 한족들에게 몽땅 한국식 의복상투를 강요하고, 중국식 성명을 전부 조선식으로 고쳐버렸다.
    •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남 유다 왕국의 유민들도 창씨개명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주역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빌론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에스델서의 에스델모르드개 역시 히브리식 이름은 아니며, 각각 이슈타르마르두크에서 따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베트남참파캄보디아를 정복했을 때 두 민족에게 베트남식 성씨와 이름(한자) 사용을 강요했다.[48]
    • 프랑스는 19세기에 알제리에 프랑스식 이름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식 적극적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반발이 너무 심해서 손해가 크자 1900년대부터 방침을 바꿔 연합주의로 전환했다.
    • 위에도 적혀 있지만 대만이 일본 식민지였을 때 비슷하게 폐성창씨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 위의 창씨개명한 사람 목록에 나와 있듯이 리덩후이(李登輝)는 일제 시대에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성명을 썼었다. 한국 성씨를 남긴 조선과는 대조적으로 대만은 호적에서 중국 성씨를 아주 없앴다. 하지만 애초에 대만에선 그다지 열심히 개성명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허가제를 두어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엄격히 했다. 허가 기준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천황을 제대로 모셨는지(...)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44년까지도 대만의 폐성창씨 비율은 전 대만인의 2%에 해당하는 7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점령하고 아예 독일의 일부로 합병했을 뿐더러 룩셈부르크의 프랑스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으며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두 독일식 이름으로 이름을 고칠 것을 강요했다. 현대 룩셈부르크인들 중에서도 룩셈부르크 북부 지역 사람들은 독일어가 모어이고 독일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역시 트리에스테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슬로베니아인들에게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성씨가 바로 AC 밀란에서 2대 째 전설을 이어오고 있는 말디니 가문(체사레 말디니 - 파올로 말디니)이다. 본래는 성이 믈라디치(Mladic)였다고 한다.
    • 인도네시아수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에 화교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강제로 고쳐서 인도네시아식으로 만들 것을 강요하는 법령을 발표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인니의 중국계 대다수는 성씨가 다음절이다.
    • 1980년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에서는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이라는 정책으로 터키계 주민들의 터키풍 성씨를 슬라브식 성씨로 고치게 했다.[49] 이에 대한 반발로 1989년 국경이 개방되자 30만 가량의 터키계 불가리아인이 터키로 이주하였다.[50] 다만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은 터키계 불가리아인 또한 적지 않으며, 특히 아랫동네인 그리스의 경우처럼 터키어를 쓰고 터키계 정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종교는 정교회인 이들이나 아예 무신론자라서 불가리아 공산당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던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계 불가리아인들에 비해 차별을 덜 받았기 때문에 터키로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는 경향이 더더욱 강했다. 터키로 이주한 터키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이 터키식 성씨를 쓰는 것과 달리, 불가리아에 그대로 남은 터키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은 여전히 슬라브식 성씨를 쓰고 있다.[51] 사실 이러한 일은 터키계 불가리아인만 겪은 게 아닌데, 포마크인·알바니아계 불가리아인·그리스계 무슬림·보슈냐크인·쿠르드족 같은 불가리아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강요에 의해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으로 변형시킨 경우가 많았다.
    • 위의 불가리아와 비슷한 사례인데, 러시아 제국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무슬림 민족들은 현재까지도 국적이 러시아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이슬람식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변형시켜 만든 성씨를 쓰고 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 라흐몬 나비예프 등이 대표적이다.
    • 보슈냐크인, 터키인, 알바니아인, 쿠르드족 등 구 유고슬라비아의 무슬림 민족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 정확히는 세르보크로아트어권식으로 -비치 돌림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도 여권을 발급받을 때 일종의 창씨개명을 당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소수 민족의 이름을 여권에 적을 때는 원음이 아니라 그 이름의 표준중국어 음차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음이 Rehimjan인 이름은 赖希木江을 거쳐 Laiximujiang으로 변하고, 여권에는 REHIMJAN이 아니라 LAIXIMUJIANG이 적힌다. 중국/민족 문서의 여권 발행 시 이름 표기 섹션 참고.
    • 중국 공산당위구르족들에게 중국식 성씨와 중국풍습, 돼지고기 강요 및 이슬람교 개종포기 등을 강제수용소에나 가정 등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다.
