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朴家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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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옥 피부에 대한 열망, 박가분
한때 한국에서 판매되었던 화장품.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상표 등록, 판매되었으며, 공산품으로는 한국 최초로 제작된 화장품이다.
판매업체는 오늘날 두산그룹의 창업주 박승직이 경영하는 '박승직상점'[1] 이라는 곳이었으며, 제작한 사람은 박승직의 아내였다. 어느 날 박승직의 아내는 한 노파가 백분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부업으로 백분을 만들어서 팔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과 상의 끝에 십여 명의 여성들을 모아 백분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박가분의 시초가 된다.
2. 폭발적인 인기. 그러나…
처음에는 박승직이 운영하는 포목점 단골에게 사은품으로 주던 것을 시작으로 세상에 나온 박가분은 곧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신문에 실린 한 여성의 사용 후기에도 "물이나 기름에 잘 녹아 피부에도 잘 발리고 미백 효과도 뛰어나다"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 박가분이 인기를 얻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방물장수들이 박승직의 집으로 모여들었고, 잘 나갈 때는 하루에 1만 갑이 넘게 팔릴 정도로 당시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특히 직업상 화장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았던 기생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았다고.
당시 박가분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박가분의 화장 효과나 저렴한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포장 방식에도 있었다. 일반적인 백분들과는 달리 박가분은 두께가 매우 두꺼웠고, 작은 갑에 포장된 형태로 판매되었다. 종래의 백분은 두께가 약 3mm 정도 되는 것을 백지로 싸서 팔았으나, 박가분의 경우는 두께가 8mm였다. 또한 상단의 사진과 같이 인쇄 라벨을 붙여 상품 가치를 높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박가분의 이런 인기는 20년도 채 못 가서 서서히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3. 박가분의 몰락
박가분이 워낙 인기였던지라 1930년 이후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서가분, 장가분 등 각종 유사 제품들이 난립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더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외래품[2] 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박가분의 몰락에 결정적인 단초가 된 것은 바로 '''유해성'''이었다. 당시 박가분을 사용하던 여성들 사이에서 피부가 푸르게 괴사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박가분을 자주 사용했던 기생들 중에서는 정신 이상을 일으키는 사례도 속출했다고 한다. 급기야 한 기생이 박가분 때문에 얼굴을 망쳤다며 고소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심지어 정신 이상을 일으킨 기생 하나가 박가분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박가분은 순식간에 '살을 파먹는 가루'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결국 1937년 박가화장품이 자진 폐업함과 동시에 생산이 중단되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3]
이 모든 부작용은 바로 납 중독 증세였는데, 박가분의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박가분의 실체는 화장품이 아니라 '''납 가루'''를 얼굴에 발라서 피부를 하얗게 보이도록 했던 것. 그 성분인 백납(white lead, 2PbCO3·Pb(OH)2) 은 백색 물감에 사용될 정도로 매우 불투명한 백색의 고운 가루다. 납 가루로 만든 분은 얼굴에 아주 잘 달라붙어 화장이 잘 먹었다. 문제는 피부에 잘 흡수되어 피부를 망치고 납 중독을 일으킨다는 것.납 조각을 식초로 처리한 뒤 장시간 동안 열을 가하면 표면에 하얗게 가루가 돋아난다. 이를 '납꽃'이라고 하는데, 이 납꽃을 긁어 모은 다음 조개 껍질 가루, 칡 가루, 쌀 가루, 보릿가루를 섞어 흰 가루로 만들었다.
이후 박승직도 박가분을 남용하다 피부가 괴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1935년에 일본 화장품 업계에서 일하던 기술자를 초청해 생산 방식을 바꿨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박가분은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한 박가분 이후 생산되는 모든 화장품 광고에 "절대 납이 들어있지 않음"이라는 구절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었다.
[1] 현 (주)두산 글로넷BG.[2] 중국산은 '청분(淸粉)', 일본산은 '왜분(倭粉)'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청은 청나라를 말한다. 당시에는 중국을 중국/중화라는 말보다 청이라 부른는 게 더 흔해서, 중국요리집도 청요리집 등으로 자주 불렀다. 불과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집이 아니라 청요리집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3] 이후 맥주 사업으로 완전히 눈을 돌렸다.