  • 자발적인 개명 차원
    • 태국화교들은 태국식 성명을 따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직 총리인 탁신 친나왓잉락 친나왓객가족 출신의 화교인데, 두 이름은 태국식으로 고친 성명이며 각각 丘達新(관화 : 추다신, 한국 한자음 : 구달신)과 丘英樂(관화 : 추잉러, 한국 한자음 : 구영락)이라는 중국 이름이 있다.
    • 과거 캐나다에선 과거 퀘벡 출신 사람들에게 프랑스식 이름을 버리고 영국식 이름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바가 있다. 프랑스식 이름을 쓰면 취직에 차별을 한다거나... 퀘벡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들릴이 프랑수아 들릴이란 이름으로 직업을 구하러 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프랭크 들릴로 이름을 바꾸자 그제야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
    • 벨기에는 과거에 프랑스계 주민들이 우대를 받고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천대를 받는 경향이 강했으며, 당시에는 공용어도 프랑스어 하나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계 주민들 중에서 출세를 위해 성만 그대로 네덜란드식인 채 프랑스식 이름을 쓰고 더 나아가 언어, 문화적으로 프랑스화되는 이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그 후손들로는 지정환 신부와 장 클로드 반담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네덜란드계 벨기에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가 모어였다.
    •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퍼지자 왕족들이 독일계 성씨인 색스-코버그-고사(Saxe-Coburg-Gotha, 독일어로 적을 때는 Saxe-Coburg und Gotha(작센-코부르크-고타))를 버리고 왕실이 보유한 성(castle)의 이름을 따서 윈저(Windsor)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역시 독일계 귀족인 배튼버그(Battenberg, 독일식으로는 바텐베르크) 가문이 성씨를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고쳤다. 이 둘은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성씨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발음은 똑같지만 성의 독일식 철자를 영어식 철자로 바꾸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isenhauer였던 성씨를 Eisenhower로 바꾸었다.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도 Huver에서 Hoover로 고쳤다. 45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도 조부 대에서 Drumpf를 Trump로 고쳤다. 그리고 독일령이나 오스트리아령이던 슬라브 문화권의 독일계 주민들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독일식 성씨를 -스키 돌림의 슬라브풍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며, 독일식 성씨를 고수하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강제로 추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서양에서 다른 국가로 이민하는 사람이 본래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해당국 언어에서 대응되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만약 'Friedrich Johansen'(프리드리히 요한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Frederick Johnson'(프레더릭 존슨)이라고 개명하는 식. 대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철자를 유지하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는 나라마다 발음이 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같은 유래의 유사한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에 가깝다.
    • 앙겔라 메르켈 현 독일 총리의 할아버지는 폴란드인으로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루드비크 마리안 카지미에르차크(Ludwik Marian Kaźmierczak, 1896~1959)인데, 원래 비엘코폴스키에포즈난(Poznan - 1차 대전 전까지는 독일 제국포젠)에서 살았지만 이후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경찰로 살았으며, 1930년 이름을 독일식인 루트비히 카스너(Ludwig Kasner)로 고쳤다.
    • 화가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었지만, 멕시코에 이주하면서 빌헬름의 스페인식 이름인 '기예르모'로 이름을 고쳤다.
    •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아버지가 독일인이지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칼→카를로스가 되었다.
    •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빌헬름 아폴리나리스 데 코스트로비스키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라는 폴란드식 이름이 본명이었는데,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고쳤다.
    • 출생 당시 프랑스령 지역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포르티누노 프란체스코 베르디의 출생 증명서는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 베르디'라는 프랑스식 인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영국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영국식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고쳤다.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만주족은 대부분 한족식으로 성씨를 바꿨다. 주로 본래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와서 중국식 성씨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조상이 만주족으로 귀화한 한족인 경우 조상의 한족식 성씨를 썼으며, 조상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 만주족에 동화된 조선인 포로였던 경우에는 조상의 조선식 성씨를 썼다. 아버지가 만주족이고 어머니가 한족 출신 첩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온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와 어머니의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가 공존했다.
  • 번역 차원
    • 영국 고전 동화 피터 래빗이 다른 유럽권 국가에서 출간될 때는 '피터 래빗'을 해당 국가에서 통용해서 쓰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간한다. 가령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라팽(Pierre Lapin), 독일에서는 페터 하제(Peter Hase) 스페인에서는 엘 코네호 페드로(El Conejo Pedro)로 출판하는 식.
    • 유럽어 위키백과의 각 언어판에서 군주와 왕족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해당 언어식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기재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1세의 스페인어판 문서명은 이사벨 1세, 이탈리아어판에서는 엘리사베타 1세, 독일어판에서는 엘리자베트 1세로 기재된다. 현대에 재위한 군주의 경우 후안 카를로스 1세처럼 해당국의 명칭을 존중하여 그대로 기재하는 경우도 있지만,[52] 번역된 이름을 항목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의 스페인어판의 문서명은 기예르모 알레한드로, 이탈리아어판의 문서명은 굴리엘모 알레산드로이다. 사실 이건 옛날 브리태니커에서부터 이랬다. 단, 군주제 국가일 경우. 공화국의 수장 이름은 원어 표기법을 존중한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 '프란체스코 올랑드'로 기재되는 경우는 없다.

12. 한국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다섯 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귀화하러 오는 외국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화인을 겨냥했다기 보다는 이름이 긴 사람이 속속 생겨나자(예를 들면 박초롱초롱빛나리) 업무를 처리하기 난감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름의 글자수를 제한시키기는 한다. 한자, 한글 불문.[53]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를 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54]
예를 들어 사토(佐藤)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성을 '''한글로''' '사토'라고 써야 하며,[55]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佐藤을 성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한국 한자음대로 무조건 좌등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 호사카 유지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라서 굳이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필요는 그닥 없다. 현재는 洪吉童(ホン·ギルドン) 또는 シム·チョン(沈淸)처럼 쓰는 게 보통. 일본에 완전히 정착해서 자식 낳고 산다면 몰라도...[56]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 문화권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일본식 한자음을 빌어서 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이름이 성준이라면 '세이타의 成에 슌스케의 俊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건 단순히 표기법이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각종 지원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비록 발음은 한국식, 중국식으로 후리가나를 달더라도 한자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이라면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 한자와 독음이 잘 매치가 안 되는 성명을 가진 사람의 겅우에도 똑같이 한다. 단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훈독음을 알려준다.

13. 번역상의 표기


참고로 서양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57] 지금도 교황이나 왕족의 이름을 적을 때는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58]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그냥 마리아가 프랑스에서는 마리, 영국에서는 메리라고 자동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은 원리로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인물 이름들은 유럽권에서는 자국의 언어(표기 방식)로 '번역'된다.
따라서 만약 민족국가 형성 전, 여러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의 이름이라면 차라리 당대의 공용어 격인 라틴어(또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게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카롤루스 대제. 좀 경우는 다르지만 콜럼버스도 유사한 사례이다.
한편 이런 '번역식' 인명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도 똑같다. 현대에는 원어를 존중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물론 쿨하게 씹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 근대 이전 인명/지명은 그런 것 없이 자국의 방식대로 읽고 쓰는 게 보통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 한자 읽기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역사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생긴 특수한 예이고, 한국도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인명/지명도 예외없이 한국식으로 읽었다. 근대 이전은 풍신수길, 근대 이후는 이등박문을 생각하면 된다. 중국의 경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물들은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독음 모두 통용된다. 표기법상으로야 신해혁명 이후 인물은 중국식 독음 표기가 원칙이지만... 대략 이홍장원세개, 양계초 이후 인물들이 여기 해당한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 이 대표적이고, 이들보다 후대 인물로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엽까지 활동한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도 한국식 독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호금도, 습근평 등 중국인들의 이름이 거의 한국식 독음으로 불리지 않는다. 단, 조선족들이나 북한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고 있다.

14. 참고 문헌


  •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구광모, 중앙대학교)[59]
  • 동화정책 사례연구 -창씨개명을 중심으로- (구광모, 중앙대학교)[60]
  • '족보'와 '창씨개명'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박제홍, 김순전, 전남대학교)
  •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미즈노 나오키, 정선태 역, 산처럼 2008)
  •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 개성명 비교 연구.(이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 굿모닝 예루살렘(기 들릴)[61]

[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232577[2] 이 때문에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15원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을 말해 보게 해서 어두에서 탁음 발음 가능 여부를 악용해 조선인을 구별하여 학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3] 가령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사관학교였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는 당대 만주국에 국적법이 없음에도 일본인은 일계(日系), 조선·중국·대만인은 만계(滿系)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창씨개명과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첨언하자면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일본인과 다른 민족을 아예 별도로 구분해서 식사시간에조차 서로 마주칠 일이 없을 만치 분리교육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후 조선인 학생들의 항의로 조선인을 중국인과 분리하여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교육받도록 하였다.[4] 대조적으로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는데 대신 강제가 아니었다.[5] 朝鮮姓名復舊令에依하야名復舊 檀紀四貳七九年拾貳月貳拾四日改訂함(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이름을 복구함. 단기 4279년 12월 24일 개정함.)[6]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일제시대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경우라면 성명복구령에 의하여 당연히 종전의 한국식 이름으로 복구되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 창씨명은 이미 무효로 된 이름이므로 개명의 절차에 따라 개명할 사항이 아니고 호적정정의 대상으로서 호적공무원이 직권정정절차에 따라 정정하여야 할 사항이고, 다만 그러한 창씨개명의 사실이 호적(제적)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 때에는 사건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여 직권정정을 촉구하는 의미의 호적정정신청을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구 호적선례 2-339).[7] 당시 일본이 조선을 완전한 일본으로 병합하고 제국의 수도를 지진나는 도쿄에서 안전한 용인시(지금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부지.)로 천도할 계획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출처가 1980년대 한국이고 1차 사료도 없다. 매우 일방적인 주장이라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일본은 분명 식민지 시기 최후반까지 조선을 일본과 다른 '외지'로 인식했다.[8] 源平藤橘,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다치바나[9] 예를 들어, 평생을 일본인으로 살고 한국어조차 할 수 없는 아라이 히로후미는 성범죄를 저지르자마자 곧바로 본명인 박경배로 환원되어 버렸다.[10]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11] 지금의 경상북도에 대구광역시가 포함된 반면 울진군이 제외되었다.[12] 지금의 전라북도에 금산군이 포함되었다.[13] 당시 창씨 비율은 경상북도 22.8%, 충청북도 12%, 충청남도 9.6%, 평안북도 7.7%, 경기도 7.1%, 평안남도 6.7%, 황해도 6.1%, 강원도 5.5%, 경상남도 4.8%, 전라남도 4.6%, 함경북도 3.7%, 함경남도 3.6%, 전라북도 1.8%였다.[14] 일본의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쓴 이조잔영과 이를 가지고 만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족보(영화)에 이러한 당시의 모습이 잘 반영되었다. 카지야마는 실제로 식민지 조선의 경성 출신이었다.[15]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최소 70대 후반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왠지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비개명] A B C D E F G H I J [16] 이외에 빠스껫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17] 조선시대 당시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유명인물로는 권근·권람·권율 등이 있다.[18] 만약 본관이 일본어로 읽었을 때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이라 한다거나…….[19]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를 했다.[20]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도 나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심영'''으로 알려져있다.[21] 단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의 경우, 창씨를 안 해도 되지만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라는 발언을 하였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가기도 했다. 이 사람은 친일 경력 덕에 검찰단계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22] 물론 정황상 정말 같은 종가로 오인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면서 비꼬려고 한 행동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상식적으로 종가인지 아닌지 족보를 다 따져 볼 텐데 몰랐을 리가...[23] 음독 그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근처에 난구산(남궁산,南宮山) 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한두 번 정도는 들어 본 지명이다.[24] 훈독(미나(미)+미야)[25]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기노시타 히데요(木下英世 목하영세)도 조선식 성은 박씨다.[26]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27]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네다(金田)라든가 아키야마(秋山)라든가.[28]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성씨로 바뀐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29] 倉衛는 의미상으로는 관계 없는 한자이지만, '먹어라'라는 뜻인 喰らえ와 독음이 같다. [30] 지금의 70대 후반~80대 초반. 대표적으로 츠키야마 아키히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명박 대통령이 이 케이스이다.[31]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특성을 따서 창씨했다는 얘기가 퍼져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도요타로 창씨한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32] 시로야마 세이주라는 주장도 있다. 훈독이냐 음독이냐의 차이[33] 김성근의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잘못된 훈련법때문에 비난이 쏟아지자, 그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사실상 그에 대한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세이콘 드립 문서 참조.[34] 그의 공주고등보통학교 시절 학적부에는 1940년 4월 18일이라는 창씨개명 날짜까지 정확하게 남아있다.97년 대선 당시 기사[35]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実)나 마쓰모토(松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구사범 당시 교사명과 혼동한 것이다.[36]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외국어 번역 촉탁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사직한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제통치의 현실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37] 백선엽의 창씨명은 본인이 거론하거나, 거론된 적 없었다. 해방 이후 조선 이름으로 복구시키는 법령까지 나온 마당에, 치욕스러운 창씨명을 본인도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못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간도특설대'의 저자 김효순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만주군 옌지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에서 발견하여 알려졌다.[38] 194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방 이후에도 이 이름을 통명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사실상의 본명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이름을 쓴다. 그의 아들들 역시 일본 통명이 있다.[39] 당시 일본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명서 발급 탓에, 창씨명을 만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윤동주 문서 각주 참고.[40] 이를 두고 한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이 똥 치워'라고 윤치호를 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1] 해발 152 m짜리 야트막한 산이지만, 헤이조쿄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시되었다. 만요슈에서도 가구산를 자주 언급하며, 오늘날 일본도 중요성을 인정하여 역사적풍토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가구산에 오르곤 한다. 진무 덴노가 도읍했다는 우네비산도 아니고 하필 가구산에서 이광수가 성을 따왔음은 가구산이 야마토 3산 중 가장 특별한 곳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42] 개화승으로 유명한 그 이동인이다. 임종국의 연구에 의하면 창씨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의 본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통도사에서 정식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개화승 부분도 논란이 있어서, 임종국은 이동인을 이중스파이로 지목했다.[43] 일본 오사카 시 히라노 구 출생이다.[44] 참고로 이명박 형제는 상자 돌림을 쓰고 있고(이상득-이상은), 이명박 역시 족보에는 돌림자가 사용된 '이상정(李相定)'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상 성명과 족보상 성명이 다른 경우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45] 덴노의 행차를 말한다[46] 덤으로 호인 '오리'는 이름자에 있는 鳧(물오리 부)에서 따온 듯.[47] 참고로 이 이름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일부러 창씨개명한 이름이라고 한다.[48] 창씨 개명뿐 아니라 다른 동화 정책과 문화 말살 정책도 펼쳤는데 참파의 경우 이슬람힌두교를 믿던 참족에게 종교별로 돼지고기쇠고기를 강요했고 힌두,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베트남인들이 믿는 대승불교 사찰을 지었다. 캄보디아를 잠깐 합병했을 때에는 합병 1년 만에 창씨개명, 풍습개조, 지명개명, 직할화, 캄보디아 왕족과 관리들에게 베트남식 단령 착용 강요 등을 시행하는 동시에 남부 베트남의 크메르족 마을의 경우 베트남인 촌락으로 크메르족 촌락을 포위하고 강제 통혼 혼혈을 시켜가면서까지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오늘날 베트남 남부지역 주민들은 베트남화된 참족과 크메르족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베트남 북부지역 주민들과 달리 전형적인 동남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황인과 네그리토의 혼혈)이 드러나는 편이다.[49] 가령 유명한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는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변경되었다. 터키로 탈출하면서 지금 이름은 나임 쉴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이다.[50] 혈통상 불가리아계였지만 조상이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대대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게 된 포마크인 또한 독립국가 불가리아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터키계와 함께 지금의 터키 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51] 공교롭게도 터키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 또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러시아 제국소련의 영향을 받아 터키식(아제르바이잔식) 이름과 슬라브식 성씨를 쓴다.[52] 이탈리아 위키백과나 프랑스 위키백과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항목명은 Juan Carlos이다.번역명을 썼다면 Giovanni Carlo나 Jean Charles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단, 폴란드어 위키백과에서는 Jan Karol이라는 번역명으로 기재되었다.[53]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54]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를 지정하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한다.[55]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56] 그 경우도 귀화하지 않으면 한국 이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성인이 돼서 넘어간 케이스. 당장에 김무영 같이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는데도 한국 이름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이 사람은 부인이 일본인인데다가 미필이라 한국에 돌아오면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에 반강제로 일본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57]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 텐데 옛날 사람이거나 현대의 인물이라도 왕족일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58] 예를 들어 요한 바오로 2세는 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 우크라이나어로는 Іван Павло II라고 쓴다.[59] 배경, 전개, 목적 부분.[60] 배경 부분.[61] 퀘벡 사례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